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최후의 꼬리 (1)
마인드 스포일러가 보여주는 환상은 지독했다.
나는 이 세계에서 믿었던 친구들에게 수 차례 배신당했다.
“용사야, 부탁이다. 내가 더 강해지려면 그 기원검이 필요해.”
제르비어스의 가슴을 17차례 베었고,
“왜 나를 못 믿는 거야? 내 복수에 동참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스티나의 흑기사 갑옷을 45차례 꿰뚫었다.
“달아나지 마, 슈바인 스트링거. 네가 가진 기원검의 파편은 내 반쪽인 크로톤의 유산이기도 하잖아.”
토니아의 간곡한 부탁이 매번 내 폐부를 찔렀고,
“형아, 내 엄마가 이 층에 있다는 얘기는 왜 안 해줬어? 그냥 용들한테 그걸 내주고 우리 엄마 찾으러 가면 안 돼?”
캉이의 절절한 애원은 들을 때마다 심장을 덜컹이게 만들었다.
나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채 매번 발악해야 했다.
“전부 꺼져버려!”
막대한 내공을 실어 검을 휘두르면 나를 둘러싼 세계엔 격한 균열이 일어났다.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용왕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나.
고문 대상을 앞에 두고 변태처럼 흡족해하는 메르킨.
내 소환 부탁을 받고 허공에서 튀어나오는 친구들.
지난 회차에서의 또렷했던 기억들이 새 회차가 시작되면 어렴풋한 꿈결처럼 바스라져 갔다. 손바닥으로 호숫물을 움켜잡을 수 없는 것처럼 내 옆을 빠져나가 버렸다.
메르킨은 매번 내가 구출되는 시나리오를 갈아엎으며 새로운 시도를 했다. 비밀 함정을 발동시키기 위해 방 안의 모든 버튼을 눌러보는 도적의 손길처럼.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았나. 정말이지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정신력을 지녔군.”
메르킨의 웃음소리는 정기적으로 내 뇌리에 스며들었다.
그때마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적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녀석인지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등반죄수. 지금까지 내가 몇 명의 인간들 심리를 헤집어 놓았다고 생각하는가. 굴복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라고 믿고 있겠지? 틀렸다. 이건 승부가 아니야. 내가 정확히 원하는 형태로 너를 굴복시키는 행위예술이다.”
메르킨의 음험하고 징그러운 선포는 단박에 무시해주면 그만이었으나 상황은 점점 내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처음엔 ‘이것이 함정이며 내 친구들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메르킨이 아무리 용이라 할지라도 친구들과 내가 감옥을 오르며 보낸 사소한 사건들과 대화까지 모두 알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벌어지는 실수들이 매번 나를 각성시켰다.
폭력을 싫어하는 제르비어스가 용들을 다 때려잡자고 말한다거나, 설공에 대한 증오를 잊었다는 듯 구는 아스티나처럼 말이다.
‘녀석이 점점 나에 대해 학습하고 있어.’
그런데 내 친구들의 언행이나 표정, 패턴들이 진짜처럼 가다듬어지고 있었다. 실패에서 수정점을 배우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것이 내 두려움의 원천이었다.
이건 퍼즐 조각으로 빚어진 세계에서 빈칸을 찾아내면 내가 이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처음엔 이곳저곳에서 보이던 빈칸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러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최후의 빈칸마저 온전한 퍼즐 조각으로 채워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만다면…….
그때의 나는 메르킨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형아. 빨리 도망쳐야지, 뭐해?”
멍하니 서 있는 내 등을 캉이가 떠민다. 정확히 녀석이 가진 힘, 녀석이 할 법한 동작으로.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 반대다.
현실이 꿈이라 믿고 꿈에서 깨기 위해 빌딩에서 몸을 던진 어떤 영화 속 여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이 가짜 세계를 벗어나서 진짜로 나를 구하러 달려온 친구들을 만났을 때…….’
그때 친구들의 목에 검을 휘두르면 어떡하지?
*
메르킨이 마인드 스포일러의 흡착판을 머리에서 떼어놓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초조하게 지켜보던 용왕 게브라둠이 반색하며 외쳤다.
“끝났나?”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이 등반죄수의 자아정체감이 워낙에 강력해서 생각보다 긴 시간이 소요되겠군요. 잠시만 휴식을 가진 뒤 작업을 재개하겠습니다.”
용왕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균열이 갔다.
하지만 재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건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는 문제였다.
“끄응.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나.”
“이제 막 녀석의 정신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금이 간 곳에 독을 흘려 넣기만 하면 되는 문제지요.”
“만에 하나 실패하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태도가 한없이 자비로웠던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용왕은 다시 팔짱을 끼며 시선을 돌렸으나 메르킨은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더 꺼냈다.
“간언을 하나 올리고 싶습니다, 용왕이시여.”
“무엇이지?”
“용린병을 열 기만 이 죄수의 주변에 배치해두는 게 어떻습니까.”
“그 녀석의 상상 속에서 반복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두려운 것이냐. 다른 층에 있는 동료들이 구하러 올 거라고? 허황된 일처럼 들리는데. 용들조차 다른 층의 존재를 소환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공간 주머니를 가진 죄수 아닙니까. 현실로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 해도 이 녀석과 비슷한 수준이겠지. 전부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용왕은 자신의 힘에 대한 맹신을 드러냈고 거기에 반박할 수 있는 용은 이 7층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메르킨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바로 그것이 걱정입니다. 이 죄수의 동료들이 나타났을 때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제게 넘겨주십시오. 어쩌면 일이 더 수월하게 흘러갈지 모르니까요.”
“……알았다. 그렇게 하지.”
용왕이 혀를 한 번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의 그림자가 바닥 전체에 퍼지며 넓어지더니 매혹의 어둠 속에서 열 기의 용린병이 몸을 일으켰다.
똑같은 외양을 가진 용린병이 원형을 그린 채 슈바인 스트링거와 광룡 메르킨 주변에 도열했다.
그때, 누군가가 드래곤 레어의 입구에 발을 디뎠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건장한 사내였다.
용린병의 자세가 전투태세로 바뀌며 일제히 그 주인공을 향했으나 용왕의 손짓 한 번에 다시 차렷 자세로 돌아왔다.
“폭룡 발카드, 부름을 받고 날아왔습니다.”
“네 손에 이멜타스의 수급이 들려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그 반푼이 용이 살아 있었다는 보고는 진작 받았다. 이를 어떻게 책임질 텐가, 발카드.”
“……죄송합니다. 녀석이 설마 세계수에 출입할 수 있는 재주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뇌룡과 함께 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녀석을 붙잡아 와라. 내 오랜 비원이 이뤄지려는 순간에 하필 그 반푼이가 행동을 재개한 것이 마음에 걸려.”
“그리하겠습니다.”
폭룡 발카드와 뇌룡 간다르바가 레어를 떠났다.
용체화를 마친 두 용이 부유도를 떠나는 모습을 살펴보던 용왕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7층 천공섬의 명운을 바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용왕 게브라둠은 그 바람을 어떻게 해서든 순풍으로 만들겠다 다짐했다.
그녀의 등엔 꺾일 줄 모르는 날개가 있다.
*
눈을 감고 있었으나 아스티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어떤 징조가 드디어 눈앞에 떠올랐다는 것을.
[친구 슈바인 스트링거가 당신을 소환했습니다.]
[소환 장소는 푸르가토리움 7층 천공섬입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스티나의 주변에서도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왔다! 아스티나, 너에게도 보이나?”
“누나! 이거, 형아가 보내는 거 맞지? 제트카이저에 올라탔을 때처럼 누르면 되는 거지?”
“나, 나는 이런 게 처음이야. 요정술로도 분석이 안 돼. 눈이 이상해진 건가?”
우락부락한 마왕과 들뜬 구미호 소년, 그리고 패닉에 빠지려는 페어리를 붙잡은 건 아스티나의 나직한 한 마디였다.
“다들 입 다물어. 생각 좀 해보게.”
아스티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0층 대기실의 복도가 싸늘히 얼어붙었다.
눈앞에 떠오른 [예/아니오] 버튼을 노려보며 아스티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상하지 않아? 슈바인과 우리가 작별한 건 5층이었어. 상식적으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원래라면 6층에 있어야 맞잖아.”
“어, 그런가? 그건 생각 못 했는데.”
“24시간 안에 혼자서 한 층의 공략을 끝냈다고? 그것부터가 이상한데 우리에게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어. 일언반구 연락이 없다가 대뜸 소환을 청한다는 건…… 예감이 좋지 않아.”
제르비어스는 아스티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수하와 목숨 걸고 맞붙어보기도 했고, 한편이 되어 전장에서 싸우기도 했다.
천마와 마녀의 딸이다.
그녀의 입에서 ‘예감이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면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 마왕의 판단이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거냐?”
“아직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아까부터 내 메시지에는 응답이 오질 않고 있어. 부재중이라는 표시만 돼 있고.”
소환을 청한 대상이 부재중이라는 기묘한 상황.
아스티나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관찰자가 벌컥 성을 냈다.
“지금 대체 뭣들 하시는 겁니까. 당신들의 대장이 부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냉큼 그 엉덩이를 떼고 어서 저의 보금자리에서 사라져 주십시오.”
무려 24시간 동안 안락한 휴식 시간을 방해받은 교도관 ‘나태에 짓눌린 쥐’의 볼멘소리였다.
아스티나는 그 생쥐를 한 번 슬쩍 본 다음 고개를 돌림으로써 푸르가토리움의 교도관으로부터 또 하나의 미움 스탯을 쌓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런 아스티나조차 고민을 잠시 접어두게 만드는 굉음이 들려왔다.
구우우우우우웅!
“무슨 소리지?”
잔뜩 예민해져 있었기에 아스티나뿐 아니라 대기실의 모든 존재들이 우왕좌왕했다.
그것은 나태에 짓눌린 쥐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로운 죄수가 입소한 건가?”
교도관은 재빨리 대기실 전체에 탐지 마법을 둘러보았다.
대기실의 감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새로운 죄수가 예고도 없이 찾아올 리도 없다.
탐지 마법이 이상 현상을 발견한 곳은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심판의 문이…… 열리고 있어?”
탓 하고 몸을 솟구친 생쥐가 총탄처럼 대기실의 복도를 날아갔다. 지금껏 관찰해 온 모습과는 딴판인 태도에 아스티나와 동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그들은 곧 나태에 짓눌린 쥐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교도관은 천천히 열리고 있는 심판의 문 앞에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제가 부임한 이래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심판의 문이 열리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하나였다.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온 죄수가 층을 배정받아 넘어갈 때.
판정할 죄수가 앞에 서 있지도 않은데 이 육중하고 거대한 문이 움직인 적은 여지껏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
[7층의 죄수가 0층 대기실에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생쥐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면회라고요? 대체 누가 대기실에 면회를 신청한다는…….”
이윽고 심판의 문이 완전히 열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모두는 깨달았다.
문 저편의 죄수는 이 문이 완전히 열리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워낙에 거대한 덩치를 소유한 존재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대들이 슈바인 스트링거의 친구들인가?”
회색 비늘을 가진 용의 머리가 아스티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곡히 충고하겠다. 절대 그 소환에 응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