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용이되 용이 아닌 것 (1)
용이 구미호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뭔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푸르가토리움 안에서 나는 이보다 훨씬 더 기묘한 관계들도 목격한 바 있다. 천마와 마녀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고, 영혼 없는 오토마타들이 기사단과 마피아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구미호가 용과 친밀한 사이였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럴 수 있지. 이 감옥은 온갖 다양한 세계에서 죄수들을 불러모으니까.”
“비웃지 않는군. 분위기를 읽었다면 내가 이 천공섬에서 지독한 따돌림을 받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내게도 상체와 하체가 다른 종족으로 태어나서 결합하는 켄타우로스 친구가 있거든. 뭣보다 지금 이 꼴을 봐. 스켈레톤 병사 1이잖아? 본래 이 육체의 모습은 금발의 조각 미남인데.”
“그 정도로 강력한 스켈레톤은 존재할 수 없다. 너는 데스나이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웃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이멜타스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내가 멋쩍어지려 하는 와중에 그는 품에서 익숙한 물체를 꺼내었다.
“앗! 레나스!”
그것은 오토마타 레나스의 잘려나간 머리였다.
운해 밑으로 추락해서 어떻게 되찾아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설마 이멜타스가 수거해왔을 줄은 몰랐다.
“지금은 잠들어 있는지 깨워도 응답이 없다. 만나면 너에게 돌려주기 위해 보관하고 있었다.”
“고마워. 레나스의 마정석은 몸통에 박혀 있으니까 다시 깨어날 수 있을 거야.”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있던 레나스의 몸통을 소환했다.
오토마타 소녀의 몸은 쇼핑몰에 세워진 마네킹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레나스의 몸 위에 머리를 얹어주니 절단 부위가 스스로 결합하며 피부 아래로 광채가 돌았다.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수면 모드를 해제합니다.]
천천히 눈을 뜬 레나스를 보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왕의 습격에 목이 잘려나갔을 때는 어쩌면 영영 이 아이를 잃어버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반가워, 레나스.”
“무사하셨습니까, 관객님.”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들었어. 여기 있는 이 용이 너를 도와줬다며.”
“그렇습니다.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를 통해 그림자가 되어 0층 대기실로 내려갔던 경험은 무척 신선했습니다. 그때는 용왕 게브라둠에게서 관객님을 구출할 수 있는 확률이 12%에 불과했는데 지금 제 눈앞에 계신 걸 보니 성공했나 보군요.”
이멜타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눌 상대는 슈바인뿐만이 아닐 거다, 오토마타. 아직 이자와 나눌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 자리를 비켜주겠나. 그리고 슈바인과 내가 나눌 대화가 퍼지지 못하도록 소리를 차단해주었으면 하는데.”
“방음 필드를 구동시켜 달라는 요청이시군요.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다른 관객님들 옆으로 가 있겠습니다.”
레나스가 친구들에게 날아가자 아스티나와 캉이가 귀환한 오토마타를 반겨주는 모습이 보였다.
“소리를 차단하면서까지 내게 할 이야기가 뭐지?”
“방금 전에 말했었지. 내가 어머니인 호이란이 가진 최후의 꼬리를 물려받았다고. 그에 대한 이야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멜타스가 했던 표현의 의미심장함을 캐치할 수 있었다.
“최후의 꼬리라는 건, 그럼 구미호 호이란은…… 어떻게 된 건데.”
강력한 생기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멜타스가 폴리모프한 모습은 오토마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엔 비통해하는 기색이 그의 얼굴에 덧씌워지고 있었다.
“성체가 된 구미호는 꼬리를 사용해 스스로 되살아나거나 다른 존재를 되살릴 수 있다. 아홉 개의 목숨을 갖고 있는 것이지. 거꾸로 얘기하면 아홉 개의 꼬리를 다 잃어버린 구미호는…… 더이상 환수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지.”
최후의 꼬리를 잃어버린 구미호는 평범한 여우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뜻이었다.
나는 마음의 각오를 한 채 물었다.
“호이란은 그럼 죽은 건가?”
캉이의 어머니인 호이란. 그녀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간접 체험을 했었다.
정을 주지 말아야 할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져 폭주하고야 만 망국의 짐승. 임신 상태로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와 대기실에서부터 교도관과 마찰을 빚었던 강력한 구미호.
그래서 거래의 대가로 캉이를 3층 대수림에 내려보내는 데 성공한 우직한 어머니.
호이란은 어떻게 된 걸까.
“그 질문엔 답해줄 수 없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음은 확인된 적이 없으나 생존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아.”
“그렇다면 현재로선 실종 상태라고 봐야 하나?”
“그래. 나는 너와 달리 탈옥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내 형량이 끝나기 전에 어머니의 행방을 찾는 것이 유일한 목적일 뿐.”
이멜타스는 그를 위해서 나와 친구들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용의 눈빛이 멀리 떨어진 채 이쪽을 보고 있는 하얀 꼬리의 소년을 향했다. 레나스가 방음 필드를 쳐놓았으니 구미호의 뛰어난 청각으로도 지금 우리의 대화를 엿듣기란 무리일 것이다.
“당신은 캉이와 호이란의 관계를 아는구나?”
“모를 수 있나. 그 누구보다도 구미호란 종족을 가까이서 지켜봤는걸. 캉이는 본래 있었던 층에선 교도관에게 힘을 빼앗겨 성장을 제한받고 있었으나 지금은 자유로워졌다. 언젠가 성체로 완전히 각성한다면 어머니의 모습과 더욱 닮아가게 되겠지.”
“양자라곤 해도 같은 어머니를 두었으니 너희는 형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캉이도 너를 무척 따르는 것 같던데?”
이멜타스가 구슬픈 동작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내게서 아직 희미하게 어머니의 냄새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에게서 꼬리를 넘겨받기도 했고 직접 가르침을 주시기도 했으니.”
아스티나가 해준 이야기론 이멜타스는 친구들을 상대로 특훈을 펼쳤을 때 유독 캉이에게 세심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분신술을 사용할 때 힘을 분배하는 법.
여우트림을 내쏘기 직전까지 상대에게 각도를 알려주지 않도록 현혹시키는 법.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어째서 용이 구미호의 습성에 그토록 통달해있는지 의아해했는데 이제 의문이 풀린 기분이다.
“슈바인 스트링거. 너희들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네가 결정해야 할 사안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지금껏 내내 캉이에게 말하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
캉이의 어머니가 이 감옥에 붙잡혀 왔으며 7층 천공섬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어머니가 실종 상태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그래. 더이상은 숨길 수 없겠지.”
“저 어린 구미호도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할 때다. 그 누구보다도 본인에 관한 진실이니까.”
*
캉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꿈뻑거렸다.
“엄마? 나한테 엄마가 있었다고?”
마치 자신에게 꼬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강아지 같은 반응이었다.
생명에게는 자신을 낳아준 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식인 야수들을 피해 숨어 살았던 캉이에게는 이런 당연한 상식이 부재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일식이 일어나 구미호로 폭주할 때마다 기억이 초기화되었으니, 캉이와 처음 함께했을 때엔 말 그대로 야생에서 갓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런 녀석을 줄곧 교육해온 건 마왕 제르비어스였다.
이번에도 설명을 위해 나선 것은 그였다.
“너를 낳아준 어른 구미호가 있다는 뜻이다, 캉이야. 내가 해준 ‘지우개 공주’ 이야기를 기억해보렴. 공주가 마지막까지 잊지 않고 있었던 게 뭐지?”
“왕비의 이름!”
“그래. 공주에게 있어 그만큼 왕비가 소중했던 거지. 그것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였기 때문이다.”
“나한테도 엄마가 있었던 거구나.”
“너와 내가 함께 빠져들었던 제트카이저를 떠올려 봐라. 13화에서 파일럿 훈이가 불타는 열차에서 승객들을 구하잖니? 그때 훈이는 왜 괴수들과 싸우다 말고 제트카이저를 탄 채 전장에서 이탈했지?”
오호라. 철저한 눈높이 교육인가.
캉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기색으로 층간 구역에서 제르비어스가 보여준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 열차에 소중한 사람이 타고 있었으니까.”
“맞다. 훈이의 엄마였지.”
“알겠어. 엄마가 어떤 존재인 건지.”
내가 아는 캉이는 느리게 배운다.
하지만 잘못 배우는 일은 없게 하고 싶다. 본능적으로 직관이 뛰어난 아이니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나는 캉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지금까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캉이야. 네 엄마가 7층에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방법이 없었어.”
“단탈리온한테 물어봐도 안 알려줬고?”
“응. 그 녀석이 가끔 엄청 비싼 대가를 요구할 때는 내가 알 방법이 없거든.”
“그렇구나. 이상한 기분이야. 나는 오랫동안 그 숲에서 친구들과 외롭지 않았어. 하지만 형아들을 만나게 되면서 깨달았지. 그 친구들은 내 꼬리가 만들어낸 분신들이었다는 걸.”
성장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한다.
캉이는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가짜 친구들을 만들어 지내고 있었고, 내가 녀석의 폭주를 끝장내버린 순간 더이상 친구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때가 캉이에게 있어선 유년기의 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청년기의 시작이 되겠지.
“캉이야. 내가 너를 3층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했던 이야기 기억하지? 가족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가족을 찾지 못하면 형아가 내 가족이 되어준다고 했고.”
기억력은 정말 훌륭한 녀석이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해골의 모습이라서 참 다행이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우리는 다 함께 엄마의 행방을 찾아 나설 거야.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만나고 싶어.”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캉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망하게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를 쳐다보니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인 듯했다.
“엄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어. 아무리 노력해봐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겠니?”
“응. 나는 형아랑 누나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죽음에 익숙해. 대수림에서 내가 목격한 죽음의 순간들을 세보면 어쩌면 제르비어스 아저씨랑 비슷할지도 몰라.”
제르비어스는 조용하게 ‘내가 폭렬마왕으로 얼마나 많은 용사를 해치웠는데’ 하고 중얼거렸으나 모두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엄마를 찾아보고 싶어. 만약 더이상 세상에 엄마가 없다고 해도 그걸 확인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우개 공주가 마지막까지 엄마의 이름을 지우지 못했던 이유를…… 나도 알고 싶거든.”
아까부터 얘기하는 지우개 공주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 보니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나눈 이야기인가 보다.
처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야기로 소외되는 기분이 어색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그때 내 뇌리에 떠오른 것은 내게 불사자의 주술을 걸어준 골제 바르한의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6층 만골사막의 해골 군단들은 내가 세계수의 줄기를 파고 들어가 7층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해골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강력하기 짝이 없는 용왕과 수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골제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전혀 상관없는 두 개의 퀘스트가 나를 갈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순서를 잘못 정했다가는 일을 그르칠지도 모르니까.
‘호이란을 먼저 찾아야 하나. 문을 먼저 열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