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최후의 꼬리 (2)
0층 대기실은 죄수들의 다양한 크기를 고려하여 큼지막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죄를 짓고 들어오는 수감자들 중에는 거인족이나 대형 환수 등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회색 용이 심판의 문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아스티나는 공기의 압력이 달라졌다는 착각에 빠졌다.
용은 좁은 문을 통과하느라 짜증이 났는지 기다란 꼬리를 바닥에 내리쳤다.
“나는 이멜타스. 본체는 7층 천공섬에 있다. 지금은 면회의 권능을 써서 그림자 형태로 너희를 찾아온 것이다.”
“슈바인을 어떻게 알고 있어?”
느닷없이 나타난 회색 용은 외면하지 못할 이름을 꺼냈다.
“실제로 만난 시간은 몇 분 되지 않지. 하지만 난 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등반 순간을 기다리며 힘을 키워왔다.”
아스티나는 청룡패웅검을 겨눈 채 바짝 긴장했다.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마, 이멜타스. 위협이 될 거리에 들어서면 반격할 테니까.”
물론 상대를 제압할 자신은 조금도 없었다.
어쩌면 이 용의 비늘 하나를 몸에서 분리시키는 데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신화 속 생물이 주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어린 시절 마녀의 딸은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용 잡아본 적 있어?’
‘귀여운 우리 딸, 마법서고에서 뭘 들춰본 거니?’
‘신비동물학 사전! 그게 그림도 많고 재밌단 말야.’
‘용과 싸워본 적은 있지. 제국의 영토에 터를 잡은 용이 횡포를 부린다는 소식에 자매들과 함께 토벌에 나섰단다.’
‘토벌이 뭐야?’
‘겁을 줘서 내쫒는다는 거야.’
‘누가 이겼어? 엄마가 이겼어?’
‘용을 도망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 그런데 그걸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와 친한 자매들이 용과 싸우다가 크게 다쳤거든. 상대도 줄곧 우리가 괴롭히는 게 귀찮아서 서식지를 옮긴 것처럼 보였고.’
‘용이 그렇게 셌어?’
‘그래. 지치지도 않고 온갖 마법을 쓰는데다가 가죽은 어찌 그렇게도 질긴지. 아주 신물이 나는 상대였어. 네 아빠와 같이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겠네.’
‘헤에, 그 정도야?’
‘사랑하는 딸아, 혹여나 나중에 커서 진짜 용과 만나는 일이 있거든, 명심하렴. 어지간하면 덤빌 생각은 하지 마.’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물론 어린 딸에게 겁을 준 이유 중 절반은 장난이었을 것이다. 삼월초원에서 용을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아스티나는 어쩌면 마녀의 말에 약간의 과장도 없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당부를 어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 들었다.
‘미안해, 엄마. 덤비지 말라고 했는데.’
이멜타스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친구들을 물러서게 하고 바로 정면으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이미 왼손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마법진이 그 각오의 증명이었다.
용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적대 세력의 간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너의 추론은 타당하다. 그렇기에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도와줄 물건을 들고 왔다. 잠깐 형태를 변환할 테니 놀라지 말도록.”
회색 용의 전신이 잠시 빛나더니 거대한 체고가 스르륵 줄어들었다.
곧 아스티나의 눈 앞엔 우수에 찬 눈빛을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인간이었다면 열일곱에서 열아홉 정도 되었을까 싶은 외양이었다.
“폴리모프로군. 용의 특권 중 하나라고 들었다.”
언제든 채찍을 꺼내들 준비를 한 채 옆에 서 있는 제르비어스의 말이었다.
“너도 용을 처음 보는 거야?”
“그럴 수밖에. 내가 있던 세계에선 용이 오래전에 멸종했다고 들었거든. 저런 생물이 열 마리만 있었어도 마족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건 불가능했겠지.”
반면에 변신을 할 수 있는 존재를 처음 마주친 캉이의 눈은 번쩍번쩍 빛났다.
“엄청 신기해. 꼬리랑 날개가 사라지네? 나도 저럴 수 있었음 좋겠다.”
폴리모프를 완전히 마친 이멜타스는 품에 들고 있던 동그란 물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본 아스티나는 앞으로 튀어나가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어, 어떻게?”
이멜타스의 양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올라가 있는 것은 눈을 감은 채 잠든 것처럼 보이는 레나스의 머리였다.
“데려가도 좋다, 인간 여자.”
이멜타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스티나는 조심스럽게 허공섭물을 발휘해 레나스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레나스? 들리니?”
이름이 불리자 레나스의 속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기체의 수면 모드가 일시 해제됩니다.]
슬며시 눈을 뜬 레나스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익숙한 얼굴들을 알아보았다.
“관객님들이시군요. 그렇다는 건 7층 천공섬으로 모두 소환되신 상황이라고 판단해도 될까요?”
“아니. 여기는 0층 대기실이야. 머리 밑의 몸은 어디에 두고 이런 꼴이 되었어? 응?”
“저는 슈바인 관객님과 6층 만골사막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골제라 불리는 층장 바르한을 만나…….”
감정의 고저 없이 객관적 사실만을 읊음으로써 레나스는 지금껏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서술했다.
해골 군단이 세계수의 뿌리와 대치하고 있는 6층. 그리고 부유도에 둥지를 튼 용들이 즐비한 7층 천공섬의 이야기까지.
“그럼 저 이멜타스라는 용이 슈바인과 널 구해줬다는 게 사실이네?”
“회색 비늘을 가진 용이 저희의 도주를 도와주고 잘려나간 제 머리를 되찾아 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그 용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어 이멜타스를 바라보았다.
“다시 변신을 해서 증명을 해줘야 하나?”
“아니, 괜찮아. 의심해서 미안. 당신의 말을 믿겠어.”
하지만 레나스는 용왕 게브라둠의 비늘에 습격당한 이후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수면 모드로 접어들어 이후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히 그 설명은 이멜타스의 몫이 되었다.
“유감스럽지만 내가 세계수에 도착했을 때 슈바인 스트링거는 이미 용왕에게 붙잡혀간 뒤였다. 나는 이 자동인형의 머리에 심어진 마정석의 신호를 발견하고 회수한 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지.”
이후로 흘러나온 이야기는 모두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슈바인 스트링거가 불사의 해골 병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아직 소화해내기 힘든데, 무자비한 층장인 용왕이 납치했다는 소식이 곧바로 이어졌다.
“내가 있는 7층엔 광룡이라 불리는 미치광이 용이 있다. 용왕의 수하가 그자를 데리고 가는 걸 목격했지. 내 짐작대로라면 슈바인 스트링거의 육체뿐 아니라 그 정신 또한 고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스티나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런데 왜 소환에 응하지 말라는 거야? 당연히 그렇게 다급한 상황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슈바인을 용왕으로부터 빼와야…….”
쿠우우우우우우!
이멜타스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수직으로 뻗으며 가공할 압력을 방출했다.
교도관인 나태에 짓눌린 쥐를 제외한 모두가 뒷걸음질 쳐야 할 정도의 위협적인 살기였다.
드래곤 피어(Dragon Fear).
필멸자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최강종의 기술이었다.
공포 유발 효과를 넘어선 즉사 기술로 분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섬짓한 살기였다.
귀기 어린 눈빛의 이멜타스가 입을 열었다.
“약해빠진 인간아, 건방 떨지 마라. 지금의 수준으로 용왕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그대들은 십 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할 거다.”
“그래서? 개죽음 당할 테니 위험에 빠진 친구를 나몰라라 하며 이곳에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아스티나가 이를 악물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무극파천공으로 기막을 형성해 드래곤 피어에 대항해 보는 것이다.
뱀 앞에 선 개구리는 자연히 온몸이 마비된다.
하지만 분노라는 연료가 있다면 인간은 천적 앞에서도 한 발짝 내딛을 수가 있다.
이멜타스는 솔직히 감탄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채 되물었다.
“그렇게 화가 난 채로 덤볐다가 너희마저 용왕의 발톱 아래 다진 고기가 되면? 슈바인 스트링거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너희의 시체 앞에서 얼씨구나 고맙다며 춤이라도 출까?”
“이 빌어먹을 용이!”
청룡패웅검에서 검기가 뿜어져 나왔을 때, 아스티나는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는 토니아의 날갯짓을 느꼈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해졌다.
“진정해, 아스티나. 저 용은 일부러 너를 도발하고 있는 거야. 일종의 시험처럼 보여.”
“시험?”
그러고보니 이멜타스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수준으로’ 용왕 앞에 나서면 죽음뿐이라고.
바꿔 말하면 용왕을 상대할 수준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는 뜻이다.
“구출은 의욕만으로 이뤄지지 않아. 확실하게 작전을 세우고 힘을 키워야 하지.”
이멜타스가 드래곤 피어를 거두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게 허락된 면회의 시간은 이제 스물세 시간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너희들에게 용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철저하게 새겨주겠다. 슈바인 스트링거를 구출하려면 용의 브레스를 자유자재로 피하고 빈 틈을 노릴 수준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특훈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회이며 효과적인 대비책인지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아스티나에겐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며 우릴 도와주겠다는 거야? 슈바인의 목숨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우리에겐 강해져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용이 층장의 분노를 감당하면서까지 이렇게 나서는 이유가 궁금했다.
“너희 인간들은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더군. 독존자인 용에게 그런 개념은 없다.”
친구를 위해서는 아니다.
친구라 할 수도 없다.
대신에 이멜타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 너희를 도우려는 것이다. 이것은 용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같은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한 상태라서일까.
아스티나는 상대의 말보다 눈빛에서 이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시간을 아껴야 하니 바로 시작을…….”
“잠깐! 누구 마음대로 본 교도관이 관장하는 곳에서 특훈이니 마니 떠드는 것입니까.”
드디어 앓던 이가 빠지겠구나 싶던 교도관은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격앙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죄수들끼리 누가 누구를 도와주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 장소가 대기실이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대들에겐 내 안식을 방해할 권리가 없소!”
나태에 짓눌린 쥐는 ‘다 필요 없고 혼자 있고 싶으니 모두 꺼져라’는 요지의 발언을 길게 늘여서 했다.
아스티나가 교도관을 설득해 보려 나섰다.
“상황을 못 들었어? 지금 우리가 슈바인 옆으로 소환되면 거긴 용왕의 둥지 한복판이라잖아.”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오. 본인이 교도관장에게 전달받은 사항은 당신들이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에게 소환되어 돌아갈 때까지’ 신병을 받아달라는 거였소. 그리고 그 유통기한은 이제 끝났소이다.”
논리정연한 말에 반박하고 나선 것은 이멜타스였다.
“대기실의 교도관이여, 미안하지만 그대에겐 이 일을 방해할 권한이 없소. 나는 감옥이 인정한 적법한 절차로 ‘위그드라실의 이파리’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여길 난장판으로 만드는 걸 보고만 있으란 거요?”
“차라리 우리에게 협조하는 게 빠를걸. 이렇게 방해하고 나서면 그대가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점이 늦어질 뿐이니까.”
“으이이이익!”
결국 문제는 대기실의 교도관으로서 주어진 권한이 다섯 명 모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스티나와 캉이는 죄수가 아니었고, 다른 셋은 죄수였으나 이미 배정이 끝난 상태였기에.
결국 얼굴이 벌개진 교도관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두툼한 귀마개를 꽂더니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여기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필요하겠어.”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복잡한 술식을 가동시켰고, 층간 구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대기실을 축구장 이상의 넓이로 확장시켰다.
모두를 내려다보던 심판의 문은 이제 골키퍼와 상대편 골문의 거리만큼 까마득히 멀어졌다.
쿠구구구구궁.
다시 용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멜타스가 선포했다.
“명심해라. 나는 너희를 죽일 기세로 전력을 다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막아 보라.”
“좋아. 용 한 마리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보겠어.”
아스티나가 흑기사의 갑옷을 몸에 두르며 비장하게 외쳤다.
그러자 회색 비늘을 가진 용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가 감당해야 할 용이 한 마리라고 한 적은 없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아스티나를 내려다보는 용이 여섯 마리로 늘어났다.
동일한 몸짓으로 기세를 내뿜는 여섯 마리의 용.
그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며 브레스를 내뿜을 준비를 했다.
“어디 재주껏 살아남아 보라, 나약한 인간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