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최후의 꼬리 (3)
[죄수 이멜타스의 면회 시간이 10분 후 종료됩니다.]
회색 비늘을 가진 용 여섯 마리가 마지막 브레스를 내뿜은 후 바닥에 착지했다. 그들이 가진 체중을 생각하면 사뿐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여섯 마리는 곧 한 마리가 되었다. 연이어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루가 흘렀다, 아스티나 류. 그동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용들의 전투 패턴은 다 보여준 것 같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멜타스의 눈앞에 제대로 서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채로운 종족을 가진 네 명은 모두 용의 맹격을 그대로 받아내느라 기진맥진한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궤멸.
몇 번 위협적인 공격을 먹여 이멜타스의 분신을 세 마리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승기를 잡았다고 할 만큼의 성과는 없었다.
그래서 아스티나의 표정은 한없이 절망에 가까운 색채였다.
“7층엔 너보다 강한 용이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용왕까지 포함해 최소 셋이다. 게다가 그들은 보통 뭉쳐 다닌다. 나보다 약한 용들 또한 수두룩함은 말할 것도 없지.”
“그럴 수가…….”
“게다가 면회 시간 동안 죄수의 힘은 절반 이하로 제한된다. 용의 진정한 힘을 수치화하려면 지금 느끼는 막막함에 정확히 숫자 2를 곱하면 된다.”
설명을 들을수록 아스티나의 안색은 흙빛이 되어갔다.
용의 말은 옳았다. 지금의 수준으로 7층에 떨어졌다간 무시무시한 용들의 만찬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찬이란 단어를 쓰다니.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군. 간식거리란 표현이 적당하다.”
내용은 차가웠으나 이멜타스의 어조엔 조롱이나 비아냥의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의 목적은 슈바인 스트링거의 동료들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으니.
망토가 엉망이 된 제르비어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너의 면회 시간이 곧 끝난다고 들었다. 다시 여기로 내려올 수는 없는 건가?”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는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용조차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제약이 걸려 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아래층은 위층의 죄수들에게 유린되었겠지.”
“그래서야 우리에겐 희망이 없지 않나?”
스물네 시간은 위협적인 강자를 거꾸러트릴 대비책을 세우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게다가 그 주인공이 용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이후에 남겨진 것은 자습과 복습이다. 훌륭한 학생이라면 교사가 부재중이더라도 자기 몫을 챙길 수 있어야겠지.”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이해하진 못해도 분위기를 읽는 것만큼은 뛰어난 것이 구미호 소년 캉이다.
다른 셋과 달리 캉이는 타고난 맷집이 워낙에 뛰어났으며 이멜타스와의 훈련 또한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제법 정도 들었다.
“그럼 이제 영영 못 보는 거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캉이는 사실 감옥을 오르며 만나는 죄수들과 자신은 왜 다른 걸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정신적으로 아직 유년기에 불과한 이 어린 구미호에게 있어 특별하다는 자부심과 특이하다는 자책감은 종이 한 끝 차이였다.
그런 와중에 인간으로 변신하는 용을 만났다.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너희가 충분히 강해져서 용왕의 추적을 떨쳐낼 정도까지 성취를 이뤄낸다면…… 7층 천공섬에서 내 본체를 만날 수 있겠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말하며 이멜타스는 아스티나와 캉이 둘을 가리켰다.
“너희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감옥에서 죄수는 힘을 키울 수 없다. 입소 당시의 능력과 기술 그대로 지내야 하지.”
“들어본 적 있어.”
“하지만 그건 죄수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 감옥에서 태어난 너희 둘은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거다. 충분한 시간과 적당한 가르침이 주어진다면 너희는 지금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이멜타스는 하루 동안 느낀 점을 허심탄회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 첨삭 대상은 마검사인 아스티나 류.
“아스티나. 너는 두 가지 상극의 기술 체계에서 마법을 주종목으로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싸울 때 여전히 생각이 많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지만 지금은 바로 그 시간이 부족한 시점이지. 그러니 몸이 더 고생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구미호인 캉이였다.
“캉이. 너는 수많은 환수 중에서 감히 용에게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인 구미호다. 우리 환수들은 천천히 성체가 되는 인간과 달리 극적인 단계를 거쳐 껍질을 벗듯 각성할 수 있지. 네 각성은 거의 끝 단계에 다다랐다. 나와는 놀이를 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뛰어놀았다만, 저 위의 용들과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거야.”
“음, 그건 즐겁지 않을 것 같은데, 형아?”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너는 동료들과 오랫동안 함께 놀고 싶지 않으냐? 그러기 위해서 당연하지만 그들이 사라져선 곤란하겠지. 놀이와 전투를 구분하고, 네게 소중한 놀이 상대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도움이 될 거야.”
“어, 어려운데. 그래도 머리에 꼭꼭 담아서 외우고 다닐게!”
아스티나는 캉이와 대화하는 이멜타스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살벌한 싸움 속에서도 느꼈지만 이 회색 용은 캉이를 유독 신경 쓰고 있었다. 말투 또한 미묘하게 너그럽고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같은 환수에서의 동질감이나 어린 개체를 대하는 성체의 너그러움인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했지만.
이멜타스의 조언은 다른 둘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졌다.
“마왕 제르비어스. 너는 앞선 둘과 달리 죄수이기 때문에 본래 가진 힘 이상의 것을 탐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 타고난 성정이 진정한 힘을 억누르고 있는 게 보여. 그것을 융화시킬 방법을 빠른 시일 내에 찾지 못하면 스스로를 저주하게 될지 모른다.”
제르비어스는 용의 조언을 진지하게 들었다.
이미 참월의 마녀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장벽.
그것을 깨트리지 않으면 동료들에게 든든한 전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토니아. 위그드라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너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있던 곳에서도 세계수가 있었던 건가.”
“그래, 나는 세계수의 열매로 태어나는 요정이거든.”
“그렇군. 하지만 7층 천공섬의 위그드라실은 네가 태어난 세계수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식물이다. 슈바인 스트링거를 구출한 이후에는 요정으로서 네가 가진 지식이 큰 도움이 되겠지.”
이멜타스가 장광설을 마치자 또 한 번 안내의 메시지가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죄수 이멜타스의 면회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아스티나의 표정에 여전히 수심이 가득하자 이멜타스는 귓속말을 했다.
그 내용에 집중하던 아스티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런 억지가 먹힐까?”
“먹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슈바인도 너희들도 모두 끝장일 테니.”
이멜타스의 몸이 빛무리에 휘감기며 점차 희미해졌다.
용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랐으나 그는 적이 아니라 진정한 조력자였다. 저마다 고마움의 눈빛을 담아 본래의 층으로 복귀하는 그를 배웅했다.
아스티나의 입이 열렸다.
“토니아, 우리 모두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해?”
“최소 두 시간.”
“그럼 우선적으로 나를 먼저 회복시켜줘. 그리고 다른 친구들을 회복시키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삼십 분 정도 토니아의 요정술로 체력과 마력을 수혈받은 아스티나는 다른 셋을 두고 자리를 떴다.
그녀가 다다른 곳은 심판의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기실의 초입이었다.
공간을 확장한 결계의 시전자였기 때문에 몇 번의 걸음만으로도 아스티나는 목적지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야 한구석에는 불투명한 창이 떠올라 있었다.
[친구 슈바인 스트링거가 당신을 소환했습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이멜타스의 말에 따르면 슈바인은 용왕과 그의 수하인 광룡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고 있는 중이라 했다.
원하는 게 있는 만큼 용왕이 슈바인을 죽게 놔둘 일은 없을 것이며, 관건은 그의 정신이 광룡의 수작을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라고도 전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멘탈이 튼튼한 녀석이지만…… 용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으니 분명 이 순간에도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겠지?’
그러니 확실한 방법으로, 실패 없이 단 한 번의 구출 기회를 살려야 한다.
비장한 각오를 다진 아스티나가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태에 짓눌린 쥐! 듣고 있었지?”
잠시 후 그녀의 눈앞에 생글거리는 쥐가 튀어나왔다.
“굳이 본인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넬 필요는 없소만. 볼일이 끝났을 테니 냉큼 돌아가시오.”
“미안한데 우리 볼일은 이제 시작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네게 부탁을 좀 해야겠어.”
“부탁? 뭘 말이오?”
“이멜타스가 우리에게 숙제거리를 던져주고 갔거든. 그런데 그걸 도와줄 가정교사가 있으면 더 좋지 않겠어?”
교도관인 나태에 짓눌린 쥐는 영리한 존재다.
그래서 아스티나의 아리송한 말에 숨겨진 진의를 단박에 깨달았다.
“웃기는 소리 마시오! 나더러 당신들의 훈련 상대가 되어달라는 말 아니오? 그런 번거로운 짓을 왜…….”
예상했던 대로 교도관은 불같이 화를 냈다.
아스티나는 이멜타스가 귓속말로 전해준 카드를 꺼내기로 했다.
“우릴 도와주지 않으면 7층 교도관이 남은 시간 동안 틈만 나면 당신을 괴롭힐 거라고 했어. 교도관의 언약이니 이건 믿어도 된다던데.”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그렇게 말했다고? 무엄한……. 독립 개체인 교도관들끼리 이런 겁박을 저지른단 말이오!”
“도와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성장은 더뎌질 거고, 이 대기실은 계속 시끄러울 걸. 빨리 나와 친구들을 강하게 단련시켜줘서 치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
잠자코 듣고 있던 0층 교도관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 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본인은 교도관이 되기 이전에도 푸르가토리움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오. 그대들을 훈련시키는 도중에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서 죽여버릴 수도 있소만?”
아스티나는 서슬 퍼런 그 경고가 향한 곳이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태에 짓눌린 쥐는 자신보다 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경고를 하는 중이었다.
“어디까지나 이건 그대들이 신청한 거요. 그러니 본인이 힘 조절을 잘못해 그대 중 누군가를 소멸시키는 일이 일어나도 그건 어디까지나 훈련 도중 일어날 수 있는 변수 중 하나. 말해보시오, 교도관장! 이것을 보장할 테요?”
그러자 이내 0층 교도관에게만 들리는 답변이 전달돼 왔다.
아주 잠깐의 공백.
아스티나는 생쥐가 기지개를 켤 때 꼬리가 바짝 솟아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스티나 류, 묻겠소이다. 어느 정도로 강해지길 바라시오?”
“전력을 다한 용의 포위로부터 우리 넷이 무사히 몸을 빼낼 수 있을 수준까지.”
“그에 필요한 기간은 얼마 정도로 예상하시오?”
“적어도 두 달은…….”
“아니. 그렇게 긴 시간은 내가 용납할 수 없소이다. 이 대기실에선 잠을 잘 필요도, 무언가를 먹을 필요도 없지. 휴식 시간 따위 없는 지옥훈련을 보여드리리다. 지금껏 쌓인 이 교도관의 분노를 감당해 보시오.”
*
나태에 짓눌린 쥐의 경고는 허언이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예상한 시간은 두 달.
하지만 대기실의 교도관이 진정한 힘을 드러냈을 때의 수준은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훈련은 훨씬 짧은 시간 내에 끝났다.
아스티나와 친구들은 그 시간 동안 몇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맛보았고, 가까스로 그 파도를 넘어서면서 몇 꺼풀이나 한계를 초월했다.
아스티나의 경지는 8서클 마법사에 올랐으며 캉이는 아홉 살의 외양에서 열두 살 정도까지 성장했다.
구미호의 형태로 변신해서 내뿜는 여우트림은 이제 드래곤 브레스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게 2주의 시간이 흐르고 약속의 때가 되었다.
“고마웠어, 나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갚을 필요 없소. 어서 7층으로 꺼져주는 것이 본인을 도와주는 것이오. 죄수와 5분 이상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거늘…… 그대들은 정말 지긋지긋하오!”
교도관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으나 아스티나는 만면에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나중에 또 놀자, 친구야!”
캉이가 냅다 달려와서 나태에 짓눌린 쥐를 껴안았다.
“이익! 누가 그대의 친구란 말이오!”
마법으로 포옹을 피하려 했으나 분신술을 구사할 수 있는 구미호에게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었다. 습격의 상대가 더 빨랐다.
그사이 키가 5센티는 더 커진 캉이였기에 교도관의 다리를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야 했다.
“우리가 떠나면 이제 심심해져서 어떡해?”
“떨어지시오. 본인은 심심해지고 싶어서 교도관이 된 몸. 7층에서 무시무시한 용들에게 목이나 씹히지 않도록 자신들의 안위나 걱정하시오.”
내용은 표독스러웠으나 교도관의 말투는 묘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 순간은 계속 만끽하고 싶었으나,
자신들에게 그럴 여유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셋을 세면 모두 소환 버튼을 누르는 거야. 하나.”
흑기사의 갑옷에 투구까지 착용한 아스티나가 모두에게 말했다.
“둘.”
훈련의 시간은 끝났으니 이제는 실전에서 그것을 시험해볼 차례다.
“셋.”
그렇게 아스티나 류, 제르비어스 폰타인, 캉이, 토니아는 0층 대기실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들은 7층 천공섬에 소환되었다.
“왔는가.”
조금의 당황도 없이,
용왕 게브라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듣자 하니 여기가 감옥의 분실물 창고라며? 우리 것을 되찾으러 왔다.”
엄격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
지상으로부터 5미터 위의 허공에서 뛰쳐나온 아스티나의 손에서 일섬이 내뿜어졌다.
그것이 해골 병사를 오랫동안 옭아맨 사슬을 잘라냈고,
찰그락.
그 사슬이 바닥에 떨어지는 마찰음이 격렬한 전투의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