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최후의 꼬리 (6)
“새로운 왕비는 아름답고 우아했던 데다 백성을 보살피는 현명함까지 갖춘 대단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배로 낳지 않은 공주에게는 조금의 애정도 주지 않았어. 본인이 왕성의 완벽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 치워내야 할 장애물이라고만 생각했지.”
왕이 함께 있을 때 왕비는 공주에게 무척 다정했으나 단둘만 남겨져 있을 때는 가혹하고 사악한 말로 공주를 후려쳤다.
이전 왕비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물건들을 모두 치우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말리는 공주를 악령에 씐 것이냐며 몰아가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듣던 토니아마저 격분했다.
“아니, 왕은 그 지경이 되도록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왕은 새로운 왕비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자신의 기억 속에서 죽은 왕비의 기억이 완전히 지워졌으니까. 지우개의 악마는 그만큼 철저했으니.”
왕비의 철저한 계략 아래 공주는 왕성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을 그리워하는 철부지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죽은 왕비를 기억하고 있던 병사나 시종들도 새로운 왕비가 두려워 공주를 위로해주지 못했기에 어린 공주는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 외로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에게 구박받아 엉엉 울던 공주에게 잊고 있던 물건의 존재가 떠올랐다. 바로 악마가 봉인돼 있던 그 지우개였지. 서랍에서 그 지우개를 다시 꺼내자마자 악마는 기다렸다는 듯 응답했다.
소원을 이뤘는데 왜 그리 울고 있는가.
공주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지워진 왕의 기억을 되살려달라고 애원했지.
하지만 악마는 난처해했어. 한 번 이 지우개로 지운 것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며.
그러자 공주는 이번엔 왕의 머릿속에서 새 왕비를 지워달라고 했지만 그것 역시 악마는 들어줄 수 없다고 했지. 이 지우개는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면서 말이야. 다시 서글피 우는 공주에게 악마는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속삭였지.
공주 자기 자신에게 지우개를 사용하면 되는 일 아니냐며. 공주 또한 죽은 왕비를 기억하지 못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어.
공주는 용기를 가진 채로 지우개를 집어 들었지.
하지만 이전 왕비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면 엄마를 기억하고 그리워해 줄 사람은 왕성 안에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 어린 소녀를 망설이게 했어.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되물은 것은 근엄하게 서 있던 이멜타스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이멜타스는 민망한 듯 손바닥을 휘저었다.
“아니. 그저 결말이 궁금했을 뿐이다. 흠흠.”
이야기는 계속 흘러갔다.
“공주는 하염없이 고민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의 이기심으로 왕국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 그래서 몹시 슬픈 선택을 하였지.”
공주가 지우개로 문질러서 지워버린 것은 계모에 대한 존재였다.
이미 상실한 존재가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는 인간인 새 왕비를 자신의 뇌리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그 결과 공주는 계모가 바로 눈앞에 있어도 깨닫지 못했다. 새 왕비가 하는 꾸지람도, 폭언도, 괴롭힘도 모두 인식하지 못했어. 소녀가 인식하는 세계에서 단 한 사람이 완전히 지워져 버린 거야.”
그때서야 왕은 자신의 딸에게 일어난 일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너무 늦었다. 왕국의 어떤 뛰어난 의사도 공주의 이런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악마의 저주가 그만큼 강력했기에.
“결국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새 왕비는 격분했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공간에 공주를 유폐시켰지. 왕비를 지움으로써 자기 자신도 지워진 거야.”
이 동화는 그 뒤로 여러 개의 다양한 결말을 가진 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다.
계모가 악마의 지우개를 손에 넣어 왕의 기억까지 지워버려 왕국을 차지했다는 결말도 있었고, 악마가 공주의 몸을 차지해 부활했다는 식의 결말도 있었다.
제르비어스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결말은 이것이었다.
“먼 훗날 왕과 왕비가 모두 죽고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서 왕성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모두가 홍수를 피해 달아났으나 성인이 된 공주는 누구도 구출해줄 수가 없었지. 텅 빈 방에 물이 차오르고 공주의 깡마른 몸도 젖어 들어갔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마지막으로 공주는 죽은 엄마의 이름을 불렀어.
그때 유폐실의 벽이 무너지면서 신비한 빛깔을 내뿜는 공작새가 죽어가던 공주를 구해냈다. 그리고 물에 가라앉은 왕국을 영원히 떠나서 하늘나라로 갔다고 전해지지.”
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지우개 공주를 둘러싼 몽환적이고도 슬픈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아스티나는 제르비어스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기 어려웠다.
“잘 들었지만…… 이게 슈바인의 자폐 상태를 깨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어.”
“다들 이 동화의 교훈이 뭐라고 생각해?”
“글쎄. 계모는 나쁘다?”
아스티나의 대답에 제르비어스는 만족하지 못했다.
“악마의 물건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왕성은 높은 산에 지어야 한다?”
이어 캉이와 토니아의 대답도 이어졌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왕의 눈빛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이건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우화야. 한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교훈이지. 그리고 잊히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이름’이라는 소리다.”
지우개 공주는 악마에게 휘둘려 불행해졌지만 마지막까지 죽은 엄마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르비어스의 해석은 이러했다.
“내가 아는 슈바인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할 녀석이 아니야. 분명 우리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는 걸 예상하고 버텼을 거다. 굴복하지만 않으면 우리가 방법을 찾을 거라고 믿으면서. 용왕이 녀석에게서 빼앗고자 하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유폐시킨 거야.”
지우개 공주가 그러했듯,
이 등반죄수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지워나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지우지 못한 것이 있었을 거라고,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제르비어스는 말하고 있었다.
“이름이 열쇠가 될 거라는 거지?”
아스티나는 이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해골 병사의 앞에 서서 간곡함을 담아 불렀다.
“슈바인 스트링거.”
“…….”
응답은 없었다.
어쩌면 본인의 이름이 아니라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각자의 이름이 저마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스티나 류.
제르비어스 폰타인.
캉이.
토니아.
심지어 이 자리엔 존재하지 않는 레나스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데?”
“어쩌면 화룡도에 남기고 간 친구들의 이름이 열쇠가 아닐까?”
“내가 알고 있다. 나는 1층장이었으니까. 7번 방의 죄수들 이름은 다 알고 있지. 뚠 아티르. 올쿠레 켄타. 비르카 리케우톤. 디멜 무바크.”
달그락.
슈바인의 아래턱이 순간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세계수의 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때문이었다.
일말의 희망조차 먹히지 않자 일행은 망연자실해졌다.
설마 이대로 먹통이 된 기계처럼 망가진 친구를 되돌릴 방법을 찾지 못해 등반을 멈춰야 하는 것인가.
아스티나가 아쉬워했다.
“마도서 단탈리온이 있었다면 그 녀석이 어떻게든 돌파구를 알려줄 텐데.”
“하지만 그건 슈바인의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 있을 거다. 오직 자기 자신만 물건을 넣고 또 꺼낼 수 있지.”
그러자 듣고 있던 이멜타스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의 손에는 방전된 레나스의 머리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서 이 자동인형의 몸통이 보이지 않았던 거야. 아공간 주머니였군.”
“그 아공간 주머니를…… 뭐라고 부르더라?”
제르비어스가 뿔을 긁으며 기억해내려 하자 캉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인벤토리!”
“그래, 인벤토…….”
푸하아아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슈바인 스트링거를 둘러싸고 있던 모두가 강력한 내공의 폭발에 좌르륵 밀려났다.
가장 가벼운 토니아는 한참을 날아갔고, 근거리에 있던 아스티나는 망치에 후려맞는 듯한 충격에 다급히 리버스 그래비티를 전개했다.
그때, 해골 병사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벤토리를 노리는 녀석들, 죽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더듬는 슈바인의 오른손을 멍하니 보던 아스티나가 발악하듯 외쳤다.
“피해!”
폴리모프를 하더라도 용의 육중한 무게는 영향 받지 않는다. 그래서 내력 폭발에 유일하게 휘말리지 않은 자는 환룡 이멜타스였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사식 비천성검(飛天聖劍)]
쐐애애애액!
슈바인의 인벤토리에서 해방된 아론다이트가 이멜타스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완벽한 방어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퍼어억!
아론다이트가 이멜타스의 대흉근을 찢어발기며 관통상을 남기고 비상했다.
이멜타스는 피격과 동시에 분신술을 구사했으나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본체가 있던 자리에 분신을 남겨 대미지를 무로 돌리려 했으나 여파가 남아 있었다.
캉이 옆에 솟아오른 이멜타스의 왼쪽 어깨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슈바인! 정신 차려라!”
이미 정신을 차렸기에 제르비어스의 다급한 외침은 사실상 어불성설이었다.
해골의 뻥 뚫린 안구에서 맹렬한 적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포기해라, 메르킨. 너희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나는 기원검을 꺼내지 않아.”
아스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인벤토리.
그것 역시 스스로 유폐한 슈바인의 의식을 깨우는 열쇠였다.
하지만 그 열쇠는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앞의 친구는 자신을 약탈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골의 시선이 청룡패웅검을 든 아스티나로 향했다.
‘이런, 다음은 나야?’
저 멀리 하늘에서 세계수의 가지 서너 개를 통째로 분쇄시키며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여태껏 한 번도 맞이해본 적 없던 성검 아론다이트의 맹습이었다.
촤라라락!
흑기사의 갑옷이 아스티나의 피부를 타고 완성되며 가까스로 참격을 튕겨냈다.
“끄아아악!”
성검과 충돌하며 운해를 향해 추락하던 아스티나의 허벅지를 두툼하고 푹신한 꼬리가 단단히 붙잡았다.
어느새 구미호로 변신한 캉이가 가지에 매달린 채 아스티나를 나꿔챈 것이다.
“형아! 우리야. 왜 못 알아보는 거야?”
구미호의 애타는 부르짖음에도 슈바인은 응답하지 않았다.
적으로 상정한 존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귀담아 듣지 않겠다는 듯이.
성검을 역소환시킨 슈바인이 이번엔 고풍스러운 책 한 권을 인벤토리에서 꺼내들었다.
“단탈리온.”
제르비어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슈바인은 광룡의 고문을 버텨내느라 정신이 붕괴되었다고 해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저 마도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인에게 올바른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완벽한 거짓말 탐지기니까.
“묻겠다, 단탈리온. 눈 앞의 이 녀석들은 진짜 내 친구가 맞나?”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한 속도로 단탈리온의 페이지에 글자들이 새겨졌다.
- 그렇습니다, 용사님! 제 말을 들으십시오. 이분들은 지금까지 용사님과 함께 감옥을 돌파해 온 진짜 친구분들입니다.
아스티나의 뛰어난 시력은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도 단탈리온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슈바인 스트링거는 이 마도서의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교도관장조차도 완전히 믿지 않는 슈바인이 유일하게 완전한 신뢰를 보내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싸우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이번에도 아니야? 빌어먹을. 다들 뭐하느라 아직도 미적거리는 건지 모르겠네.”
뭐라고?
슈바인의 중얼거림에 아스티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탈리온이 만들어내는 글씨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
현실을 왜곡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 아스티나 님! 달아나십시오. 용사님은 지금까지 셀 수 없는 방법으로 여러분을 내면세계에서 몰살시켰습니다. 절대로 망설이지 않으실…….
텁!
강제로 닫혀진 마도서는 이내 아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그 대신 해골 병사의 손에 들려진 것은 마검 디아볼릭이었다.
이것을 꺼내들었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눈 앞의 상대를 베어내겠다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아스티나의 은발이 중력을 거스르며 솟아올랐다.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 이 순간을 위해 대기실에서 계속 단련해 온 건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다.
청룡패웅검과 디아볼릭의 검기가 허공에서 두 마리의 뱀처럼 얽혀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