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공층전 (5)
- 골제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용사님.
마도서 단탈리온은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의 신빙성을 보증해주었다.
30미터 앞에서 걷고 있는 골제 바르한의 망토가 보였다. 그의 지팡이가 계단을 탁탁 내리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단탈리온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지의 마도서와는 이런 방식으로도 문답이 가능했다.
‘그래도 녀석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어. 이건 지금까지 나를 살려 놓은 일종의 직감이야.’
골제는 분명 내게 숨기는 게 있다.
진실을 드러내되, 꼭 필요한 부분만 공개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고 있었다.
‘골제가 르팔타커스와의 대결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격언을 아십니까, 용사님. 변수가 너무 많아서 대답이 무의미하지요. 하지만 그 시점에 골제가 승부를 중단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신이 르팔타커스의 숨통을 끊어내기 전에 흑마법의 원리가 간파당할 것을 두려워한 거지요.
‘그건 말이 되네.’
- 지금 골제 바르한은 용사님의 MP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문답을 계속하면 제 존재를 깨닫게 될 겁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이 불사자의 축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시전자인 골제가 그것을 해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복종을 전제로 한 흑마법이 아니며 쌍방 동의를 전제로 한 거래의 일종입니다. 용사님이 해골 병사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려면 역시 쌍방 동의가 필요한 거지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단탈리온을 덮었다.
불사자의 축복에 내 자유의지를 조종하거나 목숨을 거둬갈 권한 따위 없다는 것은 희소식이었다.
쌍방 동의를 전제로 한 거래라.
어쩌면 여기에 골제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의 실마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던 레나스가 오랜만에 기척을 냈다.
“관객님. 저 너머에서부터 공간이 넓어지는군요. 그리고 골제가 향하는 방향으로부터 측정 허용치를 넘어서는 에너지 레벨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직접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
촉각이 없어진 해골의 몸이 아니었다면 살갗이 저릴 만큼 흉흉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을 거다. 그만큼 내부에서 느껴지는 파장은 묵직했다.
어딘지 모를 천장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빛.
그 빛줄기 아래에서 골제가 내게 손짓했다.
“이리 오게. 우리의 전장(戰場)을 보여줄 터이니.”
*
태풍의 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혼돈과 파괴의 중심부에 나 홀로 적막한 장소.
“여기서 무엇들과 싸운 거지?”
위그드라실의 뿌리 내부는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벽 곳곳에는 집채만 한 발톱으로 할퀴어진 자국과 짓이겨진 두개골, 그리고 처참하게 박살 난 병장기들로 가득했다.
잔해의 까마득한 숫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상태도 제각각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공성추와 바로 지난달 부러진 것 같은 창날이 공존했다.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블랙홀의 내부를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골제의 목소리엔 회한이 넘실댔다.
“무수한 도전. 그리고 그 숫자만큼의 패배. 자네가 보고 있는 건 끝나지 않는 전쟁의 회고록일세.”
앙상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천장에서 내리쬐는 연두색 광원이었다.
“뿌리의 내부를 타고 상층부에 접근하면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환수들의 그림자를 소환한다네. 줄기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력한 그림자가 우리를 막아서지.”
“세계수의 뿌리를 내부에서 잘라낸다는 발상인 건가?”
“아니. 위그드라실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잘라내는 건 불가능하네. 무엇보다 그런 일이 벌어지길 원치도 않고.”
6층 만골사막의 입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뿌리는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죄수 바르한에게 있어서는 숙원을 이룰 수 있는 동아줄이기도 했다.
“나와 군단은 이 뿌리를 타고 올라갈 것이야. 하나 이미 백여 년 전에 마지막 관문 하나만을 남겨두고 정체된 상황이지.”
“불사의 군단과 당신의 힘으로도 뚫지 못하는 수비수가 있다는 건가? 얼마나 강력하길래?”
“백문이 불여일견. 보여주도록 하지.”
골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물건을 발견한 듯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거룡의 비늘조차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은 초대형 작살이었다. 밑동이 바스러지긴 했으나 첨단은 여전히 치명적인 예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골제의 지팡이가 부러진 초대형 작살을 건드리자 그 물체에만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옆에 있는 인형에게 묻지. 귀는 튼튼한 편인가.”
“청각 센서의 내구도를 물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굉음은 전부 무리 없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곳에 평범한 귀를 가진 생물체가 있었다면 고막이 찢어질지도 모르니까.”
피이이이잉!
골제가 말을 마치자마자 부러진 작살은 점화된 로켓처럼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성인 서너 명이 올라타도 괜찮을 만큼 커다란 작살의 끄트머리는 곧 동그란 점이 되었고, 그 후로도 쉴새 없이 파공음을 내다가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1초. 2초. 3초.
적막의 시간이 계속 흘러만 갔다.
착탄 지점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체감할 수 있었다. 초조함에 내가 말을 걸려 하자 골제는 해골 검지를 들어 턱뼈 앞에 세웠다.
곧 그가 보여주려고 하는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비명소리가 뿌리의 내벽을 진동시켰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악!”
달그락.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있었다.
귀곡성에 심리적으로 놀란 것은 아니다. 그저 소리에 실린 물리력이 나를 주저앉힌 것이다.
골제 바르한은 망토만 펄럭일 뿐 멀쩡했지만 레나스는 나처럼 비틀댔다.
“음공인가? 아니야. 어떤 공격이 이끌어낸 충격파에 가까운데…….”
“놀랐는가. 군단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건 바로 저 녀석 때문일세. 아주 까다로운 적수이지.”
곧 위에서 까맣게 탄 재가 하늘거리며 내려왔다. 원래는 초대형 작살이었던 것이 모종의 공격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파된 것이다.
나는 똑바로 선 채 골제를 노려보았다.
“이제 보여줄 건 다 보여준 것 같은데.”
“맞네. 자네로 하여금 이 장소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지?”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네. 이 푸르가토리움이 세워진 이래 오직 우리에게만 벌어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지.”
한 채의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군대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싸움을 공성전이라 한다.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성벽을 함락시키고, 내부에서부터 갉아먹기 위해 독을 뿌리거나 간자를 투입시키는 등 전략의 모든 요소가 총동원되어야 하는 전쟁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층을 함락시키기 위한 싸움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공층전(攻層戰)이군. 이 뿌리를 전장으로 삼아서 6층과 7층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 표현 마음에 드는걸.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어. 앞으로도 군단장들에게 공층전이라는 단어를 전파하도록 하지.”
“힘으로…… 7층의 방벽을 허물고 넘어갈 셈이군.”
골제의 뻥 뚫린 안구에서 이글거리는 원념이 엿보였다.
“우리 층은 세계수의 오랜 침략에 깊은 분노를 갈무리해 왔다. 저 바깥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아득하고 해묵은 원한이지. 궁금하지 않은가. 침략의 도구인 이 뿌리의 내부를 갉아먹고 들어가서 줄기의 바깥으로 뛰쳐나왔을 때 7층의 거만한 용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전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승산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적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무력하게 전멸하기 십상.
골제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르팔타커스와의 일화를 들려주었을 때 말했듯, 나 역시 한때는 등반죄수였다네. 세계수가 자리 잡고 있는 7층의 지형이 어떠한지, 천공섬들에 둥지를 틀고 있는 용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와 군단이 뿌리의 말단을 뚫을 수만 있다면. 오만한 용들의 비늘은 우리 불사자의 칼날에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네.”
문제는 성벽의 견고함이었다.
위그드라실의 뿌리에서 출몰하는 환수들의 그림자는 그 강력함을 차치하고서라도 결국 본체가 아니라는 대단한 강점을 갖고 있었다.
가까스로 소멸시키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원상복귀된 채로 전열에 합류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불사라 할 수 있지. 죽지 않는 군대와 무한히 되살아나는 환수들의 싸움인 거야.”
“이 오래된 대치 상태를 깨트리기 위한 한 수가 필요한 상황이겠군.”
“그래. 그리고 나는 자네야말로 상대의 성에 잠입해 독을 풀어낼 수 있는 적임자라고 믿네.”
골제가 이제야 비로소 본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를 성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7층으로 올려보내 주겠다는 거야?”
리치의 손바닥 위로 적색 불빛이 영롱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내 손등에도 저 불빛이 정확히 다섯 개 박혀 있으니까.
“층장의 열쇠를 양도하겠다고?”
“불사자의 축복을 가진 그 육체로 자네가 위그드라실의 ‘안쪽’에서 잠긴 문을 열어주길 바라네. 그렇게 해주기만 한다면 우린 안쪽에서 치고 올라가 기나긴 앙금을 해소할 수 있겠지.”
확실히 이것은 거래였다.
골제 바르한은 내게 층장의 열쇠를 건네주고 나는 지금껏 해온 것처럼 포탈을 통해 7층에 올라선다.
그리고 위그드라실의 줄기로 침투해 내부에서 골제의 공층전을 도와주는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와 원리는 같다.
“어째서 당신이 이 열쇠로 직접 등반하려 하지 않는 거지?”
“한 번 실패한 몸이니까. 푸르가토리움은 한 죄수로 하여금 재등반을 허락하지 않거든.”
그것은 그럴싸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등반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 자살한 것도 말이 된다.
처음엔 까마득히 늘어난 형량에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했는데, 단 한 번의 기회를 잃어버린 절망이 합해진 거라면 설득력은 더 강해진다.
“게다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방법을 쓰지 않을 것이야. 겪어 봤기 때문에 안다네. 혼자의 힘으로는 7층장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내게 층장의 열쇠는 의미가 없네. 군단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7층에 올라서려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한 곳뿐이야.”
“내가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배신한다면? 열쇠만 낼름 삼키고 8층으로 올라가 버리면 당신은 닭 쫓던 해골이 되는 거 아니야?”
“껄껄. 그런 걸 묻는 것부터가 정직한 청년이군. 자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네.”
나는 팔짱을 낀 채 골제의 말을 경청했다.
이제부터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니까.
“첫 번째는 내가 해제해주지 않으면 불사자의 축복은 평생 자네를 따라다닐 걸세. 탈옥에 성공하든 아니든 말이야. 나야 스스로의 의지로 해골이 되었으나 자네는 아니잖은가. 자네가 나를 배신하고 탈옥에 성공했다 한들, 원할 때 죽지도 못하는 해골의 몸으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겠나.”
차마 반박하기 어려운 한 마디였다.
지구로 돌아갔을 때 이런 몰골이라면 상희가 기겁하고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죽지도 못하는 몸이라니. 한사코 사절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네 혼자의 힘으론 결코 7층의 열쇠를 가질 수 없을 테니까. 천공섬의 강자들을 절대 얕보아선 안 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