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천공의 패자들 (3)
“크으윽!”
회색 용의 습격을 받은 뇌룡 간다르바가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상대를 알아보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멜타스! 아직 살아있었나?”
“용이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망각해서는 안 됐지.”
“그럼 몇 번이든 다시 죽여주마!”
파지지직!
간다르바의 머리 위에 강력한 뇌운이 몰려들었다. 자신의 거체에 전격을 둘러 매달린 상대를 튕겨낼 심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츠파아아앗!
용 두 마리를 가뿐히 삼킬 만한 면적의 벼락이 천공을 뒤흔들었다.
구름바다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정도의 파괴력.
하지만 회색 용은 벼락이 내리꽂히기 직전에 점멸 마법을 통해 몸을 빼내었다.
“움직일 수 있나, 등반죄수여?”
그 용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 정면이었다.
다른 의미로 오해하기 힘든 위치 선정.
이멜타스라는 용은 잔뜩 격분한 간다르바로부터 나를 보호하려 하고 있었다.
용의 날개와 온몸에는 수십 개의 흉터가 죽죽 그어져 있었다. 다른 용들처럼 링 형태의 거대한 수갑이 가슴과 목덜미 사이에 걸쳐 있었다.
오랫동안 아수라장을 거쳐 살아남은 노련한 무사를 연상케 했다.
어지간한 전설의 금속보다 단단할 터인 용의 비늘에 저런 영구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수단은 달리 떠올리기 어려웠다.
같은 용의 발톱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당신은 누구지?”
“환룡 이멜타스. 어머니와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긴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가 왕이라 일컬었던 자가 어찌하여 해골의 몸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대를 용왕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 사명이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뿐이었다.
이 회색 용의 어머니는 누구이며, 그녀가 누구이길래 나를 지켜달라는 언약을 맺었단 말인가.
하지만 의문을 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간다르바가 날개의 피막을 활짝 편 채 벼락을 내뿜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말하라,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그렇게 부르면 돼.”
“좋다, 슈바인. 내가 길을 뚫을 터이니 기회를 봐서 달아나라. 세계수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용왕도 그댈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이멜타스가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것처럼 쏘아져 나갔다. 날개를 펄럭이지도 않고 신속의 운신 마법을 보여준 것이다.
싸움의 여파에서 나를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
쿠아아아아아아!
곧 두 마리 용의 브레스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이 감옥에서 지금껏 많은 충돌을 보아왔지만 단연코 용의 브레스가 서로 맞부딪히는 것만큼의 박력은 없었다.
레나스와 나는 충격파에 휩쓸려서 전격 결계에 닿지 않도록 쉴 새 없이 날아다녀야 했다. 전기 파리채에 맥없이 타죽는 벌레의 꼴이 되어선 안 되지 않겠나.
단 한 번만 제대로 허용해도 치명타가 될 공격을 두 용은 멈추지 않고 휘갈겼다.
“그동안 제법 재주가 늘었구나, 이멜타스! 예전에는 내게 상대도 되지 않았는데.”
“반면에 너는 오히려 실력이 퇴화했군, 간다르바. 용왕의 꼬리나 줄곧 핥아대고 있으니 뻔할 뻔 자지.”
“닥쳐라, 배신자야! 이 천공섬의 모든 용이 너를 죽이고 싶어한다. 너는 용의 신뢰를 이빨로 찢고 용의 체면을 짓밟았다!”
“용이라는 이름만 같을 뿐 우리는 제각기 다른 세계에서 불려온 죄수들이다. 필요할 때만 친한 척하지 마라.”
긴 대화를 나누면서도 두 용은 쉴 새 없이 이빨과 꼬리를 놀리고 있었다.
용의 대결이라는 건,
지금껏 내가 게임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으로 구현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박력 넘치는 충돌이었다.
일단 그들은 평면 위에서 이차원적인 움직임으로 싸우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전후좌우뿐 아니라 상하로 몸을 점멸시키면서 상대의 후방을 잡기 위해 애를 썼다.
브레스로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적당한 위치로 상대를 몰아넣기 위한 수 싸움이 치열했다.
만전불패의 체술이 아니었다면 그 저변에 깔린 의도를 모두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리적으로 신체가 맞닿을 경우 이멜타스가 불리했다. 회색 용의 체고 또한 어지간한 건물보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상대인 뇌룡이 더 우람했다. 미들급과 크루저급의 차이 정도 될까.
그럼에도 대결이 팽팽하게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대결에 온전히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이멜타스와 달리 간다르바의 마력이 다른 곳에 할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역 결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용에게도 쉽지 않은 노동이었다.
‘바로 그걸 노리고 있구나.’
이멜타스의 전략은 단기간에 화력을 쏟아부어 간다르바로 하여금 스스로 결계를 해제하거나, 최소한 느슨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영리한 간다르바는 곧 수비적인 태세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홀몸인 이멜타스와 달리 그에게는 동료가 있다. 폭룡 발카드와 용왕 게브라둠. 두 용이 이 장소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대치 상황은 금세 끝나버릴 거다.
나는 그걸 알려주기 위해 단단히 각오를 하고 회색 용의 배후로 날아갔다.
“이멜타스! 녀석은 시간을 끌고 있어. 동료가 오기까지 널 여기 붙잡아 두려는 거야.”
“폭룡 발카드를 만났나?”
“그래. 나는 발카드로부터 달아나던 와중에 저 녀석에게 붙잡힌 거야.”
이멜타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송곳니를 드러냈다.
“금방 이곳을 발견하고 날아올 모양이군. 그렇다면 속전속결로 나아가겠다.”
“어떻게 하려는 거지?”
“내가 왜 환룡이라는 이명을 갖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이멜타스의 배꼽 부근에서 막대한 양의 마력 방출이 일어났다.
용의 거체가 부르르 떨리더니 술식이 전개되었고, 그러자 이멜타스의 형체가 무려 여섯 마리로 늘어났다.
간다르바가 그것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여섯이라고? 일전엔 세 마리 분신에 불과했는데?”
“말했지 않나. 너희들이 안락에 젖어 있을 동안 나는 줄곧 이날만을 기다렸다.”
내 옆에 있는 한 마리를 제외한 다섯 마리가 일거에 간다르바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수적 열세에 처한 간다르바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몰아치는 분신들의 협공 때문에 수비적인 태세로 일관하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쳐둔 결계가 간다르바의 비행을 제약하고 있었다. 뇌룡의 육체에 전격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으나 구형 결계는 그 자체로 사각 링의 코너나 다름없었다.
“단순한 환영술이 아니야. 모든 분신이 본체와 동격의 힘을 갖추고 있잖아?”
“당연하지. 내 어머니로부터 목숨을 걸고 배운 것이거든.”
순간, 천공 저편에서 또 하나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가 했더니. 왜 여기서 뭉그적대고 있는 거냐, 간다르바!”
폭룡 발카드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폭발에 심취한 저 미치광이 용이 간다르바와 합세하게 되는 건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때가 되었군.”
그렇게 말한 이멜타스는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강력한 브레스를 위한 사전 동작이다.
용의 발성 기관은 호흡에 구애받지 않는 것인지, 그럼에도 이멜타스는 계속 내게 말을 건네었다.
“가라. 여기서 너를 탈출시켜 주겠다.”
쿠와아아아아아아!
강력한 회색 브레스가 결계에 큼지막한 구멍을 내었다. 자동 수복 기능이 있는 것인지 구멍은 빠른 속도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자, 서둘러라! 내가 이멜타스와 발카드를 여기에 붙잡아 놓겠다. 놈들은 오랫동안 나를 죽였다고 믿고 있었으니 미끼의 역할로선 충분할 거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멜타스가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고 나서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 이유가 짐작되지 않아서였다.
“당신의 어머니가 누군지 물어도 될까?”
이멜타스는 날개로 풍압을 일으켜 나를 결계 바깥으로 밀어냈다. 나와 레나스가 빠져나오자마자 결계는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구멍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이멜타스가 내뱉은 이름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호이란. 내 어머니의 이름은 호이란이다.”
*
“관객님, 괜찮으십니까?”
“어? 응, 괜찮아. 이상해 보였어?”
“해골이 되신 이후로 제가 관객님의 감정 기복을 읽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말수가 줄어들 경우에 집중해 판단하고 있죠.”
이멜타스가 꺼낸 호이란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한 대륙을 멸망시킬 만큼 강력한 구미호.
대수림에서 외로이 고립되어 있던 캉이의 어머니.
교도관들과 자신의 목숨을 거래해 아들을 지켜내고, 캉이의 잠재의식에 주술을 걸어 캉이를 7층까지 데리고 와달라고 내게 간곡히 부탁했던 여인이다.
‘그 부탁은 줄곧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지.’
하지만 난 아직 캉이에게 친모인 호이란의 존재를 말한 적이 없었다. 까마득히 오래전에 임신한 몸으로 푸르가토리움에 잡혀온 호이란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존재를 알자마자 이미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얼마나 충격이 크겠는가.
그런데 아무런 준비 없이 7층에 오르게 되면서 미뤄두었던 호이란과의 약속이 수갑보다 더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진작에 아스티나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해 둘걸.’
문득 사무치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티나, 제르비어스, 캉이가 보고 싶었다.
‘아, 이제는 토니아도 함께 있겠군. 서로 데면데면해하고 있으면 어쩌지.’
고작 하루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그동안 내게 닥친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모래벌레에 집어 삼켜질 뻔하고 해골 군단과 골제를 만났다. 불사자의 축복을 받아 나 역시 뼈만 남은 몸이 된 채로 예상치 못한 초고속 등반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용들에게 추격당하는 몸이라니.
[소환의 권능이 가능해지기까지 1시간 48분 남았습니다.]
괜찮다.
이제 두 시간만 지나면 예전처럼 다시 친구들과 등반을 시작할 수 있다. 봉인된 강력한 스킬도 한꺼번에 되찾을 수 있다.
본래의 힘만 되찾는다면 골제와의 대결이나 용들의 추격으로부터 훨씬 다양한 수를 일궈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 함께 호이란을 찾아내자. 그 후에 공층전을 어떻게 공략할지 의논해보면 되겠지.’
어느덧 우리는 세계수에 무척 가까워졌다.
멀리서는 지상과 하늘을 잇는 실선처럼 보였던 위그드라실은 이제 그 영롱하고 신성한 자태를 마음껏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위그드라실의 이파리와 마찬가지로 일곱 빛깔이 휘몰아치는 광채.
그것이 무수한 방향을 향해 뻗어 나가는 가지를 감싸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위그드라실의 상층부.
좌우로 크게 갈라진 거대한 둥지에 누워 있는 고룡이었다. 처음에는 건축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윽고 그것이 똬리를 풀고 몸을 일으키자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 녀석이다.’
그 고룡은 호이란이 보여준 기억에서 구미호와 마지막으로 거래를 했던 존재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호이란에게 했던 말도 기억한다.
‘비로소 거래는 완료되었다, 수감자여. 이제부터 그대는 미뤄놓았던 운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과 곧 눈이 마주쳤다.
[7층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의 화신체를 발견했습니다.]
[이 화신체는 현재 불안정한 상태로 세계수를 떠날 수 없는 몸입니다.]
화신체가 어디 다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때 고룡이 내뱉는 육성이 투창처럼 나를 향해 날아왔다.
“피해라, 함정이다!”
그 말을 듣고 움찔한 나보다,
위험을 감지한 레나스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리하여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구름 아래에서 날아온 검은 칼날이 내 정수리 위를 베고 지나갔다.
“어? 이게 무슨……?”
너무 오랫동안 함께 해오고 있던 부스터의 굉음이 멎어버리자 정적이 온 세계를 뒤덮었다.
괜찮으시냐고 물어오는 질문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물어봐 줄 주인공이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레나스?”
깨끗하게 잘려나간 레나스의 목이 구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