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천공의 패자들 (2)
띠링!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14. ‘천공의 사냥꾼’]
[용사는 공층전의 첨병으로서 7층 천공섬에 올라섰습니다. 층의 중심에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서 있고 각자의 세계에서 최강자로 군림했던 용들이 부유도에 둥지를 틀고 있지요.
그들은 용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용왕 게브라둠과 그의 수족인 폭룡 발카드, 뇌룡 간다르바가 당신이 7층에 당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네요. 정면승부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적들입니다.
그들의 시야로부터 달아나세요.]
[기한: 3시간 10분]
[보상: 민첩 +200]
[실패 시 페널티: 정신붕괴]
용왕에게 붙잡혔을 때의 페널티.
정신붕괴.
그 네 글자가 그야말로 정신을 번쩍들게 만들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온 이래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육체적인 고난이나 통증이 아니었다. 용사의 순도 높게 정련된 육체는 회복탄력성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반면에 코제트의 매료빔이나 제르비어스의 저주가 대면시킨 심마처럼 멘탈을 파괴하는 공격에 나는 늘 취약했다. 일종의 크립토나이트인 셈이다.
‘그런데 이번엔 붕괴라고?’
어째서 용들이 나를 노리는지는 불분명했으나 그 목적이 결코 사교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건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 정신을 붕괴시킬 작정일 리는 없겠지.
“녀석을 잡아 와라.”
구름 아래 거대한 그림자에서 묵직한 저음이 발산되었다.
그러자 내 좌우에서 두 마리의 용이 바다에서 뛰쳐 오르는 범고래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보라색 비늘을 지닌 폭룡 발카드.
황금색 비늘을 품은 뇌룡 간다르바.
그들과의 체고를 비교하면 나는 두 호랑이 사이에 낀 풍뎅이나 다름없었다.
“용왕의 명이시다, 허섭스레기 인간아.”
“아프게 하지 않을 터이니 순순히 따라와라.”
태어나서 용과는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으나 곧 이 거대한 파충류들은 결코 신용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과 달리 폭룡 발카드의 입에서 직사의 브레스가 쏘아졌기 때문이다.
쿠와아아아아아!
나를 노리고 공간을 찢어버릴 듯 위세를 떨치는 브레스를,
가까스로 피해낸 것은 레나스의 기동술 덕분이었다.
“관객님, 이 자리는 위험합니다.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에 달아나야 합니다.”
그거야 두말하면 입 아프다.
문제는 방향이다. 아이스링크 하나씩은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날개를 가진 거룡들로부터 달아나기엔 이 광막한 하늘은 내게 유리한 장소가 아니었다.
추적자의 시야를 방해할 장애물도, 속도를 늦춰줄 까다로운 지형도 없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한 곳뿐.
“저기 멀리 보이는 기둥이 세계수 위그드라실일 거야. 저기로 달아나자.”
저기, 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오토마타는 부스터의 순간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파앙! 소리와 함께 구 형의 충격파를 내뿜으며 우리는 용들로부터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래. 나는 발버둥치는 것들을 좋아해. 내가 따라잡을 테니 뒤에서 따라와라, 뇌룡.”
“네가 가지고 놀면 인간은 죽어버릴 텐데?”
“안 죽이도록 노력…….”
집중해보려 했으나 그 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등 뒤에 달린 레나스의 날개가 격하게 진동할 정도로 경이로운 속도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으로 이뤄진 세계가 모두 주우욱 늘어나며 선과 선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세계수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떤 풍경도 제대로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레나스를 오페라 극장에서 만났을 때 그녀의 순간 움직임을 놓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 내는 최대 속도가 그 당시에 비견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나스, 지금 어느 정도 속도로 날고 있는 거야?”
“시속 3,500km 정도입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속도다. 제트엔진 2기를 탑재한 정찰기 록히드 블랙버드의 최대 속도에 육박할 정도다.
“이전에 나를 데리고 날 때는 이렇게 빠르지 않았잖아?”
“관객님이 인간의 육체를 갖고 있을 때엔 장기에 가해지는 압력 때문에 속도를 제한한 겁니다.”
지금의 나는 불사자의 축복 덕분에 해골 병사가 되어 있다. 제트기에 실린 일종의 수화물이 된 셈이다.
그러고 보니 멀미도, 중력의 반작용도 이 몸에는 느껴지지 않고 있다.
감각이 차단된다는 건 제법 쓸 만한 상태 이상이었다.
문제는 우릴 뒤쫓는 용 또한 제트기를 우습게 상회하는 괴물들이라는 점이었다.
“그게 그 장난감이 낼 수 있는 최대치냐?”
실선으로 이뤄진 세계의 지평선에 보라색 점이 출몰했다.
레나스의 부스터가 황급히 역분사를 하자 나는 그것이 폭룡 발카드가 날개를 쫘악 펼친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 따라잡았다고?”
물리적인 비행으로 우릴 추격한 거라면 천둥 벼락에 가까운 소닉 붐이 따라와야 한다.
하지만 구름 위의 천공은 적막할 따름이었다.
마법이다.
그것도 중력 마법의 위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급 순간이동 마법.
“놀랐느냐. 마법이 본래 용의 것임을 몰랐던 모양이군.”
발카드의 짤막한 앞발에서 열 개의 마력구가 사출되었다.
그것은 이윽고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걸로 맞춰 잡아주마. 이 천공섬에는 유희거리가 부족하거든. 부디 죽지는 말아다오.”
제자리에서 회전하던 마력구 하나가 움직였다.
레나스는 제자리에서 1미터만 움직여 그 마력구를 흘려보냈으나, 최소한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오토마타의 회피술이 이 순간 독이 되었다.
마력구는 의지를 가진 유도탄처럼 우릴 추격해온 것이다.
모든 에너지를 비행에 쏟고 있던 레나스는 거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어 보였다.
단순 도주로 10개의 마력구를 모두 따돌린다는 것은 여의치 않은 일.
“레나스, 잠깐 떨어져 있어!”
아무리 괴이한 명령이라도 되묻지 않는다는 점은 레나스의 가장 큰 미덕 중의 하나였다.
내 등에 휘감겨 있던 레나스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인벤토리에서 드래곤하트 플레이트를 소환해 장착했다.
그리고 함께 소환한 디아볼릭을 휘둘러 마력구를 잘라냈다.
츠캉!
콰아아아아앙!
균열을 버티지 못한 마력구가 폭발하며 해골의 육체가 거칠게 튕겨져 나갔다.
[용사가 HP 2,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즉사 수준의 대미지가 아니므로 피해량이 0으로 무효화 됩니다.]
불사자의 축복이 내 몸을 지켜준 것이다.
쐐애애액!
섬광처럼 날아온 레나스가 자유낙하하던 내 몸과 재결합했다.
“용왕의 말이 사실이었군. 아공간 주머니를 갖고 있는 독특한 등반죄수라니. 기대 이상인걸.”
제자리에서 날고 있는 발카드의 목소리엔 흥겨움이 섞여 있었다.
어디 더 재밌는 걸 보여달라는 듯이 이번엔 세 개의 마력구를 동시에 해방시켰다.
“젠자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하늘 위를 연이어 유린했다.
나는 일전의 무모한 전술을 재반복하며 마력구들과 충돌했다. 경이로운 맷집을 믿고 지뢰를 밟아 터트리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폭룡이란 놈의 음흉함을 간과해선 안 되었다.
녀석은 세 번째 마력구에 발칙한 장난을 해 놓았던 것이다.
디아볼릭과 부딪히기도 전에 그 마력구는 한 발 앞서서 폭발해 충격파를 이끌어 냈다.
강제로 궤적이 비틀린 디아볼릭.
그 칼끝이 향한 곳은 불운하게도 내 왼쪽 무릎의 정중앙이었다.
딸그락!
통증은 없었다. 다만 부서진 무릎에서 떨어져 나간 종아리뼈가 맥없이 낙하하는 걸 지켜보는 심정은 오싹했다.
“외양이 똑같다고 성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그건 폭탄을 사랑하는 용의 기초적인 상식이거든.”
껄껄 웃는 폭룡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에 나는 떨어져 나간 종아리를 되찾는 데에 집중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뼈만 남겨진 흉측한 몰골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날아가 버린 사지를 다시 붙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해골 병사.
그러니 이제까진 단 한 번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친구의 스킬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친구 비르카 리케우톤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사자교령술(死者交靈術) 네크로맨시]
[연골봉합 Lv. 5]
[용사의 상태 이상과 융합해 스킬의 위력이 오릅니다.]
화룡도 7번 방의 스켈레톤 비르카.
대마도사와 떨어진 채 감옥에 붙잡혀 와 툭하면 뼈를 떨어트리곤 했던 유쾌한 친구.
박살 난 뼈를 달라붙게 하는 비르카의 스킬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해골의 몸으로 사용해서인지 스킬의 레벨이 올랐으며, 놀랍게도 날아가 버린 종아리가 스스로 날아와 무릎에 달라붙었다.
“희한한 재주로군. 용왕에게 바치고 싶지 않을 정도인걸.”
폭룡 발카드는 오만한 말투로 내뱉었다.
내장이 없어도 배알이 뒤틀리는 희한한 기분이다. 열 받긴 하지만 강력한 공격 스킬들이 봉인된 지금의 내 상태로는 반격을 꿈꿀 수 없다.
“레나스!”
“네, 관객님.”
내 몸을 날아오르게 하고 있는 오토마타에게 이 난관을 타개할 지령을 내렸다.
“내가 가진 마력을 넘겨준다면 출력을 더 높일 수 있겠어?”
시속 3,500km로는 아쉽다.
더 극한의 속도로 상대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관객님의 마력 회로가 빠른 속도로 소진될 텐데요, 괜찮겠습니까?”
내 MP의 한계치는 무려 14,199다. 9서클 대마법사였던 일레인 쿠디슈의 마력 회로를 웃도는 수준이다.
“배터리 방전은 걱정하지 말고 달려보자고.”
“알겠습니다. 형태 변환을 위해 갑옷을 해제해 주십시오.”
드래곤하트 플레이트가 다시 인벤토리로 역소환됐다.
철커덕. 철컥.
그러자 레나스의 형태가 또 한 번 변했다.
단순히 낙하산 가방을 메는 모양새에서 해골 병사의 전신에 입혀지는 아머드 슈트 같은 모습으로.
“비행 시작합니다.”
레나스가 택한 도주로는 놀랍게도 폭룡 발카드의 얼굴 쪽이었다.
“뭣이?”
황급히 반응해보려 했지만 두 배의 출력을 발휘하는 레나스의 기민함에 대처할 순 없었다.
우리는 발카드의 이마에 솟아 있는 멋스러운 두 개의 뿔 사이를 지나치며 맹렬히 날았다.
멀어지는 폭룡을 놔둔 채 우리는 세계수와의 거리를 빠르게 지워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날아가다가 레나스가 또 한 번 급격하게 속도를 줄였다. 우리가 날아오며 만들어낸 운동 에너지가 구름바다에 일직선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왜 멈춘 거야, 레나스?”
“눈앞에 측정치를 넘어서는 고압 전류가 장막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제야 내 눈에도 번개로 만들어진 장막이 무한히 펼쳐진 것이 보였다.
파지직. 파지지직.
“생각보다 빨리 왔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것은 폭룡의 것과는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
뇌룡 간다르바였다.
“길목을 막아서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일이지. 폭룡은 용족의 체면이 없어. 불멸의 시간을 살아가는 용에게 있어 최대 미덕은 인내심이다.”
이런 압도적인 광역 결계를, 그것도 우리가 오기 한참 전부터 유지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야말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마력 회로를 가졌다는 뜻.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돌파할 순 없겠어?”
“관객님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나, 저 결계에 흐르는 전류의 양이라면 제 신경회로가 마비될 겁니다. 그러면 수복하기까지 8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쉽게 말해 힘으로 뚫고 가려면 엔진이 꺼져버린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하지? 충돌 직전에 레나스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나 혼자 통과한 다음 꺼내 볼까?’
하지만 저 결계의 내구도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나 혼자서 돌파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되돌아올 것이다.
내가 결단을 내리려 할 때,
그 일은 일어났다.
파지지지지직!
고압 결계가 무참하게 찢어지면서 낯선 존재가 장막 뒤에서 거체를 드러낸 것이다.
“간다르바, 너의 뜻대로 놔둘 순 없다.”
처음 보는 회색 빛깔의 용이었다.
그 용을 발견한 간다르바의 비늘이 촤르르륵 돋아났다. 용의 생태야 잘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경악’의 표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콰드드드득!
인간 암살자가 단검을 상대의 복부에 밀어넣듯,
회색 용이 뇌룡 간다르바의 목덜미를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