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모래폭풍 (1)
‘용이되 용이 아닌 것’
이 모순적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세계수의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뭐야, 이게. 낭패잖아.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 최종 스테이지의 목전에서 블루스크린이 떠 지금껏 애써온 데이터가 전부 날아갈 때의 심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상황.
“제르비어스, 너는 어때? 용과 인연이 있냐?”
“그럴 리가. 전에 말했지 않나. 나는 오래 전에 용이 멸종한 세계의 마왕이었다. 용과 마족이 어울려 살았던 시대는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었어.”
당혹스러워하는 건 환룡 이멜타스도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하는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만…….”
그런데 의외의 인물에게서 또 하나의 빛이 흘러나왔다.
아스티나의 청룡패웅검, 정확히는 청룡의 비늘로 만들어진 검신이 그 진원지였다.
[죄수 위그드라실이 푸르가토나투스 아스티나 류의 접근을 허락합니다.]
사신수 중 한 마리인 청룡.
삼월초원에서 홀로 그 청룡을 사냥해서 대장장이인 만검패웅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검이 가볍게 울고 있었다.
“나는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인데?”
아스티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내게도 청룡패웅검처럼 ‘용의 이름’이 붙어 있는 아티팩트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다만 검의 형태가 아닐 뿐이다.
“인벤토리 소환.”
은백색 풀 플레이트 아머가 해골 병사의 몸을 감쌌다.
드래곤하트 플레이트.
내가 마지막으로 테스트했던 게임 <블러디 크라운>에서 후반부 보스인 백룡이 드롭하는 아이템이었다.
용의 심장에서 추출한 드래곤하트로 빚어진 방어구.
이거라면 통과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수 위그드라실이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접근을 허락합니다.]
성공이다. 자연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안타깝게도 우리 셋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에게는 입장이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 오토마타인 레나스조차 입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곳에서 관객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친구들을 부탁해.”
당장이라도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캉이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보였다.
토니아가 캉이의 귀에 매달려 위로의 말을 속삭이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로도 이 어린 구미호를 달랠 수 없을 것이다.
“울적해 있지 마. 내가 캉이의 엄마를 찾아내서 무슨 수를 써서든 너희를 서로 만나게 해줄 테니까.”
“하지만 이 나무가 싫어한다면서?”
“말이 안 통하면 내부에서 이 나무를 전부 갉아 먹어서라도 방법을 찾아낼게. 나만 믿어.”
“정말?”
“그럼. 널 만나기 전에 나는 1층에서 탑 하나를 일주일 동안 갉아먹은 적도 있어. 끈질김 하나는 이 감옥 전체에서 형만 한 죄수도 없을걸.”
“응, 믿을게.”
단순히 끈질김만 믿고 이런 약속을 내건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수행하고 있는 돌발퀘스트의 이름은 ‘천년여우의 발자국’.
이 퀘스트의 설명란에는 호이란과 캉이의 재회를 도와주라는 내용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난이도가 어떨지야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교도관장이 달성 불가능한 과제를 내준 적은 없었다.
호이란을 만나기만 한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금방 다녀올게.”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멍이 우릴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왼쪽엔 이멜타스, 오른쪽엔 아스티나가 섰다.
등 뒤에서 제르비어스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오래 끌지 마라, 용사야. 나는 보모 역할이 끔찍하게 싫으니까.”
마왕의 양옆엔 열한 살로 보이는 구미호 소년과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오토마타 소녀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토니아가 제르비어스를 째려보았다.
“보모라는 표현은 삼가 주겠어? 이 둘은 몰라도 나는 페어리 퀸이야. 푸르가토리움에서 무려 이백 년이 넘게 갇혀 있었단다. 어린애 취급은 불쾌해.”
“감옥에선 나이를 먹지 않는다, 토니아. 당연히 바깥세상에서 구른 시간으로 계산해야지. 너 고작 다섯 살 때 여기 붙잡혀 왔다고 하지 않았냐. 따지고 보면 네가 이중에서 제일 꼬맹이야.”
“……내, 내가 있던 행성의 공전주기는 무척 길었다고.”
“여왕답지 않은 궁색한 변명이다.”
폭렬마왕과 페어리 퀸의 신선한 조합을 계속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우리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멜타스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뛰어내린다. 내가 앞장설게.”
“저 둘은 저렇게 놔둬도 괜찮은 건가?”
괜찮을 거다. 토니아의 의중은 몰라도 제르비어스는 이유 없이 동료에게 시비를 거는 녀석이 아니다.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마왕 나름의 의식 같은 거다.
“간다.”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태양빛을 응집시켜 서치라이트를 만들었다.
우리 셋은 그 길을 따라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의 조언이 들려왔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했던가, 등반죄수여. 하지만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돌다리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세 방문자를 받아들이고 있었을 때,
용왕 게브라둠의 드래곤 레어에서는 가혹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자비로우신 용왕이시여.”
“결국 네 말을 들었다가 이리 되었다, 메르킨. 그 등반죄수가 내 손을 완전히 떠나버리지 않았느냐.”
메르킨의 발바닥은 바닥으로부터 50센티 정도 떠올라 있었다. 비행마법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짜증이 극에 달한 용왕의 발톱 두 개가 그의 복부를 관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메르킨은 폴리모프 상태로 죽는 불명예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너는 내게 모욕을 줬다. 용이 자신의 둥지에 들어온 먹잇감을 제 발로 달아나게 놔두었지 않느냐. 이를 어떻게 책임질 테냐.”
“그 등반죄수의 동료들이 마인드 스포일러의 세뇌를 깨트리는 일은 제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용서란 단어를 나는 무척 좋아하지. 왜인 줄 아느냐?”
울컥.
메르킨의 입가에서 푸른색의 용혈이 흘러나왔다. 용왕의 발톱에서 마력이 발산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게 척살당한 자들의 유언 목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라서 그렇단다.”
용왕의 등 뒤에선 뇌룡 간다르바와 폭룡 발카드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분노한 그들의 군주 앞에선 숨소리도 조심해야 했으니까.
메르킨은 이제부터 한 음절 한 음절을 신중하게 읊어야 한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피를 내뱉을 생각도 못한 채 빠르게 변명을 했다.
“등반죄수의 육신은 놓쳤으나 저는 그자의 정신세계를 오랫동안 누비면서 적지 않은 정보를 캐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정보는 공허한 것이다. 내 눈앞에 물질로 구현되지 않는 정보는 비늘 하나만큼의 가치도 되지 못해.”
“용왕님께서 솔깃해하실 몹시 중요한 정보를…… 셋 알아냈습니다.”
“셋이라. 일초라도 죽음을 미뤄보려는 허튼 수작이냐.”
용왕의 발톱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여전히 메르킨에게 강렬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울부짖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르킨 또한 용의 품격은 잃어버리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첫 번째로 그 등반죄수가 가진 기원검의 칼자루에는 다른 파편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그자는 5층에서 한 차례 기원검의 칼자루로 파편을 찾아내 흡수했습니다. 크로톤이라는 층장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지요.”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이 천공섬에도 기원검의 파편이 존재한다면 동일한 과정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물고기 한 마리가 그물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분노한 낚시꾼을 달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두 마리의 물고기를 안겨주면 된다.
“천공섬에 떠 있는 모든 부유도는 지금 내 손아귀에 있다. 그런 대단한 보물이 숨어 있었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지.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세계수 위그드라실뿐인데 용은 그곳에 접근할 수 없다. 네 놈도 잘 알 텐데.”
“그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겁니다. 그 등반죄수의 목적은 용왕님을 피해서 세계수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왕님이 가진 층장의 열쇠를 노리고 있지요.”
“그것 역시 불가능할 텐데?”
“그걸 가능하게 해줄 강력한 세력이 그자의 배후에 있습니다. 저는 마인드 스포일러를 통해 그 세력의 통솔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냈지요. 이것이 두 번째 정보입니다.”
용왕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메르킨의 복부에 박힌 용체화한 발톱 하나를 천천히 빼내었다.
일단 설명을 들어보겠다는 뜻.
한결 호흡이 편해진 메르킨이 조심스럽게 턱 밑에 고인 용혈을 닦아냈다. 그러는 동안 용왕은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골제 바르한, 그가 용왕님의 목을 노리고 있습니다. 군단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요.”
“이미 내게 한 번 패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 추악한 뼈다귀 말이냐? 녀석의 등반은 나로 인해 실패했다. 바르한은 그의 형량이 끝날 때까지 6층을 벗어날 수 없어.”
“그 등반죄수의 기억에 따르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푸르가토리움이 허용하는 정식 등반이 아니라 샛길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샛길?”
“세계수의 뿌리를 파고들어서 그가 육성한 해골 군단과 함께 천공섬까지 오르려는 것입니다. 그 등반죄수의 역할은 두 층을 연결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고요.”
한 번 물리쳤으나 바르한은 결코 손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단과 함께라면 허투루 넘길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불사자의 술법을 달고 온 것인가. 하긴, 바르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녀석은 분명 도발적인 언사로 언급을 피했지.”
“저의 세뇌에서 자유로워졌으니 그 등반죄수는 아마도 바르한을 천공섬에 풀어놓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용왕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셔야 합니다.”
“골제가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통해 올라온다는 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쪽에서 먼저 습격할 방법이 없다. 용과 세계수는 서로를 튕겨낸다. 알지 않느냐.”
“그러니 병사를 통해야지요.”
용린병을 말하는 건가.
백옥 같은 용왕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용린병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아. 그 등반죄수 곁에는 환룡 이멜타스와 어린 구미호도 있다. 타격을 주려면 용린병 몇 기로는 가당치 않아.”
메르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생존을 위한 승부수를 띄울 차례인 것이다.
“세 번째 정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용린병이 아닌 용아병(龍牙兵)을 만드십시오. 그렇다면 골제와 그 군단이 이 7층에 도착하기 전에 상대를 전멸시킬 수 있습니다.”
“용아병은 분명 강력한 말이 되어주겠지. 하지만 그것은 용의 사체가 있어야만 만들어낼 수 있다. 어디서 용의 사체를 구한단 말이냐.”
“……용왕님이 부르면 달려올 용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하나씩 불러 죽이십시오.”
파지지직!
용왕의 오른쪽 등 뒤에서 황금색 벼락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뇌룡 간다르바가 증오심 가득한 얼굴로 메르킨을 노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닥쳐라, 광룡! 저자의 간사한 말을 듣지 마십시오. 용왕님을 현혹시키려는 것. 뱀의 혀를 가진 자입니다.”
용왕이 천공섬에서 군림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결코 동족을 제 손으로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치의 반대항은 충성이며, 그 충성의 근간은 보호에서 나온다.
동족상잔이야말로 용왕 게브라둠이 절대 용납하지 않는 패륜이었다.
바로 그 금기를 어긴 죄로 그녀에게 날개를 뜯긴 메르킨이야말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뱀의 혀라.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통치와 충성은 평화로운 때에만 통용되는 화폐다.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면 금세 바스러지기도 한다.
“용과 뱀은 어차피 같은 파충류다. 상위종으로서 때로는 용이 뱀의 간언을 들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일자로 찢어진 게브라둠의 동공이 사악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