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최후의 꼬리 (8)
화산재가 쌓여 단단해진 토양이 밟힌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여 있는데 그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다. 화산의 분화구에서 흘러나오는 가스 구름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체 나는 언제부터 이 언덕을 달리고 있을까.
“마그마 볼?”
내 오른손에는 단단하고 굳센 족쇄가 들려 있었다.
그 감촉이 억지로 내리눌렀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강제로 소환시켰다.
‘이렇게 마그마 볼을 품은 채…… 화산의 분화구를 향해 달렸었지.’
이곳은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
영문도 모른 채 내가 잡혀온 감옥의 첫 번째 층 화룡도.
화룡도의 교도관이 던진 시련이었던 마그마 볼의 코스를 나는 달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왜 달리고 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냥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투에 패배한 죄수들이 의식을 잃고 널브러져 있었다.
죽었나?
아니, 기절한 것 같기도.
만약 죽었다고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다리는 껑충껑충 오르막길을 정복하고 있었지만, 생각이 뻗어 나가는 속도는 느리기 그지없었다. 마음이 거대한 늪에 빠진 채 가라앉기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분화구 앞에 도착했다.
큼지막한 뿔을 가진 마왕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등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성검이 누름돌처럼 올라가 있었고.
왜인지 저 마왕의 뒤통수가 낯익다.
그의 등을 내리누르고 있는 성검의 외양도 익숙하다.
‘하지만 떠올리기 싫어.’
마왕을 외면한 채 나는 성큼성큼 분화구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마그마 볼을 던지기 위해 들어올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망설이게 된다.
‘이걸 던져넣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엄청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다. 이 분화구 앞에서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마그마 볼을 집어던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언덕을 달리게 될 것이다.
그 막대한 피로감과 짜증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았다.
떨그렁.
“대체 어디서 짱박혀 있나 했더니 이 장소에 못 박혀 있었던 거냐.”
어라?
뒤를 돌아보니 쓰러져 있던 마왕이 성검을 내동댕이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광경을 엿보는 기분이다.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냐?”
“그거. 절대로 못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렇겠지. 이 검이 진짜 아론다이트였다면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
마왕이 저벅저벅 내 눈앞으로 걸어왔다.
이상하게도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덩치가 두 배씩은 커지는 느낌이다.
“때가 되었다, 용사야.”
“무슨 때가 되었다는 거죠?”
내 말에 마왕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무섭게 생긴 외양이 더욱 흉악해졌다.
내가 뭔가 말실수 같은 것이라도 한 걸까?
“왜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을 하는 거냐, 너. 너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건방지기 짝이 없었잖아. 용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우리가 만났었다고요? 용이요? 저는 태어나서 용을 본 적이 없는데요.”
“으음. 그런가.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억을 차단했나 보군.”
마왕은 한참 동안이나 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입 밖으로 ‘정신지배’니 ‘제거해야 할 쐐기’니 하는 영문 모를 소리들을 흘려보냈다.
잠시 후 그는 결정을 내린 듯이 밝은 표정이 되었다.
“역시 이게 최선일 것 같군.”
“뭐가 최선이란 거…… 끄아악!”
빠아아아악!
턱을 강타하는 묵직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충격도 충격인데 뭔가 강렬한 감정을 담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덕을 한참 데구르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났다.
멀리 굴러가버린 마그마 볼을 주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갑자기 얻어맞은 것에 대한 분노가 먼저였다.
“왜 때리는 겁니까!”
마왕이 손목을 풀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거야 네가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지.”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무슨 맞을 짓을 했다고!”
마왕의 발이 내 복부를 걷어찼다.
뱃가죽이 그대로 뚫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너무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고 싶다.
그런데도 이상하다.
그냥 계속 누워있으면 될 텐데 왜 나는 꾸역꾸역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렇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도 물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거기에 화가 난 게 아니야.”
마왕이 다가와 내 멱살을 붙잡았다.
“네가 주저앉아 꽁꽁 숨은 장소가…… 계속 반복 재생하고 있는 순간이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것이 나를 화나게 만드는 거다.”
뻐어어어억!
이번엔 박치기였다.
마왕은 계속 나를 두들겨 패면서 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는 너의 정신세계 속이니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방문자인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감정은 남아 있어.”
내가 품어온 감정?
그게 뭔데?
“후회. 사무칠 것처럼 강렬한 후회.”
“내가…… 후회한다고?”
“그래. 어찌나 오랫동안 쌓아왔는지 그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의 후회다.”
마왕이 내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에서 조금씩 분노와 울분뿐 아니라 다른 감정이 읽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슬퍼하고 있는 것 같지?
“너는 원래 여기서 성검으로 꾀를 내어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다음 마그마 볼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다음 층으로 넘어갈 열쇠를 얻었지. 기억해 봐.”
우승? 열쇠?
“네 손등을 봐라. 무려 여섯 개의 불빛이 있지 않느냐? 그게 우리가 겪어온 모든 것을 증거하는 거다. 이곳, 이 분화구에서 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용사란 족속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나에게 ‘마왕이 있을 수 있는 장소’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
왜 뼈를 부술 듯 무거운 주먹보다,
지금의 말이 더 나를 아프게 하는 걸까.
“나에게는 그것이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내 평생의 신조를 어길 만큼 용기를 내야 했다고. 그런데…… 너는 그 순간을 이만큼이나 후회하고 있었던 거냐?”
이 사내는 누군가에게 믿음을 배신당한 것 같다.
등에 칼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다.
누가 그 칼을 꽂았지?
나인가.
“이 마그마 볼에서 나에게 이기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패배해서 7번 방의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형량을 채웠더라면 지금처럼 용의 술수에 빠져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겠지. 화룡도의 층장인 나에게 도전하지 말걸. 마그마 볼에서 우승하지 말걸. 등반을 하지 말걸! 너의 후회는 거기에서 비롯된 거 아니냐?”
마왕의 절박한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 입에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의 육신이 조각조각 잘라진 다음 한꺼번에 허물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아니야. 제르비어스 폰타인.”
“……뭐?”
“내 후회는 그게 아니었다는 거다.”
막혀 있던 기억이 풀림과 동시에 무수한 감정들까지 폭발하고 있었다.
녀석의 등 뒤에 있는 저 분화구처럼.
“나는 네가 용왕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스티나가 뇌룡의 전격에 불타버렸다고 믿었어. 캉이가 엄마를 만나지도 못한 채 숨을 다했다고, 나를 믿고 따라온 토니아의 남은 날개마저 꺾였다고 결론 지었어. 그만큼…… 너무 긴 시간이었으니까.”
멱살을 쥔 마왕의 손길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후회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차마 못다 한 말이 화산재가 되어 그와 나 사이에 쌓이고 있었다.
“너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친구들을 내 등반에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나 혼자 이 모든 고통을 짊어졌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게 괴로워서 후회했던 거다.”
제르비어스는 내 말을 듣더니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그랬던 거냐.”
“그래. 후회가 아니야. 자책이다.”
“여전히 이 감옥을 벗어나겠다는 갈망은 그대로인 거냐.”
“당연하지.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옥할 거야.”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할 차례다. 우리는 아무도 죽지 않았고…… 용왕의 손아귀에서 너를 빼내오는 데 성공했으니까.”
우르르르릉!
거대한 지진과 함께 화산의 분화구에서 무언가가 분출되었다.
“깨어날 시간이다, 용사야.”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은 검은 화산재가 아니었다.
한 잎 한 잎마다 미약한 빛을 내뿜는 달맞이꽃이었다.
녀석과 내가 마녀 일레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초원을 뒤져서 찾아내었던 꽃.
사실은 지구에 두고 온 여동생에게 주고 싶었던 꽃다발.
그것이 제르비어스의 뿔에, 그리고 내 어깨에 사르락거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그래. 계속 층을 올라가야지.”
*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변했다.
제르비어스는 여전히 내 멱살을 붙잡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외한 모든 풍경이 달라졌다.
“슈바인. 정신을 차린 거야?”
걱정 어린 아스티나의 모습.
그 옆에는 캉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지금의 내 모습은 해골 병사. 꿈뻑일 눈동자가 없어서 내가 정신을 차렸는지 아닌지가 헷갈리는 모양이다.
“그래. 돌아왔어. 고생시켜서 미안.”
그 뒤로 격한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어느 정도로 격했느냐 하면 내 몸뚱이를 너무 과하게 흔드는 바람에 다시 한번 처참하게 탈골이 될까 봐 무서울 정도였다.
이상하게 말수가 적어진 제르비어스가 설명했다.
“주박에서 풀려났다고는 하지만 환상을 현실이라 믿고 긴 시간 헤맸던 것에 후유증이 없을 수는 없다. 아마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할 거다, 용사.”
“평화로운 때였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내가 용왕에게 붙잡혀 있었던 동안 무려 2주나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듣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희들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어째서 내가 6층이 아닌 7층에서 모두를 소환했는지 말이야.”
“그래. 어떻게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서 홀몸으로 층 하나를 깨부순 거냐? 위로 올라갈수록 더 어려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깨부순 게 아니니까. 나는 6층의 층장인 골제 바르한과 동맹을 맺었거든.”
만골사막에서 만난 해골 군단.
그리고 그 군단을 이끄는 흑마법사 바르한의 이야기를 모두의 앞에서 풀어놓았다.
아스티나는 따로 떨어진 층과 층이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끝나지 않는 쌍마대전의 장소에서 태어난 그녀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 전쟁을 종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아스티나는 전쟁터에서 태어났으나 전쟁을 모르는 거다.
“우리가 대기실에 있는 동안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렸구나, 슈바인.”
“상의하지 못해서 미안.”
“아니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세계수의 뿌리가 내리는 저주 때문에 죽었을 거라며.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지.”
“응. 그리고 용왕과 다른 용들을 만나고 나서는 이 상황이 오히려 잘 되었다고 확신하게 됐어. 우리 여섯의 힘만으로는 절대 용왕을 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자 가지 위에 잠자코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여섯이 아니다. 일곱이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것은 낯설었지만 그의 음성은 분명히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환룡 이멜타스?”
“그래. 친구들과 회포를 풀 시간을 더 주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군.”
이멜타스는 나에게 눈짓을 했다.
단둘이, 따로 이야기하자는 말이었다.
우리 둘은 모두의 허락을 받은 뒤 멀리 떨어진 가지까지 날아와 안착했다.
“일단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지? 내 도주를 도와줬던 것, 그리고 내가 붙잡혀 있을 때 친구들을 훈련시켜 주었던 것 모두 고마워.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다시 뭉칠 수는 없었을 거야.”
“감사의 인사는 아직 이르다. 그것은 용왕 게브라둠을 쓰러트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사실 내 쪽에서도 궁금한 것이 많다.
어째서 이 용은 용왕을 적대하고 있을까.
왜 캉이의 어머니인 구미호 호이란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거기에 대해 묻자, 이멜타스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고백했다.
“그건 내가 구미호 호이란에게서 목숨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이 가진 아홉 개의 꼬리 중에서 최후의 꼬리를 건네받았다.”
놀랍게도 이 용은,
구미호 호이란의 양자(養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