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공층전 (4)
골제의 수갑엔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글귀는커녕, 평범한 문양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갑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리치의 텅 빈 안구가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정황을 보아하니 수갑 안쪽의 글귀는 내게만 주어진 모양이다.
‘망할 교도관장 놈. 뭘 잊지 말라는 건지 써 줘야 할 거 아니야.’
이 정보를 상대에게 알려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수갑이 뼈에 달라붙어 있는 게 신기해서. 앙상한 뼈만 남은 몸이 되었으니 그냥 쑥 빠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군.”
해골이 되어서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상대에게 뭔가를 숨길 때 얼굴 근육의 미세한 변화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골제는 내 말을 믿은 것인지 다시 앞서 걸어 나갔다.
“나 역시 수갑을 벗어보려 긴 시간 골몰했었네. 하지만 그 어떤 흑마법으로도 해제시킬 수가 없었어. 술자의 힘이 근원적으로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거겠지.”
한 차례 전투를 했으나 나는 골제 바르한이 가진 능력의 극히 일부분만 봤을 뿐이다. 녀석이 제대로 된 흑마법을 구사해서 상대를 몰아칠 때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죄수도 푸르가토리움의 수갑을 벗을 수 없다 이건가?”
“적어도 마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리치야. 저주나 함정에 걸려서 이런 몸이 된 게 아니라네. 스스로의 의지로 미각과 촉각 등을 잃은 대신 영생불사의 육신을 쟁취했지.”
그것은 ‘진리’를 향한 맹목적인 탐욕 때문이기도 했다. 푸르가토리움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의 죄수라고나 할까.
이 녀석이 있던 세계에서 대륙 몇 개는 아작 내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마법에 관한 천재적인 재능 따위 없었다네. 인간의 몸으로 자연적인 수명에 따라 죽었더라면 볼품없는 술식 몇 개만 익히고 죽었겠지.”
인간 바르한은 그걸 견딜 수 없었다.
마법의 정점에 오르고 싶다는 불길 같은 야망에 비해 장작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서지지 않는 장작으로 자신의 육체를 바꾸었다.
“나는 2층에서 9클래스의 중력 마법사를 만났어. 그분에게 마법을 배우기도 했지.”
“그녀는 인간이었나?”
“마녀였지. 제국의 생체실험을 거듭해서 제련된 생체병기랄까.”
골제는 아쉽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흥미롭군. 그런 고강한 자와 마법 대결을 펼쳐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어. 자네는 왜 아까 마법을 쓰지 않은 거지?”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재대결의 때가 온다면 방금처럼 맥없이 당하진 않을걸.”
“후후, 기세가 좋군. 기대하도록 하지.”
골제가 꺼낸 다음 이야기는 내 귀를 솔깃하게 했다.
“교도관이 내게 이르기를, 수왕 르팔타커스 시온의 영령이 자네를 가호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맞아.”
“아득하고 그리운 이름이군. 내가 수갑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 또한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지. 끝을 알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진 그자마저도 수갑을 풀어낼 수 없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었다.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천공돌파에서 유일하게 굴복시키지 못했던 상대인 골제.
둘의 만남은 어떠했을까.
“그자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충격적이었지.”
*
아득히 오래전.
리치 바르한은 군단장들로부터 믿을 수 없는 보고를 받았다.
“그게 무슨 뼈 빠는 소리인가. 농담하지 말게.”
“아닙니다, 골제 님! 정말로 모래벌레가 내지르는 비명소리였습니다.”
“그 괴물이 비명을 지를 수 있다고?”
군단장들과 함께 손수 사막으로 걸어간 골제.
그가 황막한 모래 언덕에 서서 마주친 충격적인 광경은 사막 위에 번진 녹색 웅덩이였다.
순간, 이끼라도 자라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그제야 골제는 모래벌레의 피 색깔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철벅.
거구의 사내가 녹색 웅덩이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는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꼬리를 말고 도망쳐 버렸군. 다짜고짜 집어삼키려 들길래 두 동강을 내 주려 했는데.”
골제는 그의 등에서 여러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사막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아래층에서 올라온 등반죄수. 그것도 강력한 패기를 가진 무사다.
왼쪽에 꽂아 놓은 예사롭지 않은 대검. 4층과 5층 사이의 무기고에서 자신의 무기를 돌려받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자다.
주변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여섯 개의 기둥은 그의 무기가 아니다. 모래벌레의 이빨이었다.
‘대화를 나눠봐야겠군.’
이라고 생각을 마친 순간에 상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음?”
“짐은 누구에게 등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묻겠다. 그대는 이 층의 층장인가?”
“그렇소만. 자네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르팔타커스 시온.”
“그렇군. 내 이름은…….”
“궁금하지 않다. 열쇠를 내놓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고저가 없는 억양으로 담담히 내뱉는 협박.
그래서 골제의 당황은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하지만 군단장들의 사정은 달랐다.
“건방진 놈이!”
분기탱천한 한 군단장이 덤벼들려 했으나 르팔타커스의 손에서 뻗어 나온 섬광이 그의 척추를 날려버렸다.
불사자의 축복을 받은 해골 병사를 즉사시켰다는 건 이 한 방의 위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뜻이다.
골제의 고개가 갸웃했다.
‘마법? 아니야.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던진 거다.’
등반죄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복잡한 술식이나 신적 권능도 아니었다. 그저 괴력이 담긴 한쪽 팔로 모래벌레의 이빨을 투척한 것이었다.
“짐의 앞에서 떠들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다.”
무척 오만한 죄수로구나.
골제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리고 저렇게나 오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꺾어줄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모든 군단에게 명한다. 이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모여든 수천의 해골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섰다. 층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아니라면 일언지하에 일어날 수는 없는 군무.
그러자 르팔타커스는 모래에 파묻혀 있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보통의 검보다 한참을 더 뽑아야 그 검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후우우우웅.
모래를 털기 위해 휘둘렀을 뿐인데 그 풍압은 골제의 망토를 멀찍이 날려버릴 정도였다.
“죽음을 택했는가, 층장.”
“아니. 송구하네만 이 몸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사의 몸이라서 그건 곤란하네. 자네에게 대화 예절을 조금 가르쳐주고 싶을 뿐이니까.”
등반죄수와 층장의 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로가 호적수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르팔타커스의 대검은 사막의 지형을 바꿔놓으려는 듯 매섭게 휘몰아쳤으나 골제에게 닿지 못했고, 골제의 마법 역시 상대의 단단한 육체에 흠집을 내지 못했다.
평행선을 이르는 지루한 대결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다.
르팔타커스가 만들어낸 검풍은 사막에 숱한 회오리를 만들었고, 골제의 흑마법은 그 회오리를 다시 잠재웠다.
신화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힘겨루기.
싸우는 와중에 서로에 대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자네는 어째서 멀쩡할 수 있지? 이 층에는 죄수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저주가 걸려 있는데.”
“모르겠군. 느껴지지 않는다. 짐의 체력이 그 저주에 침식당하지 않을 만큼 아득히 높은 거겠지.”
“생명력의 그릇 자체가 다른 건가. 타고난 재능에 수차례의 기연을 거듭했겠군. 자네의 몸을 해골로 뜯어서 연구해보고 싶은데. 허락은 아무래도 어렵겠지?”
“너희들의 입버릇대로 돌려주지. 뼈 빠는 소리 하지 마라.”
“흐하하. 그사이 언어유희도 늘었군.”
그렇게 85일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둘의 균형추는 팽팽했으나 한쪽이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골제는 지팡이를 내린 채 선포했다.
“이제 그만두도록 하지. 자네에게 층장의 열쇠를 양도하겠네.”
“승부는 나지 않았는데? 짐은 여전히 체력이 남아 있다.”
“그 체력을 바닥나게 만들고 싶었는데…… 세 달이나 허비할 수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네.”
층장의 열쇠를 등반죄수에게 양도한 층장은 평범한 죄수로 돌아가게 된다.
그럴 경우, 다시 밑바닥부터 죄수들과 경쟁해 다시 층장의 지위를 획득해야 하는데, 모든 죄수들이 골제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는 6층에서는 경쟁 따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층장의 열쇠를 획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사막의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이 골제가 가진 부담이었다.
“그래도 대결이 계속되었을 때 내가 겪을 리스크가 더 크다고 판단되는군. 열쇠를 가져가게.”
르팔타커스는 결과에 불만족했다.
제대로 된 결착을 내지 못한 것이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그가 85일 만에 대검을 다시 모래 위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위층에 올라가 본 적이 있나, 바르한.”
“있었지. 처음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몇 층에서 좌절했나.”
“바로 위층인 7층에서.”
“……싸우다 은근히 정이 들었는데, 짐이 그대를 위해 모래벌레를 죽여주고 올라갈 수도 있다만.”
“그건 사양하겠네. 저 모래벌레 또한 이 층의 일부야.”
층장의 열쇠를 양도받은 르팔타커스 시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탈을 열어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어쩌면 최초로 탈옥에 성공하는 죄수가 나올지도 모르겠어.”
그것이 골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그로부터 머지않은 나날이 흘러 골제는 다시 6층장이 되었다. 그리고 푸르가토리움 전체에 한 소식이 울려 퍼지게 되었다.
감옥이 만들어진 이래 최초로 한 죄수가 9층에 올랐으며,
탈옥을 위해 시련에 도전했으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추락하고 있다는 소식을.
‘결국 그마저 그렇게 되었나.’
르팔타커스의 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골제에게 그건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비보였다.
한때 탈옥을 꿈꿨던 이로서 그의 좌절감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기도 했고.
그로부터 며칠 뒤 골제는 감옥을 되짚어 내려오던 르팔타커스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등반죄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골제는 그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숙고 끝에 거절했다.
“기원검의 조각이라 했나? 그런 것이 사막에 남겨져 있을 때 생겨날 후폭풍이 걱정되는군.”
“그러한가. 짐에게 열쇠를 양도했던 빚을 생각해 강요하진 않겠다.”
“……파편만으로도 성유물에 가까운 권능을 가진 조각 아닌가. 그걸 각 층에 흩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도관들을 향한 복수인가?”
르팔타커스는 골제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일을 위한 안배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짐의 뒤를 이어 이 감옥을 오르게 될 후인을 위한 선물이지.”
“마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듯 들리는군.”
“그렇게 될 거다. 짐의 천공돌파는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는 등반을 시도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말은 훗날 르팔타커스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골제로 하여금 놀라지 않도록 만들어 준 한 마디였다.
떠나기 전 파천황과 골제는 악수를 나누었다.
“자네가 말하는 그 후인은 언제쯤 볼 수 있겠는가.”
“어쩌면 10년 후. 최악의 경우엔 만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
보통의 죄수였더라면 만년의 세월에 짓눌려 감히 대꾸를 할 수 없었겠으나 골제는 달랐다. 불사의 주박이 걸린 리치였으니까.
“그 후인을 내가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아무것도. 짐의 선택은 틀리지 않을 터이니 그대는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 것이다.”
“……그 선택의 기준이 궁금한걸. 이 푸르가토리움에 르팔타커스 시온보다 대단한 죄수가 입소하는 날이 올까.”
“올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르팔타커스는 골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짐이 끝내 가지지 못했던 걸 갖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