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천공의 패자들 (1)
“단순하게 생각하게나. 나는 르팔타커스가 선택한 죄수와 동맹을 맺고 싶은 거네. 우리의 적은 동일해. 나는 복수를 위해서, 자네는 7층의 열쇠를 위해서 싸우는 거지.”
“복수만이 당신의 목적이라는 건가?”
“그렇다네. 복수의 대상은 7층의 층장. 가장 거대한 천공섬에 둥지를 튼 용왕(龍王) 게브라둠일세. 그를 처치할 때까지 동맹을 맺자는 것이지.”
동맹이라.
골제는 7층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층장과도 충돌한 적이 있다.
게브라둠이라는 용이 얼마나 대단한 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와 친구들의 힘만으로 거꾸러트릴 수 없는 강적일 경우 이 동맹 제안은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달콤한 제안.
바로 그렇기에 나는 함부로 그걸 삼킬 수 없었다.
“동맹의 유효 기간은 언제까지지?”
“우리가 용왕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7층장의 열쇠는 자네에게 넘기도록 하겠네. 이만하면 파격적인 제안 아닌가? 자네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지.”
상대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취미는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해두었던 대답을 꺼냈다.
“내 쪽에서도 조건이 있어.”
“말해보게나.”
“이 동맹에 믿을 만한 공증인을 내세우고 싶다. 서로 상대의 뒤통수를 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자는 거야.”
골제는 내가 역제안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말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수상해 보이는 법.
그를 모를 리 없는 골제는 곧 태연하게 물어왔다.
“설마 저 인형을 공증인으로 내세우고 싶다는 건가? 약조를 지키도록 만드는 강제력이 있어야 할 텐데. 저 인형의 재주야 인상적이지만 그 정도의 신력이 있어 보이진 않거늘.”
“6층의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를 공증인으로 요구하겠다. 당신의 동맹 제안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섞일 경우 소멸당한다는 조건이야.”
소멸이라는 단어에 골제에게서 감출 수 없는 패기가 휘몰아쳤다.
나는 뒤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상대를 마주 보았다. 기 싸움에서 지면 다 끝장이니까.
“……부담스러운 패를 꺼내 드는군, 슈바인 스트링거.”
“해골의 꼴이 되었다지만 난 당신의 병사가 아니거든. 쫄리면 없던 일로 하시든가.”
“자네가 말하는 친구들의 소환을 기다리는가 본데, 그들이 이 사막에 도착한다 한들 저주에 걸리는 건 피할 수 없다네. 제안이 결렬될 경우 내가 자네 친구들에게 친히 축복을 내려줄 리 없지 않은가.”
은근한 협박이다.
각자도생을 하려 하면 온건한 태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듯.
“나는 물러설 생각 없어. 이 공층전에서 막힌 문을 뚫어주는 장기말이 되어야 한다면 적어도 완전한 신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내 기세에서 진심을 읽어낸 것인지 골제의 패기가 한층 누그러들었다.
“좋아. 교도관이 우리의 동맹을 보증하도록 하지. 양쪽의 목적이 달성되기 전에 먼저 배신하는 쪽은 소멸되는 거다. 만족하는가.”
“딱 좋아. 내가 있던 세계에서 그걸 캐삭빵이라고 해. 허튼 수를 쓰면 목이 날아간다는 뜻이야.”
그러자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교도관이 곧바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6층의 교도관이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와 층장 바르한의 동맹 체결에 입회합니다.]
[본래 교도관은 죄수들의 계약에 관여할 수 없으나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의 후임자라는 특수상황이므로 이 공증이 성립한다고 알립니다.]
[동맹의 유효 기간은 7층의 층장 게브라둠이 쓰러질 때까지로 한다고 전합니다. 또한 7층장의 열쇠 소유권은 슈바인 스트링거가 갖습니다.]
[6층의 교도관이 이 동맹을 관장하며 유효 기간이 끝나기 전에 상대를 공격할 경우 공증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배신자를 소멸시킬 것이라 선언합니다.]
나는 골제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붉은 망토 안에서 그의 손이 마주 뻗어와 내 뼈다귀 손가락과 마주 얽혔다.
뼈와 뼈의 악수.
서로가 서로를 도와줄 수밖에 없는 완벽한 동맹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골제의 손등에 빛나고 있던 빨간 불빛이 반딧불처럼 떠올라 나에게로 왔다.
[당신은 방금 6층의 층장이 되었습니다.]
[시련을 거치지 않고 평화로운 절차에 의해 양도된 열쇠입니다.]
[따라서 위층으로 향하는 포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은 60분입니다.]
포탈을 만드는 데 제한시간이 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찌 된 연유인지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교도관이 적극 개입한 양도 절차니까.’
동맹을 핑계 삼아 층장의 열쇠를 양도받은 내가 정작 등반을 하지 않은 채 6층에서 말뚝 박은 채 뭔가를 궁리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수다.
괜찮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6층에서 볼일은 내게 없었으니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묻게나. 동맹군의 입장으로 무엇이든 대답해주지.”
“설공이란 죄수를 기억해? 2층 삼월초원에서 등반을 시작해 지금은 8층까지 올라가 있는 죄수다.”
골제의 두개골이 수직으로 끄덕여졌다.
“물론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네. 만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중 천재였으니까.”
“당신은 르팔타커스 시온과 설공, 두 죄수와 싸워본 셈이잖아. 둘 중에 누가 더 강했는지 당신의 소감을 듣고 싶어.”
“흐음, 그건 곤란하군. 대답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둘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네. 설공은 나와 싸우지 않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거든.”
“어떻게 그게 가능해?”
“당연히 나는 그자의 앞을 막아서려 했지. 그러나 교도관이 나를 말렸다네. 르팔타커스 시온과 달리 설공이 가진 힘은 마공(魔功). 서로가 전력을 다해 맞붙을 경우 층의 안위가 뒤틀릴 정도의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래서 설공은 뽑았던 검을 다시 집어넣고 교도관의 윤허 아래 다음 층으로 등반했다는 소리였다.
“7층에 무혈입성한 게 나만은 아니었다는 소리군.”
“나는 마법사이지, 무사가 아니라네. 언젠가 시도할 복수를 위해 교도관의 후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알량한 호승심을 내세워 설공을 붙잡을 순 없었지. 하나 재미로 생각해보건대 르팔타커스와 설공이 맞붙는다면…….”
“맞붙는다면?”
“아무래도 설공이 죽을 테지.”
골제가 그렇게 믿는 근거는 단순했다.
“최상층까지 오른 죄수는 르팔타커스가 유일하니까.”
*
사막의 바람은 무정하다.
그런 바람을 맞아온 죄수들은 세월에 마모되지 않기 위해 뼈만 남은 육신으로 오직 한 가지 감정을 불태워왔다.
그것은 분노.
“군단이여, 들으라! 지금까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일방적인 착취 속에 고혈을 빼앗겨 왔는가!”
“골제 만세 만만세!”
만골전 앞에 무려 팔천의 해골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났다.
“우리들은 죄를 짓고 이곳에 붙잡혀 왔다!”
저마다 다른 곳에서 붙잡혀 온 전사들이,
“분명히 우리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위층으로 하여금 심판할 권리를 준 적은 없도다!”
제각기 다른 크기의 해골 모습을 한 채,
“우리의 둥지에 허락 없이 뿌리를 뻗은 자들에게 복수할 때만 기다리며 사막의 먼지처럼 살아왔다!”
골제의 말에 따라 발을 구르고 있었다.
쿵. 쿵. 쿵쿵쿵.
뼈만 남기 전에 거인이었던 것이 분명한 최후열의 군단장이 거대한 북을 때리고 있었다. 그 북을 만드는 데 쓰인 짐승 또한 보통 덩치는 아니었으리라.
“전쟁의 종지부를 끊을 때가 왔다!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약속했던 후인이 지금 내 옆에 서 있다. 바로 이자가!”
골제의 지팡이가 극적인 동작으로 휘둘러지며 연단에 서 있던 나를 가리켰다.
“반격의 불씨를 피워올릴 것이다! 웅혼한 전장으로 향하는 길을 터 줄 것이다!”
“골제 만세 만만세!”
이렇게 뜨거운 분위기에서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것도 실례이겠지.
나 역시 한 명의 해골 병사가 되어서일까. 자연스레 하늘 위로 주먹을 들어 올리는 나를 발견했다.
“파천황 만세 만만세!”
골제는 흡족한 듯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 연설을 마쳤다.
“이것은 육신을 강탈당한 자들의 성전, 뼈에 각인된 굴욕을 갚게 될 복수…… 스켈레토마키아(Skeletomachia)가 될 것이다!”
지이잉.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단 앞 허공에 익숙한 포탈이 생겨났다.
그곳으로 뛰어들기 전에 골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음에 만날 때는 층이 달라져 있을 걸세.”
“최대한 당신 기대에 부응해 보겠어. 달리 조언해 줄 것은 없나?”
“천공섬은 지금껏 자네가 거쳐온 그 어떤 층과도 닮지 않은 곳일 터. 지치지 않는 날개를 가진 자만이 7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네.”
“선문답 같은 거 말고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주지 그래?”
“……뼈 빠지게 날아다니란 소리네.”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레나스는 이미 내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었기에 포탈에 뛰어드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친구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마지막에 포탈에 뛰어들었던 나였기에,
이 과정을 외롭게 치른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울적해졌다. 팔천 해골 병사의 함성이 있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포탈에 머리를 집어넣자 함성소리가 쑥 하니 사라졌다.
그 빈자리에 예상하지 못했던 음성이 들려왔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영향으로 인해 층간 구역이 존재하지 않는 구간입니다.]
[7층 천공섬에 진입합니다.]
층간 구역이 없다고?
이런 젠장!
시간이 흐르지 않는 층간 구역에서 차분히 다양한 상황에 맞춘 대응책을 수립하려 했던 내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됐다.
그렇다고 낙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발끝으로부터 아득히 먼 곳에 구름의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나스!”
인벤토리에서 해방된 오토마타는 내가 미리 부탁한 형태로 달라붙었다. 어깨와 복부를 단단히 휘감은 레나스의 동체, 그리고 두 쌍의 날개가 해골 병사인 내 등 뒤로 펼쳐졌다.
허리춤의 로켓 부스터에서는 거센 불꽃이 솟아올랐다.
지금의 나는 뜨거움을 느낄 수 없는 해골이라서 참 다행이었다.
“어디로 향할까요, 관객님?”
“글쎄. 후보군이 너무 많네.”
7층 천공섬의 ‘섬’은 한 곳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열 개가 넘는 팽이 모양의 부유도(浮遊島)가 경이로운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리를 따져봤을 때 부유도 하나하나가 도시 하나를 세울 수 있을 법한 규모였다.
실제로 몇몇 부유도에는 인공물인 것이 분명한 구조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신전과 탑처럼 보이는 고딕 양식이었다.
크로톤의 기암거성에 비견될만한 사이즈다.
그 안에 머무르고 있는 존재의 체고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방증하고 있었다.
“일단 무인도를 고르는 게 좋겠어. 이곳의 죄수들이 내게 우호적일 것 같지는 않거든.”
최대한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곳에서 친구들을 내 곁으로 소환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게 첫 번째 계획이었다.
세계수를 찾아가는 것은 그다음.
그런데 내 계획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다급한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7층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등반죄수에게 경고합니다.]
[지금 당장 세계수 위그드라실로 피신할 것을 권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뭐야?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교도관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에 노이즈가 낀 것은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층을 올라올수록 전대미문의 현상과 계속 마주하는 느낌이다.
[용왕 게브라둠의 지배권에 들어섰습니다.]
[7층의 층장이 교도관과 등반죄수의 소통을 강제로 차단했습니다.]
저게 뭐야?
발아래 구름에 거대한 날개를 가진 괴물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알려 주겠다, 등반죄수여.”
용 모양의 구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용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성된 사냥꾼이오, 이 천공은 그 자체로 달아날 수 없는 덫이라는 것을.”
천공의 패자가 지금 나를 잡으러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