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최후의 꼬리 (5)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구미호가 천공섬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수천 개의 부유도와 그 밑에 바다처럼 깔린 새하얀 운해(雲海) 덕분에 캉이는 마치 구름 한 조각이 뛰쳐 오르는 것 같은 평화로운 풍경을 자아냈다.
하지만 캉이의 등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용사야! 정신 좀 차려봐라. 왜 아무런 말이 없냐!”
제르비어스가 오메가 위프를 풀어준 뒤에도 슈바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해골 병사가 된 외양 덕분에 그 침묵은 동료들을 오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스티나, 어떡하지? 한 대 후려쳐 볼까.”
마왕의 질문에 아스티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선 위험해. 이멜타스가 경고했잖아. 용들이 가진 고문 기술을 전부 동원했을 거라고. 잘못 건드렸다가 캉이의 등 위에서 발작이라도 하면 수습하기 어려워.”
아스티나는 현재 구미호로 변신한 캉이의 육체에 리버스 그래비티를 걸어 빠른 비행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집중력을 분산시킬 여유가 없었다.
“내가 한 번 볼게.”
아스티나의 품에서 페어리가 포르르 날아 해골 병사 슈바인의 두개골 위에 안착했다.
토니아의 양손 중 의수가 아닌 멀쩡한 쪽에서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요정술의 진단이 끝나고서 토니아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맺혔다.
“분명히 깨어 있어. 잠들거나 마법에 걸린 상태는 아니야.”
“아니라고? 그렇다면 어째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건데?”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분명히 우리가 하는 대화를 듣고 있을 텐데……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여 봐라, 이 망할 용사 놈아! 널 구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 줄 아냔 말이다.”
제르비어스의 간곡한 외침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캉이의 쫑긋 솟은 두 개의 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던 아스티나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인형과 같은 상태라니. 가까스로 적의 수중에서 빼 온 대장이 이런 꼴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더 황당한 상황이었다.
“용들이 쫓아 오지 않는 것도 불길해.”
용왕의 드래곤 레어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상대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준 것도 아니다.
이멜타스의 말에 따르면 용들은 순간이동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추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지독하게 힘들다고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따라붙는 용은 한 마리도 없었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건가?’
용왕 게브라둠과 그 수하들이 자신을 일부러 놓아준 것 같다는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자는 지금 곁에 없다.
그자는 목적지인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있을 터였다.
*
- 이쪽이다. 아스티나 류.
세계수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익숙한 존재의 부름이 느껴졌다.
운해에서 조금 튀어나온 세계수의 가지에서 회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사내가 아스티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캉이야, 저쪽으로.”
“어? 응. 알겠어, 누나.”
위그드라실에서 새어 나오는 일곱 빛깔의 색채에 캉이는 약간 몽롱한 상태였다.
그것은 개미가 여왕의 페로몬에 취하게 되는 원리와 비슷했으나 다행히 이 어린 구미호에게 심각한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를 구출했구나. 반신반의했거늘 이제 마음을 좀 놓아도 되겠어.”
“네 덕분이지, 이멜타스.”
폴리모프 상태의 이멜타스는 슈바인의 모습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전의 만남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운을 풍기는 눈앞의 인간을 보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군. 0층의 교도관은 설득하기 쉬운 자는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너와는 달리 그 교도관은 정말 사정을 봐주지 않았거든. 한 번이라도 넋을 놓았더라면 여기 있지 못했을 거야.”
“후후. 단단한 강철을 제련하려면 그만큼 뜨거운 화롯불이 필요한 법이지.”
다시 소년의 형태로 돌아온 캉이가 반가운 마음에 이멜타스의 허리춤에 안겼다.
“보고 싶었어, 형아!”
“그래. 그 짧은 사이에 키가 더 자랐구나. 분신술은 많이 배웠고?”
캉이와 담소를 나누던 이멜타스는 곧 이변을 눈치챘다.
아스티나의 표정이 줄곧 어두웠던 것이다.
“왜 그러는 거지? 슈바인 스트링거의 상태가 안 좋은가?”
“안 좋은 정도가 아니야.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고, 불러도 대답이 없어.”
슬쩍 밀어서 캉이를 떼어놓은 이멜타스가 주저앉아 있는 슈바인 앞으로 걸어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해골 병사와 눈을 맞춰본 이멜타스의 감상 또한 비관적이었다.
츠파앗!
이멜타스가 슈바인의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편 후 마력을 피워올렸다.
병장기에 검기를 씌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행위.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폐 상태로군. 스스로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의 의식을 완전하게 차단했어.”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회복이란 단어는 지금 이 상황에 적합하지 않아. 슈바인의 마력 회로는 이 순간에도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어. 육체만 따지면 최상의 컨디션이야. 이건 마음의 문제라고밖에 할 수 없겠는걸.”
“당신도 방법을 모르는 거야?”
아스티나의 절박한 질문에 이멜타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질문에 담긴 초조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하고 만 걸까?’
한 달로 예상했던 특훈 기간을 최대한 앞당겨 2주 만에 8서클의 문을 열어젖힐 만큼 강해졌다.
지금이라면 만철도시의 악마가 내보냈던 등반죄수들을 혼자서 제압할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때를 놓치고 만 것일까.
슈바인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던 이멜타스가 무거운 입을 떼었다.
“용왕 게브라둠은 강력한 층장이지만 죄수를 죽이지 않고 이런 상태로 몰고 가진 못했을 거다. 이건 그의 수하인 광룡 메르킨의 솜씨겠지.”
용의 추리는 사실에 무척 근접한 부분을 어루만졌다.
“메르킨의 마인드 스포일러는 환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들었다. 지금 슈바인 스트링거는 너희에게 구출된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상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말이야?”
“내면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나는 2주 만에 슈바인을 다시 만난 것이지만 이 친구의 내면세계에선 그것이 한참 전에 일어난 사건처럼 희미해졌을 수도 있어.”
이멜타스가 꺼내는 말은 아스티나의 어떤 구석을 후벼팠다.
“깨어날 수 없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거다. 이번만큼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희망을 가져보지만 번번이 그것이 무참하게 박살나는 거야. 그 과정이 얼마나 오래 반복되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1년일지, 10년일지…… 어쩌면 1,000년이었을지도.”
아스티나 류.
그녀는 본디 푸르가토리움의 죄수가 아니다. 애초에 이 세계선의 사람도 아니다.
천마 설공에게 삼월초원 전체가 몰살당하는 세계선에서 거듭되는 시간여행 끝에 희망을 잃어가고 있던 회귀자였다.
설공에게 수천, 수만 번 가족을 잃었다.
제발 이번만큼은 다른 결과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블랙홀에 몸을 던졌었다.
자신이 겪었던 그 길고도 긴 절망의 시간을,
슈바인의 내부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추론이 그녀를 끔찍한 기분에 젖게 만들었다.
꽤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한 트라우마가 다시 아스티나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안 돼.”
거기에 제동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본인의 강력한 의지였다.
무한회귀의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 올려준 사내가 그때의 자신과 똑같은 꼴을 한 채 늪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널 끄집어내 줄게.”
*
이멜타스의 시선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게 걱정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수없이 반복했겠지. 아마 처음에는 환상 속의 너희를 상대로 문답 같은 걸 했을 거다. 진짜 자신의 친구라면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하지만 그런 기대가 꺾이고 꺾여서…… 어느 시점에선가부터는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아. 광룡 메르킨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 어떤 환상에도 흔들리지 않으려 스스로 현실과 담을 쌓은 거지.”
그렇다면 남겨진 과제는 그 담을 무너뜨리고 침잠한 슈바인의 의식을 강제로 깨우는 것이었다.
환룡이라는 이명을 가진 이멜타스에게도 그것은 난감한 과제처럼 보였다.
“이런 단계로 구축된 정신 방벽은 나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야. 너희들의 힘으로 해결이 가능하겠나.”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의외로 실마리를 잡아낸 것은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이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제르비어스?”
“마왕인 나는 인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주워들은 이야기 중에서 ‘지우개 공주’라는 동화가 있어.”
“지우개 공주?”
캉이의 귀가 쫑긋해졌다.
제르비어스가 스스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화로운 한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있었다. 그와 왕비 사이에는 귀엽고 총명한 딸이 있었고. 백성들마저도 모두 왕을 칭송했지.”
변사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는 것이었다.
자연히 제르비어스의 어조 또한 변사의 그것처럼 듣는 이를 끌어당겼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가 죽고 말았어. 병이었던가? 아니면 말을 타다 사고로 죽었던가? 흠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지.”
물론 변사가 해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왕비를 잃고 비탄에 빠진 왕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지. 애지중지 키워야 하는 딸마저 보살피지 않은 채. 어린 공주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 그리고 아버지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천마와 마녀의 딸이었던 아스티나의 귀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천마신교의 소교주이자 백묘탑의 공녀인 아스티나의 머릿속에 그 어린 공주의 슬픔이 생생히 피어올랐다.
“그러다 공주는 왕성의 보물 창고에서 한 지우개를 발견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사악한 악마가 봉인된 지우개였지. 그 악마는 공주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내가 네 아비의 슬픔을 지워줄 수 있다고.
그 말을 들은 공주는 다음 날 잠든 왕의 이마에 지우개를 한 번 문질렀고…… 일어난 왕에게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건강과 혈색을 되찾은 것은 물론 딸을 향한 애틋한 시선까지 모두 되돌아왔지.”
모든 옛이야기에서 그렇듯 악마가 들어준 소원은 결코 행복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머지않아 공주는 깨닫게 되었어. 왕이 슬픔에서 벗어난 것은 왕비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지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내이자 딸의 어미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왕을 지켜보는 공주는 서글펐지만…… 그래도 가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지.”
왕은 뛰어난 수완을 가진 군주였고, 곧 기울어져 가던 왕국의 살림 또한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연히 왕국에는 왕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왕은 새로운 아내를 맞이했다. 공주에게는 계모가 생긴 셈이지.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