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모래폭풍 (2)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수심.
바닥에 내려서자 놀랍게도 인공적인 불빛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뿜어내는 광채보다 훨씬 강렬한 광원이 존재했던 것이다.
수많은 줄기들이 벽면을 넝쿨처럼 타고 내려오고 있었는데, 마치 깜빡이는 램프처럼 그 안에서 빛이 맥동하는 중이었다.
“신비로워.”
아스티나의 소감에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거인 크로톤의 체내도 걸어본 적 있었지만 그때는 끔찍한 괴물의 위장 속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크로톤에게 강제로 흡수당한 영혼들은 음흉하게 날 유혹했고.
고통과 신음으로 점철된 불쾌한 장소였다.
이곳은 다르다.
굳이 기감을 펼치거나 마력 회로에 신경을 집중시키지 않아도 생명의 기운이 터질 듯 넘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우리가 떨어진 회랑은 수십 개의 통로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강렬한 존재감이 터져 나오고 있어서 제대로 된 방향을 짚어내기가 까다로웠다.
그것은 이멜타스와 아스티나도 마찬가지.
“단탈리온에게 물어보면…….”
그때였다.
수백 개의 빛줄기가 잠시 암전되는 듯하더니 강렬한 붉은 색 줄기 하나가 유독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이 안내선을 따라오라는 듯이.
“느껴진다. 어머니가 우릴 부르고 있어.”
이멜타스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는지 홀린 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스티나와 나는 시선을 한 번 교환한 다음 경공술로 따라붙었다.
쉬이이익!
갑자기 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세 개의 뿔이 달린 네발짐승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 반대쪽 벽을 뚫고 사라졌다.
“아스티나, 봤지?”
“응. 무척 강해 보이는 환수였어.”
그 후로도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형태의 짐승들이 반투명한 모습을 한 채 등장과 사라짐을 반복했다.
유니콘인지 페가수스인지, 아니면 그 둘의 혼종인지 모를 명마들. 그리고 비늘과 털을 한 몸에 가진 거미.
마치 우리의 존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로 흘러들어온 죄수들의 영혼일 것이다.
달리기를 멈추고 차분히 구경했더라면 현무나 청룡, 마그마 엘리게이터처럼 익숙한 환수들을 찾아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이멜타스의 꽁무니를 따라잡는 것만 해도 벅찼기 때문이다.
평지가 급격히 내리막길로 변하던 와중.
“슈바인, 여기서 길이 막힌다.”
인간 형태로 폴리모프한 이무기의 등이 보였다.
그가 멈춰 선 곳 앞에는 문이라기보다는 벽에 가까운 구조물이 마주하는 이를 압도하고 있었다.
푸르가토늄으로 만들어진 평평한 경사면.
그것을 문이라고 인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붉은 빛줄기가 직사각형의 형태로 둘러쳐져 있었던 까닭이었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이멜타스의 부르짖음은 메아리치지 않았다. 마치 세계수의 줄기가 음성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듯.
“이멜타스입니다. 아들의 목소리를 잊으셨습니까!”
생이별한 시간이 이백 년에 가깝다고 들었다.
고작 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 수명을 가진 인간에겐 이 아득한 그리움의 시간을 짐작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이멜타스가 목청이 터져라 외치고 난 직후였다.
어디에도 호이란의 기척이나 형상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내게만 보이는 푸른 창의 존재 덕분이다.
띠링!
[돌발 퀘스트 #15. ‘천년여우의 발자국’을 완료하였습니다.]
[용사는 캉이의 어머니인 호이란의 행방을 찾아냈습니다.]
[보상으로 민첩이 200 오릅니다.]
[민첩 스탯이 한계 수치인 999에 도달했습니다.]
[연계퀘스트 ‘스켈레토마키아’가 해금되었습니다.]
870이었던 민첩 수치마저 999를 돌파했다.
이제 푸르가토리움에 처음 붙잡혀 왔던 대기실.
수갑이 채워지기 전, 정권지르기만으로 풍압을 일으킬 수 있었던 완벽한 용사의 경지를 드디어 뛰어넘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스티나는 곧바로 내 성장을 눈치챘다.
“더 강해졌구나, 슈바인.”
“응. 교도관장이 내준 퀘스트가 방금 완료됐거든.”
“그렇다는 건……?”
“호이란의 행방을 찾았다는 뜻이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그녀가 있어.”
우리의 대화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이멜타스가 구미호의 이름이 언급되자 헐레벌떡 다가왔다.
“정말이냐? 이곳에 있다고?”
“그래. 곧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스산한 느낌과 함께 주변에 넘실대던 붉은빛이 한 점에 모여들었다.
그것은 곧 아홉 개의 꼬리를 요염하게 늘어뜨린 흑발의 여인으로 바뀌었다.
경국지색.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음에도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를 처음 봤을 때를 연상케 하는 존재감이었다.
“문 반대편에 현신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구나. 언제나 해골들만 상대하다가…….”
호이란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이멜타스? 너냐?”
감격에 찬 얼굴을 한 이멜타스가 호이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정녕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내 어찌 너의 얼굴을 잊겠느냐. 한 번 목숨을 구해줬다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질긴 녀석을.”
“……변하지 않으셨군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이멜타스는 세계수에게 흡수된 환수의 그림자는 지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투귀가 될 뿐이라며 낙담했었다.
하지만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호이란의 눈빛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성은 또렷해 보였고,
폭주나 흑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방심하지 마. 전신에 살기가 흐르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티나의 표정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무려 용왕에게 적대했던 죄수였으며 감옥에 붙잡혀 오기 전에도 한 나라를 멸망시켰던 여우.
지금의 나는 흑마법의 손길로 해골 병사가 되어 있었기에 느끼지 못하는 압박감을 아스티나는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는 모양이다.
호이란은 우리는 안중에도 없이 그녀의 양아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214년이라고? 믿기 어렵구나. 세계수의 일부가 된 이후론 의식이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을 직시하기가 어려워.”
“평소에는 잠들어 계신 겁니까?”
“세계수가 필요로 할 때만 깨어난다. 순간의 기억은 남아 있으나 그것들이 서로 정렬되지 않는 느낌이야. 너와 작별한 것이 불과 며칠 전처럼 느껴진다.”
“어머니,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인 구미호 소년이 현재 이 층에 올라와 있습니다.”
후우우우웅!
다음 순간 호이란은 내 어깨를 붙잡은 채 흔들고 있었다.
딸그락. 달깍.
“내 아들! 내 아들이! ……해골이 된 것이냐?”
큼지막한 눈망울이 내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에 압도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한 가지 사실에 경악하고 있었다.
‘전혀 움직임을 읽지 못했어.’
아무리 전투 감각을 깨우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방금 전 호이란의 동작을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여자니까 자신의 아들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내게 접근한 것이라면 그 판단을 내릴 시간도 필요했을 터.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술법을 사용한 건지도 모른다.
내가 방금 전 민첩 스탯 999를 찍은 참이었기에 더욱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흐음?”
그녀는 곧 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아니야. 해골이 되었다 하더라도 꼬리가 있어야 하거늘. 하지만…… 분명히 내 아들의 냄새가 묻어 있는데?”
한 발짝 물러난 호이란이 내게 물었다.
“너희는 누구지?”
“저는 슈바인 스트링거라고 하는 등반죄수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인 아스티나 류라고 하고요. 캉이…… 그러니까 호이란 당신의 아들과 3층에서부터 함께 해온 친구들입니다.”
“내 아들은 무사한가?”
호이란의 음성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수심의 입구가 캉이를 튕겨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바깥에서 엄마와의 재회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요.”
“……세계수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거군. 바깥의 정확한 상황을 내게 알려주겠나, 해골 죄수여?”
나는 이멜타스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간결하게 축약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캉이를 만나게 된 순간에서부터, 중간 중간 만나야 했던 층장, 용왕 게브라둠에서 내가 구출된 이야기까지.
“그래, 용왕의 형량은 아득하게 길었지. 그년은 결코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만…….”
용왕이 언급될 때마다 호이란의 송곳니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한 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호이란. 캉이의 무의식 속에 당신이 남겨둔 전언을 들었거든요.”
“그렇구나. 네가 교도관장이 말했던 ‘왕이 되어 돌아올 자’겠군.”
“네. 당신이 교도관장을 통해 제게 남겨준 꼬리 하나 덕분에 영혼 폭발의 위기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인사는 필요 없다. 그 모든 게 내 소중한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
호이란의 눈빛이 우리가 내려온 천장, 그러니까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수관 쪽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그곳을 향해 날아가고 싶은 듯 보였다.
하지만 호이란의 손목과 발목에는 수갑과 족쇄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이 구미호가 더 이상 죄수가 아니며, 살아 있는 생물도 아니라는 점을 못 박아 주고 있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호이란. 당신의 아들은 현재 캉이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캉이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는 없습니까?”
“세계수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포자의 방어체계를 무력화시키면 된다.”
“어떻게요?”
호이란이 자신의 등 뒤에서 여전히 맥동하고 있는 ‘문’을 가리켰다.
“자격을 갖고 여기까지 온 죄수가 이 문에 30초 동안 접촉하고 있으면 된다.”
고작 30초?
전쟁병기인 세계수가 자신의 방어 시스템을 해제시키는 조건치고는 너무 간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감옥에서 내가 얻은 교훈 중에는 ‘간단해 보이는 장치일수록 믿지 마라’는 것도 존재했다.
다만 그런 교훈의 존재 따위는 알 리가 없는 이멜타스는 여상한 걸음으로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손바닥을 갖다 댔다.
“어머니, 이렇게 말입…… 끄헉!”
질풍과 함께 호이란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엔 큼지막한 몸집의 구미호가 되어 매서운 앞발로 이멜타스를 후려친 뒤였다.
꽈아아앙!
푸르가토늄의 벽면에서 튕겨 나오는 이멜타스가 피를 토했다.
장난스러운 일격이 아니다. 분명 상대를 말살하려는 진심이 담긴 습격이었다.
채앵!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뽑으며 이멜타스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멜타스와 호이란 사이에 섰다.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면서.
“설명을 끝까지 들었어야지, 이멜타스.”
구미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색엔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한 가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문에 접근하려 하면…… 당신이 막아서게 되는 거군요. 그것도 본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그러하다. 이 세계수에 수액에 흐르는 다른 환수들과 내 역할은 다르다. 나는 오직 이 문에 접근하는 죄수를 죽이기 위해서만 현신한다.”
오래전, 호이란은 분명 세계수와 거래를 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교도관을 등졌다.
그 거래의 본질이 무엇인지 지금 밝혀진 것이다.
“비켜달라고 부탁한다고 해도 들어주실 수 없겠군요.”
“물론이다. 이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니까.”
“아까 전에 말씀하셨죠. 벽의 이쪽 면에 현신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반대쪽에서 뿌리를 뚫고 올라온 해골들을 막아선 것이…….”
“그래. 바로 나다.”
골제 바르한과 해골 군단이 끝내 뚫어내지 못했던 마지막 수문장.
6층의 천장에서 난공불락의 재앙으로 군림했던 존재.
그 환수의 정체 역시 호이란이었다.
‘용왕이 아니었구나.’
이번 층에서 내가 전력을 다해 물리쳐야 할 상대는 눈앞의 구미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