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공층전 (3)
[이름: 바르한 니칸드로스]
[별호: 골제(骨帝)]
[종족: 언데드], [클래스: 리치]
[HP: 810], [MP: ??,???], [근력: 150], [민첩: 120]
[형량: ??,???년]
[6층 교도관에 의해 해당 죄수의 개인정보 열람이 차단되었습니다.]
용사의 심안이 눈앞의 상대에 대한 데이터를 읊어주고 있다.
‘설명란에 제한이 걸렸어.’
교도관이 용사의 심안에 개입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높은 층으로 올라갈수록 상대의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보는 편리한 간파는 이런 식으로 방해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형량이 만년을 넘어간다는 건 녀석이 등반죄수였을 가능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바깥세상에서 흉악한 죄를 저질렀다는 뜻이겠지.
아득한 마력 수치에 비해 다른 스탯은 형편없었다. 단 한 번의 치명타만 먹인다면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수준.
“도전을 받아들이지, 슈바인 스트링거.”
디아볼릭의 검 끝이 골제 바르한의 해골머리를 향했다.
“내가 이렇게 나오는 걸 예상했군.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놀라거나 긴장할 이유가 없다네. 나는 죄수들의 왕이라 불린 수왕 르팔타커스보다 오랜 시간 푸르가토리움에 머무른 몸. 자네처럼 내게 무기를 겨눈 죄수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골제는 언제든 덤벼보라는 듯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디아볼릭을 수평으로 눕힌 자세 그대로 천천히 거리를 좁혀 갔다.
골제의 지팡이가 탁 하고 바닥을 내리찍더니 뭉툭했던 막대 끝이 날카로운 삼지창으로 변했다.
“편한 대로 덤벼보게. 마법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네.”
“마법사가 근접전으로 검사를 상대하겠다고? 지나치게 오만한 거 아니야?”
“오래 살다 보면 다양한 잡기를 익히게 마련이야. 쓸만할걸.”
잡기라고 낮춰 부르긴 했으나 나는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상대는 끝을 알 수 없는 무력의 소유자인 르팔타커스와 무승부를 기록한 절대강자니까.
다만 150에 불과한 근력으로 그 열 배의 근력을 지닌 내게 무슨 수로 대미지를 준다는 것일지 의아했다.
화룡도의 홉고블린 차카 도기노브와 엇비슷한 능력치. 그 녀석은 이제 내 정권 지르기 한 방에 기절하는 놈이다.
무슨 술수를 쓸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파악해주마.
“그럼 간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해 발돋움을 했다.
천년명마의 질주로 거침없이 간격을 지워버린 뒤 순식간에 골제의 정면에 도달했다.
검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은 골제의 두개골을 받치고 있는 연약한 목뼈. 내 근력 스탯을 믿고 내뻗은 검이 스치기만 해도 절단될 것이었다.
휘이이이잉!
검 끝에는 아무것도 닿는 느낌이 없었다.
다만 골제의 망토자락이 눈앞을 한 번 어지럽힌 뒤 내 명치에 삼지창의 끄트머리가 닿아 있을 뿐이었다.
“또 하겠는가.”
나는 훌쩍 뒤로 물러나 태세를 가다듬었다.
골제는 추격해오지 않고 제자리에서 다시 삼지창을 땅에 살짝 꽂아두었을 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순식간에 간격을 침범당했다. 만전불패의 체술 Lv. 7으로도 골제의 동작을 전혀 간파해내지 못했다.
의아한 것은 삼지창의 리치가 디아볼릭의 그것보다 1.5배가 길었는데도 공격이 끝난 순간 당한 쪽이 나였다는 점이었다.
식은땀이 등 뒤로 주륵 흘러내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천마 류운학과 처음 대련을 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천마처럼 압도적인 고수와 맞붙었을 때도 내가 왜 밀렸는지, 상대의 무엇이 나를 제압한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실력에서 밀렸다는 느낌이 아니라…….
“속임수에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가?”
골제의 여유로운 음성이 그의 턱뼈에서 흘러나왔다. 앙상한 손가락이 내 쪽을 향해 까닥거렸다.
“성에 찰 때까지 덤벼보게나. 오랜만의 도전이니 나 역시 금방 이 유희를 끝내고 싶진 않거든.”
“그럼 사양 않고 들어가겠다.”
이번엔 훌쩍 뛰어올라 골제의 머리를 노렸다.
공중에서의 습격은 반격에 취약해진다는 약점이 있었으나 더 넓은 시야에서 놈의 움직임을 살피고 싶었기 때문이다.
푸우욱!
하지만 이번에도 디아볼릭은 애꿎은 지면에 처박힐 뿐이었다.
관자놀이가 순간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 왼쪽 옆구리의 빈 공간을 뚫고 삼지창이 들어와 있었다. 분명 내 공격이 골제의 두개골에 닿을 수밖에 없는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사태가 역전돼 있다.
“이걸로 자네는 두 번 죽었네.”
“치잇!”
그 뒤로 한참을 덤볐으나 내 검 끝은 단 한 번도 골제의 뼈에 닿지 못했다.
결국 나는 체력만 심각하게 소진한 뒤 물러나야 했다.
“헉헉, 제기랄. 전혀 모르겠어.”
골제의 지팡이에서 마력이 흘러나오는 낌새는 없었다. 마법진도 그리지 않았다. 흑마법이니 만큼 어쩌면 내가 아는 전통적인 방식과 전혀 다른 매커니즘으로 발동되는 마법이었을 수도 있다.
녀석의 MP 수치가 내게 물음표로만 표시되는 것도 악재였다. 상대의 술수가 마법인지 아닌지조차 나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겠는가.”
체력 고갈 때문에 내게 남겨진 시간은 4분으로 뚝 떨어졌다.
용사전용기 비천성검이나 파괴력 넘치는 여우트림 같은 친구들의 스킬을 쓸 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텐데, 입술에서 쓴맛이 났다.
그때, 차가운 금속 손가락이 내 어깨에 올라왔다.
“관객님, 제가 한번 해봐도 될까요?”
멀찍이서 지켜만 보던 전투형 오토마타 레나스의 도발이었다.
*
“자유의지를 가진 인형인가? 대단한 기술력이군.”
레나스가 내가 부탁하기 전 먼저 행동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내가 이유를 묻자,
“제 연산 능력에 의하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루트가 87,372개 존재합니다. 만철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킨 등반죄수들에 비하면 결코 강한 적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하고 답했다.
레나스가 골제와 싸우는 모습을 제3자의 시선에서 지켜보면 내게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골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상관없네. 다만 사지가 잘려 나갔을 경우에 저 인형이 다시 수복할 수 있는지 묻고 싶은걸.”
“문제없습니다.”
“그러면 덤비게나.”
말이 끝나자마자 레나스의 부스터가 발동했고 일직선의 하얀 실선이 만골전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골제는 처음 서 있던 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를 그대로 뚫고 통과했던 레나스의 돌진이 멈췄다.
빙그르르. 탁.
지면에 떨어진 것은 깔끔하게 잘려나간 레나스의 팔이었다.
무장연금술로 빚어진 오토마타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기이한 일이군요. 당신이 제 시뮬레이션에 어긋난 행동을 펼치는 걸 보지 못했는데 결과가 이렇다니.”
“계속할 텐가.”
“아니오. 의미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골치가 더 아파 왔다.
분명 레나스가 골제의 품에 뛰어드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순간 누군가 애니메이션의 프레임을 잘라낸 것처럼 다음 순간엔 레나스의 팔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마치 강제로 ‘패배의 순간’이 덧씌워진 것처럼.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내게 했던 조언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자와 맞서게 된다면 그자가 구사하는 괴이한 능력의 정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니라. 짐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자와 혈투를 벌였으나 끝내 그 강함의 원류를 밝혀내지는 못했으니.’
르팔타커스조차 이 신묘한 현상을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는 건 사실인 듯 보였다.
“승복할 텐가, 슈바인 스트링거. 이제 자네에게 남은 시간이 극도로 적어 보이는데 말이야.”
골제는 내게 터벅터벅 걸어왔고,
나는 분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불사자의 축복을 받겠어. 하지만 이대로 층장의 열쇠를 포기한 건 아니야.”
“좋을 대로 하게나. 나는 자네를 이대로 잃어버리는 걸 막고 싶을 뿐이니까.”
골제의 무기가 원래대로 지팡이 형태를 되찾았다. 꼭대기에 매달린 염소의 코끝이 내 정수리에 다가와 접촉했다.
[용사에게 걸린 상태이상 저주가 해제됩니다.]
[용사의 생명력 수치가 불변으로 고정됩니다.]
[각종 상태이상으로부터 완전한 면역이 발생합니다.]
[HP의 최대치를 능가하는 일격을 제외한 모든 물리적, 마법적 타격을 무효화 합니다.]
시전자가 누구인지를 차치하고 본다면 토니아의 요정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장한 버프 효과였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불사자가 되는 대가가 그만큼 독특했으니까.
제일 먼저 내 피부가 투명해졌다.
그러고 나서 근육과 혈관의 존재 역시 풍화된 것처럼 사라졌다.
오직 삐걱이는 해골만이 몸을 받치고 있을 뿐이었다.
영락없는 스켈레톤 병사 1이 되었다.
“뛰어난 골격을 가졌군, 슈바인 스트링거. 내 군단에서 활약하는 모든 수하들을 통틀어 자네처럼 균형 잡힌 뼈를 가진 죄수는 없었는데 말이야.”
“감사의 표시는 하지 않겠어. 아직 당신이 날 살려주는 이유를 듣지 못했거든.”
골제는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이제부터 자네가 궁금해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지. 나를 따라오게나.”
그가 발걸음을 옮긴 방향은 만골전에서 이어지는 거대한 동굴의 입구였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 안쪽으로 이어지는 미지의 공간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은 녀석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나는 잘려나간 팔을 다시 접붙이고 있는 레나스에게 다가갔다.
“어때, 레나스? 꼴이 말이 아니지?”
“관객님의 생명 반응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움직이고 계신지 신기할 따름이군요.”
“나도 그래. 납량특집도 아니고…… 손가락뼈가 달그락거리는 게 오싹할 정도인걸.”
그때, 레나스가 내 손목을 휘감고 있는 검은색 수갑을 손으로 가리켰다.
“관객님, 잠시만요.”
“왜?”
“수갑 안쪽에 문자가 적혀 있습니다. 보셨습니까?”
“뭐라고?”
레나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 손목뼈와 맞닿는 수갑의 안쪽 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마치 연인의 커플링 안쪽에 기념일 숫자를 새기는 방식처럼 깨알 같은 문구가 각인돼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왼손의 수갑을 붙잡고 조금씩 돌려보기 시작했다.
천장의 야광석에서 뿜어지는 불빛 덕분에 음각된 문자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잊지 마, 슈바인 스트링거]
그것은 명백히 나에게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였다.
누가 나에게 이런 글귀를 남긴 걸까.
아니, 그것보다 대체 언제부터 내 수갑에 이런 글귀가 적혀져 있었던 걸까.
‘어쩌면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후보군은 한 명으로 좁혀진다.
푸르가토리움의 관리자인 교도관장.
반대쪽 수갑과 한 쌍의 족쇄도 샅샅이 살펴봤지만 글귀가 있는 건 왼쪽 수갑의 안쪽 면뿐이었다.
‘대체 뭘 잊지 말라는 거야? 힌트를 주려면 좀 자세히 설명해 줘야 될 거 아니야.’
나와 레나스가 주춤거리고 있자 앞서 걷던 골제 바르한이 등을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쩌면 이런 글귀가 내게만 적혀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골제의 왼쪽 손목을 가리켰다.
“당신 수갑을 좀 봐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