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용이되 용이 아닌 것 (2)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두 개 있다.
과연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까.
첫 번째로 호이란과의 약속.
캉이와 호이란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 심지어 이것은 3층 대수림에서 캉이의 무의식에 남긴 그녀의 분신과 약속한 것이기도 하다.
‘제 아들을 7층까지 데려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러마, 하고 약속했다.
물론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편지 전달과 마찬가지였다. 호이란은 내가 그 약속에 고개를 끄덕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래도 호이란과 내가 연결돼 있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교도관장을 통해 맡겨놓은 목숨 하나를 내가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빙설협곡의 영혼폭발에서 소멸되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었다.
‘호이란은 아들을 지켜줄 자를 위해 자신의 꼬리 하나를 내어준 거야.’
때문에 이 모자를 재회시키는 것은 내게 있어 층장의 열쇠를 수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이 천공섬을 지배하는 용왕 게브라둠의 존재였다.
그녀는 내 기원검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 용의 본질이 질투이며 갖고 싶은 것을 놓치지 않는 탐욕이라 선포했으니까.
용왕의 힘은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게다가 뇌룡 간다르바와 폭룡 발카드를 수하처럼 부리고 있다.
세 용과 모두 충돌해본 경험으로 미루어봐서 녀석들이 합심해서 몰아세운다면 우리 일행은 전멸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두 번째 약속이 중요해진다.
‘그렇기에 골제 바르한을 용왕과 충돌시켜야 해.’
바르한은 용왕에게 패퇴한 이후로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 불사의 해골 군단을 양성하고 세계수의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환수들의 그림자를 사냥하면서 힘을 키워왔다.
둘이 충돌한다면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으나 열쇠를 노리는 내게 있어선 일석이조의 상황이 된다.
어쩌면 골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수의 뿌리 앞에 군단을 모두 결집시킨 채 내가 막힌 통로를 뚫어낼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역시 골제와의 약속을 먼저 이행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용왕을 견제할 무기를 내버려둔 채 캉이의 엄마 찾기를 수행했다가 타이밍을 놓치게 될까 두려웠다.
반면 호이란의 생사에 대해서도, 위치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홉 개의 목숨을 갖고 있었던 호이란은 교도관과의 거래로 여러 개를 사용했다. 용들과의 충돌에서도 몇 개를 소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개 남은 여벌의 목숨을 이멜타스에게 전달했다.
살아 있다고 해도 풍전등화의 상황이면 어쩌지.
골제와의 약속을 이행하는 바람에 캉이가 엄마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버리는 건 아닐까.
‘확실히 선택하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해.’
이렇게 문자 그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15. ‘천년여우의 발자국’]
[용사는 이제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려고 합니다. 친구인 캉이의 어머니인 호이란의 행방을 찾는 것이지요.
구미호 호이란은 교도관들과 직접 목숨을 거래할 만큼 강력한 죄수이며 용사의 모험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여인이지요.
호이란과 캉이의 재회를 도와주세요.]
[기한: 없음]
[보상: 민첩 +200]
[실패 시 페널티: 연계 퀘스트 ‘스켈레토마키아’ 발생 불가]
오호라.
교도관장이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돌발퀘스트를 통해 호이란을 찾아 나서는 것을 먼저 수행해야 한다고 힌트를 준 것이다.
무엇보다 ‘실패 시 페널티’를 눈여겨봐야 했다.
스켈레토마키아.
그것은 골제 바르한이 나를 7층으로 올려보내던 날 제단에서 연설하던 내용에 있었던 단어.
그는 6층 만골사막과 7층 천공섬의 전쟁을 그렇게 칭했다.
그 전쟁이 연계 퀘스트라는 것은 호이란을 찾아내는 일이 두 층의 명운을 결정짓는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해주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정한 뒤 이멜타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호이란에 대해서 알고 싶어. 어째서 구미호를 어머니라고 부르는지, 왜 그녀의 꼬리를 넘겨받을 수 있었는지.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줬으면 좋겠어.”
“처음 만났을 때는 그분을 어머니로 삼을 계획이 아니었다.”
이멜타스가 어렵게 꺼낸 말은 우리 모두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아내가 되어달라고 했었거든.”
“에에엑? 뭐라고오오?”
우리의 경악에는 상관없이 이멜타스는 호이란을 처음 만나게 된 순간을 되짚어나갔다.
“우선 내 종족에 대해서 고백하는 게 먼저겠지.”
이멜타스의 정체는 놀랍게도 용이 아니었다.
픽투스 드라코니스(Fictus Draconis).
내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꿔보자면 용이 되지 못한 종족 이무기였다.
“비늘과 날개가 있으나 용의 특권인 브레스를 내뿜을 수도, 다른 종족의 형태로 폴리모프할 수도 없는 미완성의 도마뱀. 그것이 이무기인 나였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그것이 전부 가능하잖아? 그렇다면 이 감옥에 들어와서 용이 된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내 입에서 내뿜는 것은 드래곤 브레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우트림이며 폴리모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미호의 분신술을 변형시킨 거지. 모두 어머니께 꼬리를 넘겨받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이멜타스는 물론 강력한 용, 아니 이무기였으나 뇌룡과 맞붙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지금의 그에게서 브레스와 분신술이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뇌룡을 상대로 몇 분도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았다.
“바깥세상에서 나는 용으로의 승급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부정한 방법으로 업을 쌓으려 했고 그 때문에 살생의 죄를 많이 지었지. 이무기가 선행을 쌓아 승천하면 용이 되지만 악행을 거듭하면 마룡이 된다.”
마룡이 되어서라도 이무기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
그것이 이멜타스가 저지른 죄였다.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왔을 때 이멜타스는 단 한 명의 인간을 죽이기만 하면 용이 될 수 있는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환빔을 맞고 죄수가 되었으니 허망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정된 층은 용들이 지배하는 7층 천공섬.
교도관장의 악취미가 또 한 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본래 세계에서 일대를 지배하는 최강의 생물이었으나 이 감옥에 붙잡혀 오자마자 층의 최약체가 되고 말았다. 픽투스 드라코니스라는 것은 용왕이 내게 붙여준 멸칭이다. 가짜 용이라는 뜻이지.”
푸르가토리움은 기본적으로 강자존의 살벌한 세계.
이멜타스는 용들의 지속적인 핍박과 괴롭힘에 못 이겨 매일 고통스러워했다.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일진 여러 명에게 구타당하는 희생자.
그것이 이멜타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족쇄였다.
“그러던 와중에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
그날 역시 평범한 하루에 불과했다.
용왕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용들 중에는 내면에 화가 가득 쌓인 죄수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세계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는 종족이 용인만큼 자신의 머리 위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주는 모양이다.
그런 용들이 샌드백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용 못지않은 신체를 갖고 있는 이멜타스였다.
그런 이멜타스 앞에 순백의 털을 가진 여우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용을 여우트림으로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쳐죽일 도마뱀 새끼들. 저잣거리의 왈패들이나 하는 짓거리를 오늘도 하고 있구나.”
그는 처음으로 무자비하게 용을 때려잡는 여우의 모습을 보고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용들을 쫓아낸 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바닥을 툭툭 터는 호이란에게 이렇게 말하고야 만 것이다.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소.”
돌아온 것은 부유도를 쪼갤 만큼 위력적인 주먹이었다.
이무기의 두개골에 금을 낼 만큼 묵직한 일격이었다.
“불쌍해서 도와줬더니 아녀자를 희롱하는 것이냐.”
“꾸엑! 아, 아니오. 내가 잘못했소. 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나는 오직 한 명의 지아비만을 둔 구미호다. 이 감옥에 붙잡혀 왔다 한들 그것은 절대 바뀌지 않아. 게다가 비록 다른 층에 내려가 있지만 아들도 있지.”
이멜타스는 냉큼 태세전환을 했다.
“그렇다면 남편 말고 아들로 삼아주시오.”
“시끄럽다! 나는 용들의 패악질을 지켜보는 것이 역겨워서 녀석들을 혼쭐낸 것이지, 너를 구해주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다. 착각하지 말거라.”
착각이어도 상관없었다.
이멜타스는 살벌한 천공섬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호이란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아들로 받아줄 때까지 조르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었다.
온갖 환수들이 모여드는 천공섬에서도 구미호는 단연 신출귀몰하게 은신할 수 있는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이란 역시 용왕에게 쫓기는 몸이었다.
“어머니. 저야 용과 똑같은 외양을 갖고 있어서 그들의 분노를 샀다지만 용왕은 어찌해서 어머니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겁니까.”
미운 정도 정인 것일까.
호이란은 어느 날부터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멜타스를 쥐어패는 걸 포기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가진 꼬리를 원하는 것이다. 지금은 꼬리 한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만 본래는 아홉 개였지.”
그리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날도 있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나는 7층과 3층 교도관에게 각각 꼬리를 넘겨줘야만 했다. 언젠가 내 아들을 데리고 올라와 줄 등반죄수를 위해서 또 하나를 희생했고. 그래서 천공섬에 남겨졌을 때 내 꼬리는 고작 세 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용왕 게브라둠에게 꼬리 두 개를 빼앗겼다.
이멜타스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 역시 먼 발치에서 용왕이 본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그 용왕에게 고작 두 번밖에 안 진 겁니까. 역시 어머니는 대단하신…….”
“추켜세우지 마라. 내 입장에선 두 번이나 패배한 것이니까. 마지막 한 개의 꼬리가 남았을 때 용왕은 내게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남은 한 개의 꼬리를 내어주느니 동귀어진을 하겠다는 각오로 저항했고 그럴 때는 용왕 자신의 목숨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지.”
이미 두 개의 꼬리를 빼앗았다.
하지만 마지막 꼬리를 빼앗으려다 용왕이 한 번 죽게 되면 기껏 강탈한 꼬리가 한 개가 되어버린다.
자신도 완벽히 제압하지 못하는 구미호를 용왕 밑에 있는 다른 용이 탐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용왕은 꼬리가 하나 남은 구미호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짐승’처럼 가시권 밖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어머니의 아들이 궁금합니다. 제게는 배다른 형님이 되겠군요.”
“……왜 형님이냐. 내 아들은 지금 인간으로 치면 고작 세 살배기에 불과할진대. 너무 징그럽지 않으냐.”
“그럼 동생으로 하지요.”
“네게는 줏대라는 것이 참으로 없구나. 왜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았는지 알겠어.”
“어머니. 아픈 곳을 찌르지 마십시오. 차라리 주먹으로 때리세요.”
너스레를 떠는 이멜타스 앞에서 호이란은 가끔 슬픈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내 아들이 이 7층까지 올라오는 걸 두 눈으로 봐야겠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 마지막 꼬리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어.”
그렇다.
그 이후로도 호이란은 한 개 남은 꼬리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광룡 메르킨.
구미호마저 긴장시킬 만큼 악질적인 용이 푸르가토리움의 죄수로 입소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