#215. 모래폭풍 (3)
띠링!
[연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연계 퀘스트 #1. ‘수맥 돌파’]
[용사는 6층 만골사막과 7층 천공섬을 잇고 있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중심부에 도달했습니다. 이 문을 열면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과 세계수의 맹약이 무효화 됩니다.
즉, 세계수를 내부에서 지켜내는 면역 체계가 붕괴되는 것이지요. 병원균의 침투에 취약해진다는 뜻. 아, 여기에서 병원균은 물론 용사 당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문과 30초 동안 접촉하는 일은 극히 어려울 것입니다.
세계수 최강의 수호자인 구미호 호이란이 전성기의 힘을 온전히 보존한 채 당신을 방해할 테니까요. 여우에게 찢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기한: 6시간]
[보상: 무극참월공의 레벨 +1]
‘알겠어. 이번 층의 시련이 무엇인지. 내가 직접 세계수의 뿌리로 향하는 문을 열어야 하는 거였어.’
캉이의 엄마를 찾는 일과 골제와의 협약을 수행하는 일.
둘 중에서 고민하던 내게 교도관장은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두 선택은 결국 하나로 귀결될 것이라고.
구미호의 꼬리가 내 눈앞에서 넘실거렸다.
“30초다. 해낼 수 있겠는가. 손속에 정을 둘 필요는 없다. 나는 사망의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는 몸. 죽어도 곧 되살아난다.”
“그럼 전력을 다해 죽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거기엔 지금까지 내가 단 한 번도 직접 뽑아 들지 못했던 용사전용검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이 있었던 것은 당신의 아들에게 비밀로 해주십시오.”
SS급 성검 아론다이트가 내 손바닥에 감겨왔다.
오직 이 해방의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교도관장의 안목이 옳았기를 바라마.”
구미호의 집채만 한 앞발이 나를 할퀴어왔다.
스탠드워핑.
제자리 점멸 기술로 그 공격을 통과시킨 후 멀어지는 호이란의 앞발을 노렸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삼식 살신참(殺神斬)]
촤아아아악!
완전히 베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얕았다.
내가 어떤 기술을 사용할지 전혀 아는 바가 없음에도 순간적인 반사신경으로만 피해낸 것에 감탄이 나왔다.
우우우웅.
호이란의 머리 주변에 4개의 만다라가 생성되더니 각각의 만다라에 범상치 않은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여우트림 극(極)]
한 개의 만다라에서 붉은 광선포가 터져 나왔다.
캉이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굵기와 박력.
무영보로 몸을 빼냈으나 이번엔 동시에 3개의 여우트림이 전방과 후방에서 나를 덮쳤다.
콰아아아앙!
아론다이트를 거꾸로 세워 막아냈으나 후방에서 날아온 광선포엔 직격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데굴데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났다.
[즉사 수준의 대미지가 아니므로 피해량이 0으로 무효화 됩니다.]
골수까지 진동시키는 충격이 고스란히 남았다.
“말도 안 되는 기술이네.”
캉이의 여우트림을 처음 맞았을 때도 죽다 살아났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능적인 힘의 발현이었을 뿐 제대로 된 술법이 아니었다는 걸 절감했다.
호이란의 여우트림은 입에서 토해지는 게 아니었다.
마법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만다라에서 사전 동작 없이 터져 나온다. 턱이 열리는 각도와 타이밍을 계산해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전신 용체화를 시전한 이멜타스가 호이란의 옆구리를 노리며 덤벼들었다.
구미호와 이무기가 곧 검은 통로를 진동시키며 육박전을 벌였다.
환수들의 거체가 벽에 충돌할 때마다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세계수의 잎맥이 요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동안 제법 사내다워졌구나, 이멜타스.”
“어머니의 꼬리를 이어받았으니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너 혼자선 역부족이니라.”
이멜타스가 호이란의 매끈한 목을 물고는 허리를 활처럼 젖혀 상대를 들어 올렸다.
막대한 체중이 실린 메치기가 작렬하려는 순간, 바닥에 내리꽂히는 건 이무기의 머리뿐이었다.
충돌 직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호이란이 이멜타스의 정수리를 짓밟고 있었다.
“구미호는 어느 형태를 하고 있든 강하다. 오만한 유희인 폴리모프 따위와 비교하면 곤란하지.”
호이란의 타오르는 동공이 나를 향했다.
저격수의 스코프에서 쏘아지는 레드닷이 가슴을 겨누고 있는 기분이었다.
만다라의 여우트림뿐 아니라 전조도 없이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어째서 호이란이 용왕 게브라둠과도 박빙의 승부를 벌여 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때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호이란을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 너는 문으로 달려가.”
“괜찮겠어?”
“내 마법진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똑똑히 지켜보기나 해.”
아스티나의 마력 회로가 가동되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약실이 후끈 달아오른 총기를 보는 느낌.
무영보로 전장에서 이탈한 나는 곧바로 손바닥을 문에 가져다 대었다.
[위그드라실의 수맥이 죄수와 동조합니다.]
[남은 시간: 29초]
[남은 시간: 28초]
호이란의 만다라가 다시 한 번 여우트림을 내뿜었다.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그것을 부드럽게 영격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자이언트 포스 쉴드(Giant Force Shield)]
푸르스름한 반구형의 방어막이 여우트림과 충돌하며 광선포의 궤적을 뒤틀었다. 두 발짝 물러나긴 했지만 아스티나는 당당히 원거리 공격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저게 뭐야?
처음 보는 중력 마법이었다.
아스티나의 어머니이자 내 마법 스승님인 참월의 마녀도 저런 위력의 술식 전개는 알려준 바가 없었다.
‘스스로 술식을 만들었어?’
0층 대기실에서 아스티나가 한 단계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보통 형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 마법들과 달리 육안으로 방어막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마력량으로는 불가능한 성취였다.
“제법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하지만 구미호는 아직 전력을 발휘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4개의 만다라를 일직선으로 겹쳐 세운 호이란이 마치 팔찌를 차듯 오른팔을 관통시켰다. 그러자 만다라가 빠르게 회전하며 신체의 흉기화를 완성시켰다.
그러고 나서 내뻗는 정직한 주먹.
콰지익!
그것이 아스티나의 포스 쉴드를 단박에 깨트려 버렸다.
청룡패웅검을 바닥에 꽂은 아스티나가 10미터 넘게 주르륵 밀렸다.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강제로 술식이 깨지는 바람에 마력 회로의 과부하를 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 후로 아스티나와 이멜타스가 호이란을 상대로 협공하며 시간을 벌어보려 했다.
[위그드라실의 수맥이 죄수와 동조합니다.]
[남은 시간: 15초]
하지만 둘이서도 구미호의 어마어마한 공격력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놓치며 처박혔을 때 문에서 튀어 나갔다.
“젠장!”
호이란의 정수리를 일도양단하기 위해 날아올랐으나 그녀의 아홉 꼬리가 공처럼 말리며 아론다이트를 튕겨냈다.
다시 펼쳐진 꼬리가 시야를 교란시켰다.
사각에서 날아온 호이란의 손아귀가 내 목뼈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잔꾀 같은 걸로 승부 볼 생각하지 말거라.”
“무, 무슨 소리십니까.”
호이란이 내 목을 붙잡지 않은 반대편 손바닥을 어디론가 뻗었다.
여전히 잠금이 해제되고 있는 문의 방향.
그곳에 달라붙어 있던 내 왼손이 무력하게 날아왔다. 그것을 호이란의 손이 가볍게 낚아챘다.
“분리가 자유로운 해골이라니. 제법 머리를 썼다만 세계수의 내부 공간에서 내게 사각의 영역이란 없다.”
워핑으로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뒤 사자교령술을 발휘해 다시 왼손을 되찾았다.
호이란은 미련 없이 내 왼손을 놔주었다.
상황은 다시 리셋.
문을 열어젖히려면 또다시 30초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내 등 뒤에서 아스티나와 이멜타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직 몇 번의 합공은 할 수 있을 터이지만,
“장기전은 절대로 안 돼.”
승부를 길게 끌 수가 없다.
그림자 상태여서인지 호이란은 숨을 헐떡이거나 체력이 고갈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반면에 이쪽에선 호이란에게 한 번 얻어맞을 때마다 생사를 오가는 대미지를 입는다.
“작전을 다시 짜봅시다.”
몸빵이 가능한 내가 호이란을 상대하고 다른 둘이 그녀의 빈틈을 노리는 전략으로 가야 한다.
30초라는 숫자에 현혹되었던 과거는 버리기로 했다.
“호이란을 쓰러트리는 게 먼저입니다. 문을 여는 건 그다음으로 하죠.”
더 이상의 꼼수도, 눈속임도 쓰지 않겠다.
기나긴 세월 아들의 귀환을 기다려온 이 구미호를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전력을 증명할 차례였다.
“오시죠, 호이란. 힘 싸움으로 가봅시다.”
“바라던 바다.”
다음 순간 무려 아홉 마리의 여우가 우리 셋을 원형으로 둘러쌌다.
‘이런, 분신술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
아론다이트를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
“아저씨, 우리 엄마는 얼마나 강할까?”
세계수의 가지 끄트머리에서 캉이는 운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곳에나 시선을 던진 것이지 머릿속은 온통 호이란을 만나기 위해 입구로 몸을 던진 동료들 생각뿐이었다.
“너나 그녀나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본질은 긴 시간 동안 성장하는 환수지. 만약 그 척도가 우리 마족과 비슷하다고 가정해보면…… 성인이 되는 순간 힘이 만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는 뜻은 캉이의 힘은 아직 구미호의 진정한 힘을 절반 성장시키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쿠우우우웅!
또 한 번 묵직한 진동이 위그드라실의 내부에서부터 전달돼 왔다.
교도관은 호이란의 그림자가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 슈바인 형아가 위험하지 않을까?”
“녀석은 그 강력했던 크로톤의 약점을 찾아내 결국 쓰러트리지 않았냐. 문제 없을 거다.”
“문제 없어도 문제가 생겨, 아저씨. 우리 엄마가 형아한테 지기를 바라야 하잖아. 기분이 이상해.”
“흐음.”
이 어린 녀석에게 아직 어른들의 사정을 설명해주는 건 제르비어스에게 있어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려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너는 언제쯤이나 날 아저씨가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불러줄 거냐, 앙?”
“왜에? 아저씨란 말이 싫어?”
“친근함이 전혀 없잖나, 친근함이.”
“하지만 형아나 누나보다 아저씨가 훨씬 나이가 많다며. 삼백 살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어?”
아픈 곳을 찌르는군.
하지만 제르비어스는 이런 공격을 맞받아칠 준비가 진작에 되어 있었다.
“그렇게 치면 이멜타스도 수백 년 묵은 이무기다. 그런데 왜 이멜타스는 형아고 나는 아저씨냐?”
“어어? 그러네.”
캉이의 눈빛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한 제르비어스의 작전은 제대로 먹혀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호칭이 재정립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가장 민감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던 존재가 이상을 감지한 것이다.
“지금 당장 교도관에게 돌아가야 해!”
캉이의 머리카락에 앉아 있던 토니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 쪽만 남은 그녀의 날개가 공포로 파르르 떨고 있었다.
“요, 용들이 몰려오고 있어. 그것도 한둘이 아니야.”
듣고 있던 제르비어스가 슬그머니 팔짱을 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토니아. 용은 세계수에 다가올 수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내 탐지가 잘못되었다고?”
“아닙니다. 제게도 강력한 생명 반응이 이 세계수에 접근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오토마타 레나스는 공포를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평이한 음색이 거꾸로 더욱 불길한 예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오고 있는 거지?”
제르비어스의 중얼거림이 세계수의 이파리에 부딪혀 바스러졌을 때.
천공섬의 운해 속에서 수십 개의 검은 점들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