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용의 본질 (1)
“레에나아스!”
오토마타 소녀의 단발머리가 낭창하게 찰랑이며 추락하고 있었다. 머리가 싹둑 잘려나갔다.
보통의 생물이라면 즉사라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레나스는 생물이 아니다.
이대로 허망하게 잃을 순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뻗으며 내공을 불러일으켰다.
[스킬 허공섭물 Lv. 7이 비활성화됩니다.]
[친구 아스티나 류와 같은 층에 있지 않습니다.]
욕지거리가 목끝을 타고 올라왔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킬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니까.
내 신체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레나스의 부품들은 여전히 가동되고 있었다.
[오토마타의 머리가 잘려나갔습니다.]
[연금무장술의 컨트롤 유닛을 소실했습니다. 자동주행 기능을 유지합니다.]
오토마타의 비행 슈트가 부스터를 약화시키며 일종의 절전 모드에 들어섰다. 가까워지던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풍경이 멈춘 듯 고정되었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부유하고 있을 때,
“사냥감의 날개를 꺾어놓는 순간은 언제나 짜릿하지.”
구름 아래에서 용왕 게브라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막 너머에서 느껴지는 거룡의 위압감은 여전했다.
나는 아직 녀석의 본체를 구경하지도 못했다. 방금 전에 레나스의 목을 정밀 타격해서 절단한 수단이 무엇인지도 미지수다.
‘제 머리가 코어로부터 분리된 채 가동할 수 있는 시간은 3분 45초에 불과합니다.’
만철도시에서 레나스와 맞붙어서 승리한 뒤 그녀의 머리를 떼어냈을 때 내가 들은 이야기다.
구름 아래로 떨어져버린 머리를 어떻게 되찾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그때, 7층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또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포기하지 마라, 등반죄수! 용왕은 세계수에 접촉할 수 없다. 이리로 넘어오기만 한다면 그대는 무사할 수 있다!”
아무래도 침입자를 밀어내는 무형의 결계나 장막이 세계수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멈춰선 지점이 바로 그 지척이라는 소리였다.
문제는 세계수에서 뻗어나온 가지들 중 가장 가까운 지점보다 용왕과의 거리가 더욱 가깝다는 점이었다.
“호오, 도망치게 놔둘 것 같은가.”
용왕의 그림자에서 다시 한 번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미리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간신히 그 궤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엔 내 비행을 유지하고 있는 레나스의 몸체를 절단내려 하고 있다.
나는 부메랑처럼 날아오는 흉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오토마타의 금속 접합부에 손을 올렸다.
“아이템 수납.”
관통 직전에 목표물이 사라지자 용왕의 투척무기는 내 어깨 위를 스치면서 날아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은 반원 형태의 납작한 금속처럼 보였다. 색깔은 흑요석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비늘이다. 녀석은 비늘을 뽑아 던지고 있어.’
한 차례 공격을 피해냈으나 내 해골 몸뚱아리는 무력하게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제 발로 내 아가리를 향해 들어와 주겠다는 건가?”
용왕의 그림자에서 턱주가리 부분이 쩍 벌려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걸 보며 히죽 웃었다.
“아니다, 이 새끼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
내가 싸워온 방식은 언제나 그러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임기응변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인벤토리를 연다.
잘 깎인 서까래처럼 보이는 통나무 하나를 소환했다. 3층에서 폭주 상태의 캉이에게 사용했던 대수림의 통나무였다.
해골 발바닥이 통나무에 내려서자마자 거침없이 내달렸다.
[친구 올쿠레 켄타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천년명마의 질주 Lv. 4]
가뿐하게 통나무 위를 질주하다 끄트머리에서 도약한다. 그리고 포물선이 낙하를 그리기 시작할 때 또 하나의 통나무를 소환했다.
단 한순간의 실수도, 판단 미스도 용납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곡예였다.
용왕은 곡예에 감탄하는 대신 이번엔 수십 개의 비늘을 발사해 왔다.
핑! 피이잉!
“크윽!”
닿자마자 통나무를 볼품없는 장작더미로 바꿔버리는 파괴력이었다. 뒤로 튕겨 나가는 나는 양팔을 물속에서처럼 허우적대고 있었다.
“더 보여줄 것은 없나?”
용왕의 조롱이 비늘보다 빠르게 날아왔다.
있다, 이 자식아.
이제부터는 미지의 영역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보이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는 미친 짓을 해보기로 했다.
“이야아앗!”
나는 양손으로 내 두개골을 단단히 붙잡은 뒤 뚝 하고 떼어냈다.
이 상황에서 믿을 건 오래전 비르카와 나눴던 대화뿐이었다.
‘비르카, 너 말이야. 툭하면 사지가 분리되는데 네 뼈들은 뭘 중심으로 합체하는 거야?’
‘당연히 머리지. 대마도사의 마법 문장이 내 두개골 안쪽에 새겨져 있거든.’
화룡도의 스켈레톤과 내 신체구조가 동일하게 작동하길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는 힘껏 내 두개골을 세계수 쪽으로 힘차게 던졌다.
파아아아아앙!
1400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근력으로 던져진 해골 병사의 머리가 음속을 돌파하며 날아갔다.
용왕 게브라둠의 비늘이 내 척추와 골반을 쳐서 분쇄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
[친구 비르카 리케우톤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사자교령술(死者交靈術) 네크로맨시]
[연골봉합 Lv. 5]
수류탄의 파편처럼 사방팔방으로 날아간 내 팔다리.
그것이 강타자가 때린 야구공처럼 날아가던 두개골을 추적하며 빠르게 날아갔다.
척! 처척!
그렇게 부착과 탈착을 반복하며 나는 점점 세계수의 가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떠냐, 용왕! 잡아볼 수 있겠냐!”
저 멀리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의 화신체가 해골 병사의 파격적인 비행법에 넋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용왕은 침묵하고 있었고,
그것이 내게는 불길한 신호처럼 보였다.
“나는 세계수에 접촉할 수 없지. 그러나…….”
멀리 날아갔던 용왕의 비늘이 가공할 속도로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서로 결합하면서 한 가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내 비늘은 그 제약에 속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검은 비늘이 결합해 만들어진 인체 모양의 형상이 나를 앞질렀다.
목 위엔 이목구비가 없는 달걀 형태의 머리가 달려 있는 오싹한 모습.
매끈한 검은 피부에 한 쌍의 날개를 단 병사가 손을 뻗어왔다.
“잡아 와라, 용린병(龍鱗兵).”
용린병의 손바닥은 내 얼굴 전체를 감싸 쥘 만큼 거대했다.
녀석의 피부와 두개골이 접촉하자 거인에게 붙잡혔을 때보다 훨씬 강력한 악력이 나를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그 죄수를 놓아주어라, 게브라둠!”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의 애타는 비명이 마치 다른 행성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반면에 또렷하게 들려오는 것은 불길한 알람음.
띠링!
[돌발 퀘스트 #14 ‘천공의 사냥꾼’에 실패하였습니다.]
[당신은 세 용의 추격을 피해 위그드라실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부로 7층장 게브라둠의 권역에 들어갑니다.]
내 발악이 무위로 돌아감을 알리는 무정한 메시지만이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
그렇게 나는 용왕 게브라둠의 드래곤 레어로 끌려왔다.
그것은 드넓은 부유도 위에 지어진 모스크 양식의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주변을 알아볼 수 있었던 순간은 용린병이 나를 풀어주고 난 뒤부터였다.
철컥.
녀석이 손을 떼주었다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반구형 천장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사슬이 내 수갑에 연결돼 있었다.
사슬에 묻어 있는 먼지에 자연히 시선이 갔다. 아주 오랫동안 사용될 일이 없었던 물건이다.
“달걀 대가리, 너는 내가 반드시 맨주먹으로 부숴줄 거다. 알았냐?”
내 도발을 듣는 귀도, 협박을 받아칠 입도 없는 용린병은 태연하게 뒤로 물러나서 벽면에 등을 댄 채 섰다.
마치 태곳적부터 거기 서 있었던 조각상처럼.
짝짝짝짝.
“그래. 곧 죽어도 자존심만큼은 버리지 못하는 게 등반죄수들이지.”
고개를 드니 또렷한 인간의 육성을 내뱉는 존재가 있었다.
나는 잠시 말문을 잃어버려야 했다.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하늘하늘한 투피스를 입은 흑발의 여인이었다.
지금껏 내가 봐온 여성의 머리카락 중 단연 아름다웠던 것은 아스티나의 은발이었지만 눈앞의 흑발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 자연스럽게 공중에서 꼬릿짓을 하고 있는 매혹적인 흑발.
양손과 두 발목에 채워진 수갑과 족쇄마저도 그녀의 카리스마를 감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이 용왕이군.”
그 주인공이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알아채는 건가? 보통의 죄수들은 폴리모프한 내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곤 하는데. 등반죄수를 놀리는 고유한 즐거움이 하나 사라졌군.”
용사의 심안이 아니었다면 나도 구름 속에서 흑색의 비늘을 쏘아대던 용왕과 눈앞의 가녀린 여인을 연결시키는 어려웠을 것이다.
선입견이라는 것이 그토록 무섭다.
[용사가 7층장을 직면했습니다.]
[7층장이 가진 층장의 열쇠에 규격 외의 특수 봉인이 걸려 있습니다. 양도가 불가능한 열쇠로 취급됩니다.]
양도가 불가능.
즉, 다음 층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눈앞의 용왕 게브라둠을 죽이는 방법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용왕의 섬섬옥수가 뻗어와 내 갈비뼈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몸을 비틀어 저항해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마치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아는 것처럼 유려한 움직임으로 따라붙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래는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을 쓰다듬는 듯 보였다.
“손가락 치워. 겁나 불쾌하거든 지금?”
“서로에 대해 조금 알아보려는 거다. 불사자의 축복이 묻어 있는 걸 보니 원래는 이런 흉측한 몰골이 아니었던 것 같군.”
이곳에 있는 해골 병사와 인간 여인은 따지고 보면 둘 다 가면무도회를 펼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 어느 쪽도 본래 형태가 아니다.
나와 접촉하자마자 용왕 게브라둠은 그것을 알아챈 것이다.
“6층장 바르한이 널 순순히 보내준 건가? 그를 제압하거나 죽일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처럼 보여서 말이지.”
“골제가 내게 간곡히 부탁하더군. 자신을 대신해서 게브라둠이라는 한 파충류의 모가지를 잘라 달라고.”
골제가 나를 척후병으로 삼아 7층으로 올려보낸 사실을 들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부러 과격한 단어를 골라 입에 담았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코웃음뿐이었다.
“흐하하하! 골제? 고올제에? 바르한이 스스로에게 그런 거창한 이명을 붙인 모양이지? 용왕이라는 내 칭호에 자극받은 게 뻔하지 않느냐? 하여간 여인들에게 두들겨 맞은 사내놈들은 그런 식으로라도 정신승리를 하려 하지.”
“골제가 그 말을 들으면 썩 좋아하지 않을걸.”
“확실히 그자는 대단히 뛰어난 죄수였다. 마법의 본류인 용언을 사용하는 우리들에게 그 정도로 버틴 마법사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으니까. 나와 단독으로 맞붙었다면 패퇴하지 않았을 거라고 분통을 터트리며 돌아갔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골제와 용왕의 대결은 공평하게 치러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용왕의 수하에 있는 용들이 합심해서 리치를 몰아붙였던 거군.
어째서 골제가 그토록 ‘군단’과 함께 층을 오르는 데 집착하고 있는지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
분위기가 달라졌다.
장난스러웠던 용왕의 눈매가 날카로워진 것이다.
“왜 날 여기 붙잡아 두고 있는 거지?”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네가 갖고 있는 네메시스의 파편. 오래전 천공섬을 추락시키고 용들을 유린했던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산.”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다.
무려 7층이나 되는 고층의 층장이 내 존재를 눈치채자마자 사냥하려 했던 이유.
내가 가진 무언가를 탐낸다면 그 후보는 많지 않다.
나는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미안한데, 그거. 아래층에 두고 왔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