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최후의 꼬리 (4)
누가 적의 수장인지 탐색할 필요는 없었다.
좀 전부터 불길한 기세를 내뿜는 키 큰 여인.
바로 저 존재가 다른 강력한 용들을 향한 경계심을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있었다.
‘용왕부터 현혹시킨다.’
아스티나의 시선은 용왕 게브라둠이 폴리모프한 인간에게로 못 박혀 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야 바깥의 난장판은 동료들에게 맡겨 둔다.
용왕의 드래곤 레어가 어떤 구조인지는 한참 전에 숙지했다. 중요한 것은 용왕 근처에 ‘얼굴이 없는’ 용린병들이 소환돼 있느냐였다.
이멜타스는 이렇게 말했다.
‘용린병은 평범한 수족 같은 게 아니다. 용왕의 비늘로 만들어지는 사역마지. 그러니 녀석들의 숫자가 다섯 기를 넘어가면 용체화에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겠지만 너는 그 순간을 노려야 한다.’
용린병의 숫자는 열 기.
예상보다 두 배나 많은 숫자였다. 공간을 찢고 나타난 습격자인 아스티나에겐 청신호였다.
청룡패웅검이 용왕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하강했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혈룡굉월참(血龍宏月斬)]
불시에 내려친 일검이었음에도 용왕은 노련한 동작으로 피해냈다.
용왕이 참격의 지진파를 피하기 위해 몸을 띄운 순간 아스티나의 다음 수가 곧바로 펼쳐졌다.
혈룡굉월참은 더 큰 기술을 먹이기 위한 시간벌이용이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최종영창(最終詠唱)]
[아스트로노미컬 디스트럭션(Astronomical Distruction)]
중력을 극한으로 압축시킨 후 해방하는 중력 마법의 절기가 용왕의 신체를 옭아맸다.
무공의 초식을 펼쳐내면서 한편으로 마법진을 돌린다. 이전의 마검사 아스티나에게는 불가능한 전법이었다.
하지만 신격에 다다른 마법사인 생쥐와 훈련하면서 비로소 이것이 가능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행성 파괴술의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오른쪽 팔만 용체화 시킨 용왕이 완성된 술식을 힘으로 찢어냈다.
하지만 그러면서 적지 않은 파괴력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검사인 척하는 마법사였던가.”
용왕의 눈빛에 감출 수 없는 호전성이 드러났다.
이 역시 이멜타스의 조언에 정확히 명시된 부분이었다.
‘용은 죄수들 중에서 마법사를 유독 거슬려 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마력 회로인 드래곤 하트를 갖고 있지. 그래서 인간이 마법으로 자신에게 맞서는 걸 모욕이라 생각한다.’
모욕을 입은 강자는 그대로 되갚아 주려 한다.
상대와 같은 영역에서 싸우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천착하는 것이다.
아스티나는 마나가 폭주한다고 느껴질 만큼 강력한 마법 공격을 용왕에게 쏟아냈다.
용왕은 피하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그것들을 모두 받아냈다. 인간 따위의 마법에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네 몸을 둘러싼 갑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양손을 엑스자로 교차해 중력 칼날을 받아내던 용왕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둔부에서 촤라락 하고 늘어난 검은 꼬리가 30미터 거리에 있는 아스티나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전혀 예상 못 한 반격이었기에 황급히 워핑을 시전했다. 그러나 흑기사 갑옷의 판금에 보기 흉한 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분실물을 찾아가겠다고 했느냐? 이 7층에 존재하는 것 중에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은 없다. 용왕을 제외한 모든 죄수가 주권을 분실했거든.”
“오만함이 너희의 종특이라 하더군.”
“종특? 종의 특성을 말하는 거냐. 희한한 줄임말을 쓰는구나.”
“저 뒤에 기절해 있는 내 친구가 알려준 거야. 물론 이 시간부로는 내가 데려가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인간 마법사여.”
아스티나가 용왕의 시선을 사로잡는 동안.
제르비어스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용린병 열 기를 단신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쐐애애애액!
보라색 마기를 잔뜩 머금은 오메가 위프가 파공음과 함께 휘둘러졌다. 거기에 적중한 용린병 한 기가 신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처박혔다.
그러느라 용린병 두 기에게 근접거리를 허용했으나 마왕에게 있어 채찍을 들지 않은 빈손은 또 다른 흉기나 다름없었다.
[마왕군 폭렬마법]
[2급 오의 ‘지옥파쇄포(地獄破碎砲)’]
비명을 지를 입이 없다는 점에서 용린병은 쓰러트리기 한층 수월한 상대였다.
제르비어스 본인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의 공격력은 오토마타나 용린병처럼 ‘움직이는 무생물’을 상대할 때 특히 대단했다.
‘죽이고 싶지 않다’는 약한 마음이 거꾸로 ‘죽인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상대’에게 마음껏 해방되는 것이다.
아스티나가 용왕 게브라둠의 운신을 제약하고, 제르비어스가 용린병과 호각의 승부를 벌이고 있을 때 캉이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한테도 저런 멋있는 기술명이 있었음 좋겠는데.”
일신의 전투력만 따지면 일행 중 단연 뛰어난 존재인 어린 구미호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환수로서 타고난 천혜의 육체와 꼬리를 이용한 다양한 전투법, 분신술까지 지녔으나 이 모든 공격법은 캉이의 유전자에 새겨진 일종의 본능이었다.
그래비티 웨이브나 허공분쇄마탄처럼 듣기만 해도 몸이 찌르르 하는 멋진 기술명 따위는 없었다.
그것은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대대로 전수되는 것이다.
그런 존재 없이 홀로 대수림에서 살아온 캉이였다.
자신에게도 멋진 기술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념이 조금만 더 발전했더라면 그런 이름을 붙여줄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뇌룡 간다르바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는 구미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콰지이익!
황금색 용의 앞발이 구미호의 척추뼈를 노렸다.
인간에 비해 큼지막한 덩치의 구미호마저도 용의 거체 앞에서는 장난감 수준이었다.
이 하얀 털을 가진 어린 환수를 일격에 짓눌러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근육의 파열과 뼈의 분쇄가 앞발의 감각에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빈 허공을 통과하는 느낌.
“여기지롱!”
간다르바의 머리 위에 똑같이 생긴 하얀 여우가 키득거리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꼬리의 숫자는 아홉 개.
그 익숙한 낭패감이 간다르바의 비늘을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여우? 구미호인가?”
아홉 개의 꼬리를 가졌으며 분신술을 사용하는 환수.
그것은 천공섬에 있는 모든 용들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한 존재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것은 용왕 게브라둠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꼬마 녀석이 구미호였다고?”
멍하니 중얼거리던 용왕은 아스티나의 검기에 복부를 관통당했다. 몇 차례 뒷걸음질 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상대인 아스티나가 아닌 캉이의 본체를 향해 있었다.
“설마 그 구미호인가? 아니야. 다르게 생겼어.”
용왕의 뇌리에서 자신이 완전히 지워졌음에도 아스티나는 불쾌함이나 짜증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회심의 타이밍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에 쾌재를 내지를 뿐이었다.
이 역시 이멜타스의 예상대로였다.
‘캉이가 활약하기 시작하면 용왕의 신경은 온통 이 녀석에게로 쏠릴 거다. 용린병이 있다면 그 사역마들 또한 캉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을 노려야 한다.’
용은 자신의 둥지에 붙잡아온 제물로부터 결코 시선을 떼지 않는 종족.
그런 자들에게서 슈바인 스트링거를 빼 올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빈틈.
아스티나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얘들아, 지금이야.”
제르비어스가 솟구쳐 올라 단번에 잘려나간 사슬 더미 옆에 안착했다. 그의 오랜 동료는 놀랍게도 해골만 남은 채로 태엽이 빠진 인형인 양 주저앉아 있었다.
미리 경고를 듣지 않았다면 그 충격적인 몰골에 주춤거렸을 것이다.
“용사야, 정신이 드냐?”
“…….”
“젠장. 의식이 없는가 보군.”
가만히 있으면 어딜 보고 있는지, 무언가를 보고 있긴 한 건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해골 병사의 또 다른 단점이었다.
다행히 이 또한 여러 예상 시나리오 중 하나였기에 제르비어스는 약속된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휘릭!
그의 오메가 위프가 슈바인의 양팔을 단단히 옭아맸다.
마기가 둘러진 채찍이니만큼 아무리 격하게 움직인다 하더라도 쉽게 풀리는 일은 없을 거다.
마왕이 목표물에 접근하는 순간부터 캉이는 가장 화려하게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무려 아홉 마리의 구미호가 레어의 기둥 꼭대기에서 범상치 않은 요기를 주둥이에 모으고 있던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아홉 개의 여우트림이 용왕 게브라둠, 뇌룡 간다르바, 그리고 용린병들을 향해 신벌처럼 뻗어 나갔다.
“어딜!”
뇌룡 간다르바의 입에서 전격 브레스가 터져 나오며 여우트림을 내쏘는 캉이의 분신을 하나둘 지워나갔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자신의 오른쪽 날개가 여우트림에 꿰뚫렸으며 오랜만에 느끼는 극심한 통증에 비틀거려야 했다.
간다르바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주군인 용왕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채 포효하고 있었다.
“내 눈앞에 흰 꼬리를 들이밀지 마라!”
용왕의 브레스는 뇌룡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한 파괴력으로 캉이의 분신들을 집어삼켰다.
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한 흑색의 브레스.
그것이 긴 시간 공들여 만든 드래곤 레어의 천장과 함께 아홉 마리의 여우를 일순간에 소멸시켰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장내에는 단 한 명의 습격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박살 난 건물이야 다시 만들면 된다.
까마득한 형량과 그를 웃도는 수명을 가진 용왕에게 있어 그것들은 먼지와 동일선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
하지만 빼앗긴 보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흑룡의 우아한 목 위에서 두 개의 불빛이 지옥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유일하게 폴리모프 상태를 풀지 않고 숨어 있던 광룡 메르킨을 향해 있었다.
“어째서 지켜보고만 있었지, 메르킨?”
“아시다시피 날개가 잘려나간 순간 제 힘은 미천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 제가 나섰다고 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유언은 그걸로 만족하겠는가.”
용왕의 목소리에 명징한 살기가 담겼다.
그럼에도 메르킨의 입가엔 여유로운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아닙니다, 용왕이시여. 노기를 거두소서. 아직 등반죄수를 빼앗긴 게 아닙니다.”
게브라둠의 큼지막한 머리가 깡마른 노인을 험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의 눈에는 내가 빼앗긴 죄수가 보이지 않았느냐? 코앞에서 용의 재산을 놓친 것도 모자라서 그런 망발을 일삼는가.”
“육체를 가져갔다 해서 그 정신마저 구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광룡의 손길은 물질세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추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설명하라.”
“마인드 스포일러는 이미 나흘 전에 한계치까지 가동되었습니다. 그들이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정신은 이미 붕괴되었습니다.”
“완전히 망가뜨렸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제는 저의 재주로도 그 등반죄수를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없지요. 당연히 도둑들에게도 불가능할 겁니다. 완전히 불타버린 재는 그 무슨 방법을 써도 다시 빚어낼 수 없지요.”
그 내용보다는 자신만만한 어조 때문에 용왕의 짜증은 조금 가라앉을 수 있었다.
“메르킨.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이 세계수에 숨어버리면 일이 극히 번거로워진다. 이를 어떻게 책임질 것이지? 무슨 수로 슈바인 스트링거를 다시 품에 안겨줄 심산인가.”
“제가 안겨드리는 게 아닙니다. 녀석은 제 손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물론 레어의 바닥이 조금 지저분해질 수는 있겠지요.”
메르킨의 광기 어린 눈빛이 마인드 스포일러의 흡착판을 핥아 내려갔다.
“녀석이 돌아왔을 때, 그 손에는 그토록 아끼던 친구들의 피가 잔뜩 묻어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