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용이되 용이 아닌 것 (3)
“용을 미치게 하는 건 그것을 죽이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지.”
생물의 정신은 육체라는 그릇에 담긴다.
그리고 각 종의 정신력은 그 그릇의 단단함에 비견한다.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지 않으면 굳건한 의지를 품는다는 건 어불성설.
거꾸로 말하면 긴 세월 전성기를 유지하며 단단한 비늘과 천혜의 근육을 갖춘 용의 정신력은 모든 종을 통틀어 우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메르킨은 그런 용을 미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죄수였다. 육탄전으로는 약하기 그지없는 용이었으나 푸르가토리움에 입소해서 빠른 속도로 자신의 세를 불렸지.”
용을 세뇌시켜 수하로 만든다.
용왕 게브라둠은 결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믿지 않았으나 벌어지는 현실은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광룡 메르킨은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려 일곱 개의 부유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층장의 지배력에 금이 갈 것이라 생각했던 용왕은 직접 메르킨을 척살하기 위해 나섰다.”
“그 전투에서 광룡의 날개가 강제로 잘려나간 건가?”
“광룡에게 세뇌된 여섯 마리의 용이 용왕에게 덤볐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어. 그중에는 용왕이 특히 아꼈던 화룡 이그니스도 있었지. 이그니스는 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폭주하다가 비참하게 물어뜯겨 죽었다.”
아끼는 수하를 잃었다.
당연히 용왕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차올라 광룡 메르킨을 죽이려 들었으나 마지막에 생각을 바꾸었다.
7층 천공섬을 지배하는 용왕의 유일한 골칫거리인 구미호.
광룡을 이용한다면 그녀의 마지막 꼬리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나는 용왕을 독대했을 때 그녀가 내게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용의 본질은 질투다.’
수하를 잃었다는 분노보다 끝내 갖지 못했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탐욕의 끝을 알 수 없는 용이라 할 수 있었다.
“용왕은 그날 메르킨을 살려주는 대신 호이란을 세뇌해 마지막 꼬리를 빼앗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갑자기 거세어진 그의 추격에 나날이 피폐해져 가셨지.”
배후를 알게 된 호이란은 직감했다.
용왕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순간 마지막 꼬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약속된 죽음.
3층에 내려보낸 아들과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진퇴양난.
“어머니가 용왕의 포위망을 피해 마련해 둔 부유도는 스무 개에 달했다. 하지만 그 둥지들은 살심을 품은 용왕의 습격에 하나둘 소멸되어 갔지.”
더 이상 달아날 부유도가 없어진 상황에서 호이란은 마지막까지 자신 곁을 지킨 이멜타스에게 작별의 말을 고했다.
“달아나거라. 더는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없을 것 같구나.”
“안 됩니다. 죽더라도 어머니를 지키며 싸우다 죽겠습니다.”
“우스운 소리 말거라. 내가 있던 세계에서 최고의 불효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니라.”
그것이 호이란의 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멜타스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순간이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는 이멜타스를 놔둔 채 호이란은 사라졌다.
용왕 게브라둠의 추격 소식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용왕에게 덤볐다가 결국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끈질긴 용이 어머니를 쫓는 걸 포기할 이유가 없으니까.”
며칠을 괴로워하던 이멜타스는 끝내 어머니의 충고를 저버리기로 결심했다.
“내 미약한 힘으로는 결코 용왕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럴 심산도 아니었어. 다만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서 그녀의 비늘 하나만이라도 뜯어놓고 죽겠다는 각오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이멜타스는 게브라둠의 드래곤 레어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가로막혔다.
복수의 대상에는 닿지도 못한 채 뇌룡과 폭룡의 브레스에 온몸이 갈가리 찢긴 채 운해로 내던져졌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수준의 치명상.
“그날 나는 알게 되었지. 이 천공섬의 운해는 평범한 구름이 아니라는 걸. 그것은 오히려 진짜 바다에 가까웠다. 세계수의 잔해로 이뤄진 액체였다.”
아하. 그렇기에 목이 날아간 레나스를 건져낼 수 있었구나.
“나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세계수의 줄기를 향해 빨려 들어갈 판국이었지.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가 나타나서 나를 건져주셨다.”
이멜타스는 중요한 사실을 오해하고 있었다.
호이란은 용왕 게브라둠과 담판을 지으러 간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 용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거래했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을 찾아갔던 것이다.
용왕이 추격을 그만둔 것은 교도관이 있는 세계수에 접근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죽어가는 이멜타스를 내려다보며 구미호는 왈칵 성을 냈다.
“끝까지 멍청하구나, 도마뱀 녀석아.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다고 거길 쳐들어갔느냐.”
“……어머니. 어머니가 없는 이 감옥에 제가 살아남아서 뭘 하겠단 말입니까.”
“칠칠치 못한 놈. 살아갈 이유가 없다면 그게 생겨날 때까지 버티는 것도 답일진대.”
그렇게 말한 호이란은 다음 순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자신의 마지막 꼬리를 떼어 죽음이 임박한 이멜타스의 육신을 되살려낸 것이다.
“어머니? 어쩌려고 저에게 꼬리를 주시는 겁니까!”
“오해하지 말거라. 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니. 나는 교도관에게 아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 했고 그는 내게 해답을 알려주었다.”
“해답이오?”
“그래. 이것이 그 해답이다. 이 꼬리로 너는 내가 품었던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내 아들이 이 천공섬에 다다르면 부디 이 힘을 사용해서 그 아이를 지켜다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호이란은 이멜타스를 떠났다.
이번엔 진짜 작별이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7층 천공섬에 교도관의 음성이 널리 울려 퍼졌다.
[7층의 교도관이 죄수 호이란의 공식적인 사망을 선포합니다.]
[다시 알립니다. 죄수 호이란은 이 시간부로 사망하였으니 층장을 비롯한 죄수들은 소요를 일으키지 않기를 권합니다.]
교도관이 직접 호이란의 죽음을 알렸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았어. 어머니가 내게 보여준 것은 결코 죽으러 들어가겠다는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교도관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이라 짐작했을 뿐. 내가 할 일은 어머니의 아들이 천공섬에 도착했을 때 용왕의 손길에서부터 지켜내는 것이라고, 그날이 오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이멜타스가 지금까지 사망한 척 지내오며 천공섬에서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
이멜타스의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고 캉이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엄마는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만나고 싶어했구나.”
그러고 나서 어린 구미호의 표정에 깃든 것은 분명한 증오였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줄곧 괴롭혀온 용왕 게브라둠.
7층의 지배자를 향한 명백한 분노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형아를 구해냈을 때 용왕을 더 아프게 만들어주는 건데.”
이멜타스가 캉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진실을 털어놓아서인지 용, 아니 이무기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는 의동생이라 할 수 있는 캉이를 위로했다.
“지금은 그 마음을 넣어두어라. 복수는 차갑게 얼려 먹는 것이다. 아직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은 후회만 남길 뿐이야. 형의 말을 믿거라.”
나는 이멜타스의 말에서 짙은 후회와 자책을 읽었다.
긴 시간 곱씹어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무모하게 용왕에게 덤벼들어서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호이란의 수명이 조금은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사자가 원치도 않는 복수심에 휘둘려 정작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단축시켜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자책의 사슬 또한 당사자를 만나야만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이멜타스. 그렇다면 이제 캉이의 엄마를 찾아 나설 차례잖아? 네 말대로라면 호이란이 이 층 어딘가에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 행방을 알고 있는 장본인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직접 호이란의 죽음을 공표한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
이멜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오랫동안 수차례 교도관과의 만남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자격이 되지 않는다며 거절당해왔지. 자신이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대상은 명백히 정해져 있다면서.”
지금까지 여러 교도관을 만나왔으나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은 조금 달랐다.
그는 분명 세계수까지 도주해왔을 때 내게 용왕의 접근 사실을 알리며 경고했었다.
어쩌면 내게 호의적일 수도 있다.
걸리는 사실은 그가 5층 교도관인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의 탄핵 투표에서 내게 반대표를 던졌었다는 점이다.
그런 사실을 미뤄봐서는 또 내 편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 상대 쪽에서 먼저 초대장이 왔다.
[7층 교도관이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에게 고합니다. 자신은 세계수의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동료들과 함께 만나러 오라며 재촉합니다.]
나를 비롯한 모두의 고개가 까마득히 솟아 있는 세계수 위쪽을 향했다.
그중에서도 이멜타스의 얼굴에는 분명한 화색이 돌았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 아무래도 너에겐 자격이 있는 모양이다, 슈바인 스트링거.”
“어쩌면 캉이가 이 층에 올라왔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교도관의 화신체를 만나러 가보자.”
주변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던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가지가 스르륵 움직였다.
그러자 마치 엘리베이터가 오가는 통로처럼 위로 향하는 널찍한 길이 만들어졌다.
“날아오라는 뜻이군.”
캉이가 비행술을 익히게 된 후로 이제 등반대에서 날지 못하는 유일한 멤버가 된 제르비어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이거 곤란한데.”
“제게 의지하십시오, 제르비어스 관객님.”
레나스가 형태를 변환시켜 마왕의 등에 날개형 부스터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세계수의 꼭대기에 거하는 엄청난 크기의 용을 만나게 되었다.
*
“어서 오라, 슈바인 스트링거.”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은 거대한 맹그로브처럼 넓게 퍼진 세계수의 꼭대기에 누워 있었다.
둥그렇게 몸을 말아 누워 있다고는 해도 머리와 꼬리 사이엔 한참을 달려도 닿지 못할 만큼 까마득한 거리가 있었다.
“우리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당신을 만나러 온 목적도 알고 있는 듯하고.”
“그렇다. 그렇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들리니 목청껏 외칠 필요 없다.”
교도관의 음성은 입이 아닌 마법으로 전달되는 것인지 모든 방향에서 은은하게 전달돼 오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큼지막한 머리를 향해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본래 교도관은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좀처럼 화신체를 강림시키지 않잖아.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러고 있는 거지?”
“그대의 말이 옳다. 교도관이 화신체를 강림시키려면 권능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관찰자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지. 내게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이 대답에서 지금의 상황이 강제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왜지?”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사냥으로부터 죄수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세계수가 왜 사냥을 해? 이건 그냥 식물이잖아?”
“위그드라실은 나무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정확히는 식물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의 정체는…….”
그다음 이어진 교도관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무수한 살생을 저지르고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온 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