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용의 본질 (2)
“기원검처럼 대단한 보물을 내가 품에 지니고 다닐 리 없잖아. 당연히 6층 사막 깊숙한 곳에 파묻어두고 왔다.”
마왕 제르비어스와 2층 삼월초원에 누워 별주부전에 대해 이야기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까마득히 옛날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사이 다섯 층을 더 지나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용왕의 명을 받아 육지에 사는 토끼의 간을 빼 오기 위해 속임수를 쓴 거북이.
그 거북이에게 속았으나 거꾸로 용왕에게 간을 빼놓고 왔다고 속임수를 써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되는 토끼의 이야기.
‘그딴 이야기가 있단 말이냐. 그 용왕이란 놈 몇 대 패주고 싶군. 명색이 왕이란 자가 지 몸뚱이 아프다고 부하에게 대리 살육을 시키다니. 군주로서 정신머리가 틀려먹었다.’
제르비어스는 이렇게 말하며 나름의 작품 평을 남겼었다.
확실히 설화에 나오는 용왕은 토끼의 임기응변에 홀랑 속아 넘어갈 정도로 눈앞이 흐린 군주였다.
하지만 내 눈앞의 용왕은 그렇게 아둔한 존재가 아니었다.
음험하고 교활한 용족의 절대자였다.
“내가 그런 단순한 속임수에 속을 것 같은가? 네가 세계수 앞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물건을 넣었다가 빼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는걸.”
쳇. 구름 속에 숨은 상태로도 전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설령 그걸 보지 못했더라도 내 눈을 속일 순 없다. 수왕 르팔타커스의 유해와 접촉해 그를 배후령 삼아 감옥을 오르는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게다가 교도관장의 총애까지 받고 있다지? 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 덫은 준비돼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 떠는 짓은 관두기로 했다.
“너도 기원검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어떻게든 핥아먹겠다고 덤비는 그저 그런 녀석들 중 하나인가 보군. 그런데 그게 얼마나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인지는 모르나 봐? 자칫하면 다신 윤회도 할 수 없도록 영혼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거든.”
4층의 교도관 그룬덴 사니릭투스.
그는 기원검의 파편을 스스로 육체에 받아들임으로써 오토마타 레나스의 죄를 대속하려 했다. 그리고 아끼는 인형을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대신에 우주의 역사로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5층의 층장 크로톤.
본래 페어리였던 그 거인은 세상을 향한 증오를 품고 들어와 감옥 안에서 폭발시켰고, 기원검의 파편이 그 도화선이었다. 녀석이 치른 대가도 사니릭투스와 동일했다.
기원검의 파편을 탐했던 자의 최후는 존재로서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이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용왕은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후후후. 지고의 시간을 살아가는 용을 겁주려는 것인가. 너는 순순히 기원검을 토해 놓기만 하면 된다. 강탈자가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박탈자가 신경 쓸 바 아니지.”
내 신체를 포박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왕 게브라둠은 절대적 지위를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바로 그 점을 짓뭉개주고 싶었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내가 가진 그 무엇 하나 빼앗아갈 수 없을 거다. 뭐, 지금처럼 해골 상태가 아니었다면 내 머리카락 한 터럭 정돈 내줄 수 있었겠지만.”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그래.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네가 모르는 사실 한 가지를 알려주는 것이 예의겠지?”
용왕이 내 눈앞에서 오른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마치 매니큐어가 칠해진 것처럼 검게 물들여진 손톱에서 흑색의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오른팔 전체가 파충류의 비늘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음습하고도 파괴적인 기운이 일점에 응집되고 있다.
“이 층에 떠 있는 부유섬에는 열다섯 마리의 용이 형을 살고 있다. 오직 내게 복종을 맹세한 용에게만 생존권이 허락되어 있지. 나는 달콤한 유혹도, 상대를 기만하는 속임수도 사용하지 않아. 오직 힘으로 짓눌렀을 뿐이다.”
여인의 손에 돋아난 무시무시한 용의 발톱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우주 전체에서 용처럼 튼튼한 종족도 드물지. 네가 원한다면 그 어떤 용도 버티지 못했던 다양한 고문 방법을 선사할 용의가 있다.”
파지지직.
[용사의 신체에 용족의 저주가 침투합니다.]
용왕의 발톱이 내 척추뼈에 닿자 전신이 격하게 진동하면서 무시무시한 통증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잇!”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불사자의 축복이 용족의 저주로부터 용사의 신체를 보호합니다.]
[용사가 HP 6,5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즉사 수준의 대미지가 아니므로 피해량이 0으로 무효화 됩니다.]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 나가는 것처럼 용왕의 발톱이 뒤로 밀려났다.
“어떻게?”
처음으로 용왕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사자의 축복이 발동하는 순간 통증은 꿈속에서의 그것처럼 아스라이 휘발되었다.
나는 제르비어스가 펼친 폭렬마왕의 저주도 며칠 동안이나 제정신으로 버틴 몸이다. 그런데 이번엔 대단한 방탄복까지 입혀진 상태랄까.
“헤헷. 말했잖아. 내게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거라고. 더 해 봐라. 두 번째부턴 미약한 신음소리도 내지 않아 줄 테니까.”
나를 해골 병사로 만들어버린 골제 바르한에게 달려가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엔 내게 피할 수 없는 거래를 위해서 이런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용왕과의 대면을 예상해서 이런 조치를 취해 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그 뒤로도 용왕은 한참동안이나 여러 색깔로 발톱을 물들여가며 내 해골 신체를 유린하려 들었다.
“고문의 근본은 바로 독(毒)이지. 그리고 용은 모든 파충류의 제왕이다.”
[용사가 HP 3,7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즉사 수준의 대미지가 아니므로 피해량이 0으로 무효화 됩니다.]
“뼈만 남았다 해서 과연 녹지 않을 수 있을까.”
[용사가 HP 8,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즉사 수준의 대미지가 아니므로 피해량이 0으로 무효화 됩니다.]
“너의 생기 자체를 빨아들이겠다.”
[용사가 HP 6,620의 피해를…….]
하지만 맹독도, 유황 냄새나는 산성 공격도, 흡혈의 언령조차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죽었기에 역설적으로 죽지 못하는 해골 병사에게 통증을 주는 고문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칫 이성을 잃어 나를 일격에 즉사시킬 공격을 퍼붓게 되면 용왕의 입장에선 뼈아픈 실책이 된다.
내 배를 가르는 순간 황금알은 사라져 버린다.
“약 오르냐, 게브라둠? 이제 슬슬 사람…… 아니 해골을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드나?”
양팔을 모두 용린화 시켰던 여인이 본래대로 되돌아오며 서늘하게 웃었다.
“좋아. 나는 이 시점에서 백기를 들도록 하지.”
마치 항복이라는 듯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용왕이었으나 나는 웃지 못했다. 거꾸로 본격적으로 긴장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교도관장은 퀘스트 실패 시 내가 받을 페널티 칸에 ‘정신붕괴’라는 네 글자를 써두었다.
이렇게 물리적인 고문으로 끝날 일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용왕의 표정에선 아직 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
“간다르바.”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몇 초도 흐르지 않아 아름다운 미청년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순간이동을 해 온 미청년의 정체는 뇌전 결계로 나와 레나스를 괴롭힌 간다르바였다.
“부르셨습니까, 용왕이시여.”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겼다. 네가 메르킨을 좀 데려와야겠어.”
“……광룡(狂龍)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간다르바의 아름다운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악취미를 가진 용입니다. 그가 건드려서 회복불가의 정신질환에 걸린 동족이 둘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용왕께서도 유폐령을 내리신…….”
“오늘부로 유폐령을 철회한다고 전해라. 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도 덧붙이고.”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간다르바가 사라지려고 할 때, 용왕이 손짓으로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 이멜타스는 어찌 되었지? 사로잡았나.”
“놓쳤습니다. 이전보다 분신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일취월장했더군요. 현재 발카드와 다른 동족 둘이 함께 뒤쫓고 있습니다.”
“내 기억으론 녀석의 심장을 빼내었다고 네가 보고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그 낙오룡이 아직까지 천공섬을 날아다닐 수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층에 떠 있는 수천의 부유도를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라. 만약 그 어떤 부유도에도 이멜타스의 레어가 없는 걸로 밝혀지면…… 녀석이 세계수에 접촉하는 방법을 알아낸 걸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너와 발카드도 무사하긴 어려울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
질겁한 간다르바는 허겁지겁 사라졌다.
워낙 눈치 보지 않고 세계의 정점으로 지내던 용들이라서일까. 폴리모프한 이들의 표정엔 포커페이스란 게 없는 모양이었다. 공포의 감정도 그대로 드러난다.
‘감이 좋지 않아. 간다르바가 두려워한 건 용왕의 패악질이 아닌 느낌이었어. 녀석이 데리러 간 광룡이라는 놈의 수작질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심리에서 나온 거다.’
광룡이라니.
용의 앞에 미칠 광(狂)이 붙은 것부터 불길한데, 그 용이 도착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게브라둠의 상기된 표정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벌써부터 그렇게 겁먹지 마. 메르킨이 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녀석의 레어는 변방에 있는 데다가 순간이동 마법을 구사하지 못하거든.”
“용들은 전부 번쩍번쩍하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용의 날개는 장식품이 아니다. 땅으로 추락한 뱀에게 주어진 날개, 그것은 그 자체로 비행과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부속품이지. 즉, 순간이동의 권능은 날개에서 나온다고 보면 된다.”
“그 말인즉슨 광룡 메르킨에겐 날개가 없다는 뜻인가?”
“원래부터 없던 건 아니야. 동족을 미쳐버리게 만든 죄의 대가로 내가 손수 잘라버렸거든.”
용왕은 내 눈앞에서 검지와 중지를 편 다음 두 손가락을 한 번 맞부딪혔다. 용의 날개를 잘라버렸다는 무시무시한 발언과는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동작이었다.
“용린병.”
그녀가 손짓하자 저벅저벅 걸어온 용린병이 의자 형태로 변화했다.
용왕이 거기에 다리를 꼬고 앉자 나와 그녀의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슈바인 스트링거, 용의 본질을 아는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날개 달린 파충류 새끼들.”
“약삭빠르군. 하지만 그거야 드레이크나 와이번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각 우주에 존재하는 신화 속 환수로서 태어난 용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특질을 아느냐는 뜻이었다.”
적당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내가 보아온 용은 ‘실제’가 아니었다. 지구에 용이 서식했던 적도 없었다.
내가 게임 속에서 상대해 온 용은 퇴치해야 할 보스 몬스터. 데이터로 만들어진 가짜들이었으니까.
상대의 입에서 대답이 나올 기미가 없자,
용왕은 스스로 답을 들려주었다.
“용의 본질은 ‘질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