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용이되 용이 아닌 것 (5)
‘거래를 하러 왔다, 교도관.’
‘그대와는 벌써 두 차례나 나와 협상을 했지. 그것만으로도 다른 죄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혜를 준 것이라고 생각지 않나.’
‘이제 와서 생색낼 참이냐.’
‘아니. 빈 손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은 무례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그대의 등 뒤엔 단 하나의 꼬리도 남아있지 않거늘. 무엇으로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건가.’
‘오해를 하고 있군. 내가 거래하고 싶은 건 당신이 아니야. 당신이 깔고 앉아서 틀어막고 있는 세계수. 이 나무에게 용건이 있다.’
‘……그대가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는 있나. 세계수에 흡수당하면 그 어떤 마법이나 술법으로도 다시 빠져나올 수 없다. 확정된 죽음이 그대를 덮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확정된 죽음의 순간이 영원에 가깝게 유예되겠지.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내 아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내 입으로 직접.’
‘그것을 위해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그래. 내 꼬리가 아홉 개가 아니라 아흔 개였더라도.’
*
“그것이 호이란과 내가 나눈 마지막 대화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세계수의 수심(樹心)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아아…… 안 돼.”
그것은 이멜타스가 절망의 늪에 빠지는 소리였다.
용들의 층에서 홀로 견뎌온 이무기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끈을 잃어버린 것이다.
좀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는 듯 보였던 그가 비통함을 전혀 숨기지 못한 채 좌절하고 있었다.
“당신, 괜찮아?”
“끝났다. 모든 게 끝나버렸어. 사실 마음속 한구석에서부터는 이런 결말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천공섬의 그 어느 곳에서도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스스로의 의지로 세계수의 그림자가 된다.
그럼으로서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잠깐만, 이멜타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보자고. 호이란이 ‘그림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거잖아.”
내가 지금껏 보고 들어온 호이란의 모습은 아무 생각 없이 자포자기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치밀하게 안배하는 구미호였다.
“뭔가 비장의 한 수가 있었던 거 아닐까? 호이란은 자신의 아들을 이곳까지 데려올 등반죄수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그녀가 바랐던 대로 지금 우리가 세계수를 딛고 서 있잖아.”
내 장황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멜타스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다.
“슈바인 스트링거, 너는 세계수에 흡수된 환수들의 그림자와 여러 번 마주했다고 했지?”
“그래. 한 번은 내 손으로 직접 현무라는 환수의 그림자를 죽인 적도 있어. 여기 있는 아스티나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지적당했으나 아스티나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들어 보였다.
“맞아. 이 검은 청룡이라는 환수의 비늘로 만들어졌어. 그때는 그게 본체가 아닌 그림자라는 걸 몰랐지만.”
“그 환수들에게도 지성이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들과 싸웠을 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나.”
이무기의 말이 표창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화룡도의 마그마 엘리게이터.
삼월초원의 현무.
그리고 만골사막에서 해골 군단과 싸웠던 백호와 주작까지.
“그러고 보니 그 어느 한 마리도 적에게 말을 건넸던 존재는 없었어.”
“세계수의 그림자가 된다는 건 그런 거다. 위그드라실이 활이라면 그림자는 화살에 불과해. 화살의 용도는 오직 과녁까지 날아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과녁과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는 거지.”
“호이란의 그림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거냐?”
“그래. 앞을 막아선 생물을 향한 살의에 미쳐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공격하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너는 캉이에게 자식을 죽이려 드는 어미를 만나게 해줄 생각이냐?”
그럴 수야 없다.
캉이도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나와 함께 무려 네 개의 층을 올라왔다.
탈옥을 원하는 제르비어스나 복수를 꿈꾸는 아스티나처럼 거창한 이유는 없다. 단지 내가 녀석의 꿈을 이뤄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형아, 왜 그래?”
그런 캉이를 살상병기가 된 엄마 앞에 데려놓을 바엔 차라리…….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교도관이 말했다.
“너희는 지금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군. 나는 분명 호이란이 세계수와 ‘거래’를 했다고 전했다. 그 거래에 사용된 물건이 무엇인지 안다면 낙담하긴 이르다는 걸 알 테지만.”
“무슨 물건이길래?”
“바로 등반죄수인 그대의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되어 있는 그것. 수왕 르팔타커스 시온이 휘둘렀던 검의 일부를 말하는 거다.”
“기원검의 파편!”
그렇구나.
르팔타커스가 남긴 파편이 환수들의 층인 이 천공섬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미처 생각을 못했어. 용왕 게브라둠이 그렇게 악착같이 기원검을 원하길래…… 자연히 7층에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용왕은 기원검을 탐낼 때 실물을 영접한 적이 없는 보물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었다.
소문으로만 들은 명검.
어쩌면 용왕은 정작 본인의 층에 기원검의 파편이 존재하고 있었단 사실을 몰랐을지도.
“현재 천공섬에는 한 조각의 파편이 분명히 존재한다. 위그드라실의 수심 깊숙한 곳에 있지. 운해에 흡수된 죄수들 중에서 누가 기원검의 파편을 품고 있었는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야.”
아주 소중한 정보였다.
이쯤 되니 이토록 친절하게 나오는 교도관에게 살짝 경계심이 들 정도였다.
여지껏 이 정도로 내비게이션처럼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존재는 없었으니까. 마도서 단탈리온을 제외한다면.
게다가 단탈리온 또한 아카식 레코드에 편입되고 싶은 숙원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니 완전한 선의라고 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우릴 도와주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교도관.”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분명히 그대가 호이란을 찾아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이 바뀐 이유는 뭐지? 내 등반을 막아섰던 교도관의 호의에 의심을 품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잖아.”
“내겐 교도관으로서 층의 균형을 수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화신체를 오랫동안 현신하느라 힘은 고갈되어가는 와중에 징조들은 범람하고 있지.”
“징조?”
“위그드라실의 팽창.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게브라둠의 야망. 호이란이 염원했던 아들의 등반. 무엇보다 두 번째 수왕 후보라 불리는 그대의 존재. 이 모든 갈등의 씨앗은 무관하지 않아. 서로를 끌어들이며 대폭발을 예고하고 있다.”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의 화신체에게서 짐작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쌓인 피로감이 느껴졌다.
“천공섬을 뒤덮으려 하는 거대한 암운. 한 층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정도의 폭우가 될 것이다. 그 구름을 키운 데는 내 실수 또한 일조하고 있다. 나는 세계수로부터 용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서로 분리시켰다. 그 조치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애써 외면한 채.”
그 결과 용은 살아남았으나,
용을 제외한 환수종은 씨가 마르는 불균형을 가져왔다.
그 불균형은 곧 위그드라실의 그림자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세계수는 6층 만골사막에까지 뿌리를 내려 골제 바르한으로 하여금 군단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전쟁의 조짐이 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내 힘으론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또한.”
교도관 또한 한때는 죄수였다.
이 고룡 또한 교도관이 되기 전에는 용이었던 사실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동족을 향한 편애가 교도관으로서의 혜안을 어둡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폭우가 한바탕 휘몰아치고 나면 그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가 시작되겠지. 나는 교도관으로서 내 실패를 인정하고 후일을 위한 대비를 할 생각이다. 그대의 여정을 돕는 것 또한 그 대비의 일부다. 호이란은 용을 제외하면 천공섬의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죄수. 그대가 그녀를 찾게 되면 이 국면을 전환시킬 전환점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교도관의 말에서 어떤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날 도와줄 생각이 아니었다면 게브라둠의 추격을 경고해줄 필요 또한 없었을 것이다.
“고맙군. 호이란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깔고 앉아 있는 장소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수관이다. 여기는 나무의 수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 할 수 있지. 수심의 바닥에 다다르면 호이란의 그림자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뱉은 말과 달리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은 곧바로 그 똬리를 풀지 않았다.
내게 한 가지 확언받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뭐지?”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마지막으로 확인받고 싶은 것이 있다. 그대는 호이란과 그 아들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 결코 망설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등 뒤에서 뜨거운 캉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당연하지.”
“그대가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그리고 아래층에서 누구와 협약을 맺고 이곳에 올라왔는지도 나는 짐작하고 있다.”
내가 노리는 상대는 7층장 게브라둠.
그를 위해 협력 중인 상대는 6층장 바르한.
“이이제이. 두 명의 층장을 충돌시키겠다는 그대의 계획엔 불안요소가 많다. 최악의 경우엔 둘 모두를 쓰러트려야 하는 상황도 올 수 있겠지. 그런 때가 오더라도 그대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겠는가.”
골제 바르한과 해골 군단의 조직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공격을 무력화하는 골제의 흑마법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용왕 게브라둠의 괴물 같은 힘과 다른 용들을 장악하는 존재감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용왕을 죽이고 층장의 열쇠를 얻어내려면 그의 수하 전체와 맞서는 일에 다름 없다.
그런데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 역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불사자의 축복 덕분에 어지간해선 죽지도 않는 육체가 되었고.
무엇보다 영혼폭발 이후 강제로 떨어져야 했던 동료들을 모두 되찾았다. 이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나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물론이다. 네가 말하는 그 폭우가 어느 정도일지는 이미 계산에 넣었어. 어떤 천둥벼락이 내리꽂히더라도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우리가 될 거야.”
“좋은 대답이군. 무운을 빌지.”
날개에 감싸여 있던 교도관의 네 다리가 바닥을 떨치고 일어섰다. 그러자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아찔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가 수관의 끄트머리까지 물러서자 감춰져 있던 원형의 구멍이 드러났다. 둘레가 어찌나 큰지 쇼핑몰 서너 개는 너끈히 들어갈 것 같다.
새카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초거대 맨홀을 연상시킨다.
“잠깐만…… 이 빛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혼잣말에 가까운 질문이었으나 대답이 돌아왔다.
제르비어스가 내 말에 동조해준 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용사 네놈의 짐작이 맞을 것 같다.”
아스티나나 캉이에겐 없는 것. 하지만 마왕 제르비어스와 나에겐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수갑이었다. 푸르가토리움의 죄수라는 분명한 표식.
“푸르가토리움이야. 이 거대한 구멍은…… 설마 위그드라실에겐 수갑인 건가?”
수갑의 의미는 감시와 통제다.
그렇기에 손목과 발목에 채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 아니라 식물의 형태를 한 위그드라실에겐 조금 다른 형태의 수갑이 필요하다고 감옥은 판단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 안으로 들어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거지?”
사르락.
캉이의 아홉 꼬리가 눈앞에 넘실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 녀석의 눈빛에 분명한 집념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래. 단단히 마음 먹어. 함께 들어가는 거야.”
“아니다. 너희 모두가 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아득히 먼 곳으로 물러섰음에도 교도관의 목소리를 여전히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왜지?”
“너희는 그 입으로 무언가를 삼키기 전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테지. 그래서 위그드라실도 비슷한 조치를 이 입구에 걸어두었다. 여기엔 내 권능 또한 작용하고 있다. 세계수로부터 용을 떨어트리기 위해 내렸던 선택이지. 자격 있는 자만이 이 입구를 통과할 수 있다.”
“그 자격이 뭔데?”
천벌처럼 엄숙한 선고가 머리 위를 때렸다.
“용이되 용이 아닌 것.”
“그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야?”
용이지만 용이 아닌 존재라니.
일전에 아스티나가 말한 적이 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마법 주문은 ‘모순’이라고.
이 모순의 조건을 충족하는 자만이 호이란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때 이멜타스가 찬 수갑이 붉게 빛나며 입구와 공명했다.
[죄수 위그드라실이 죄수 이멜타스의 접근을 허락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원리인지 알겠군. 나는 이무기니까. 용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종족이 다르지. 그러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
이멜타스뿐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슈바인, 그대는 어떻지? 이 모순에 합당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나?”
해골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식은땀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어떡하지?
나 용띠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