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공층전 (2)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푸르가토리움 0층 대기실에는 교도관이 있다.
축 처진 수염을 달고 영원한 낮잠을 꿈꾸는 존재. 나태에 짓눌린 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봉마연옥이라는 이명을 가진 감옥의 교도관이나 그 역시 한때는 죄수로 붙잡혀 들어온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상대를 학살한 장군, 생계를 위해 무감정하게 청부 대상의 목숨을 앗아간 암살자, 광기에 잡아먹혀 대륙을 파멸로 몰아넣은 마도사.
그런 흉악한 죄수들과 달리 이 교도관이 저지른 죄는 무척이나 독특했다.
그의 죄는 개체로서의 삶을 마친 뒤 윤회의 고리로 돌아가 생을 반복하는 것을 ‘거부’한 데에 있었다.
우주의 진리를 탐닉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지성과 재능을 가진 마법사였기에 그는 자신의 영혼이 벗어날 수 없는 환생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고 그날부터 그것을 부숴버릴 일에만 몰두했다.
이유인즉 지극히 단순하다.
거듭되는 환생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이전 생의 기억을 잃고 다시 희로애락의 바퀴에 짓밟혀야 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영혼의 고리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삼라만상의 질서를 어그러뜨린 대죄가 그를 비로소 원하는 자리에 놓도록 만들어주었다.
푸르가토리움은 처음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3층 대수림에 둥지를 틀고 있던 그를 찾아온 것은 무려 교도관장이었다.
‘또 죄수살해를 저지르셨군요. 그중 한 명은 야수왕이기까지 했는데.’
‘제 낮잠을 방해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갖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소원이라니 경이롭군요.’
‘질문입니까, 감탄입니까. 확실히 하세요. 그걸 구별하는 게 귀찮단 말입니다.’
‘감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던질 것은 질문이지요. 그대가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이뤄드릴 수 있습니다. 방해 없는 공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지요. 대기실의 교도관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입소한 죄수들을 심판의 문으로 안내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어때요, 생각이 있나요?’
‘번거로워 보이는데요.’
‘지금보다는 훨씬 쾌적한 환경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무한에 가까운 수명 동안 그 의식을 유지한 채 윤회의 고리에 흡수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요.’
‘맡겠습니다.’
그리하여 0층 대기실에도 담당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실제로 푸르가토리움에 입소하는 죄수들의 숫자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나태에 짓눌린 쥐는 원하는 만큼 낮잠을 잘 수 있었다.
가끔 들어오는 죄수들을 신속히 정식죄수로 배정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가끔 난동을 부리는 죄수들은 본인의 강력한 힘과 교도관장이 부여한 권한으로 소멸시켜버리면 그만이었다.
사랑스럽고도 안온한 날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그 평화가 오늘 무참하게 박살나고 있다.
*
“1층장 제르비어스 폰타인. 당신들이 이곳에 함부로 난입한 겁니다. 제 관할이 아닙니다.”
“그래도 원래 있던 층으로 돌려보내주면 좋잖아! 그리고 내가 1층장 관둔 지가 언젠데. 다른 층 일엔 전혀 관심이 없구나, 너.”
대기실 전체가 울리도록 고함을 쳐대는 폭렬마왕.
그가 귀찮아서 교도관은 은신마법을 사용했다.
놀랍게도 은발의 마검사가 숨어 있던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냈다.
“찾았다! 저 구석에만 중력파장이 일그러져 있어. 교도관이 누워 있는 것 같은데?”
아스티나 류. 마법진을 제법 잘 다룰 수 있는 듯 보였다. 방심할 여인이 아니었다.
귀찮았으나 더욱 뛰어난 고위마법을 구사해 은둔했다. 이번에야말로 편안한 낮잠을 자기 위해서.
그런데 코를 킁킁대는 소리가 자꾸만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너 목욕을 얼마나 안 한 거야? 꼬순내가 나. 그런데 희한해. 왜 그 냄새가 싫지 않지? 너도 여우로 변신하는 나처럼 쥐로 변신한 거야?”
“아닙니다. 우리 종족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
나태에 짓눌린 쥐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구미호 소년 캉이를 향해 대꾸해주다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이 소년이 자신에게 익숙한 냄새를 느끼는 것은 그가 오래 전 입소했던 한 죄수와 격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구미호 호이란.
캉이를 임신한 채 감옥에 붙잡혀 온 고강한 죄수였다.
‘모르고 있군. 자신의 모친이 누구인지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어.’
본능적으로 어미의 냄새를 그리워하는 환수의 후각은 이 대단한 교도관의 은신마저도 위협하고 있는 중이었다.
캉이에게 출생의 비밀을 말해주는 건 누구에게나 간단한 일이었으나 적어도 이 생쥐에게는 아니었다.
“물러서십시오, 귀찮단 말입니다.”
그러자 캉이의 귀에서 작디 작은 페어리가 기지개를 켰다.
“당신 말이야, 그 정도로 의욕이 없는 건 성격 문제가 아니라 질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내 요정술로 그 의욕을 제대로 키워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접촉을 허락해주겠어?”
페어리 퀸 토니아의 말이었다.
이 죄수는 5층 빙설협곡의 층장 크로톤과 한 몸이었던 페어리.
당연히 나태에 짓눌린 쥐는 자신을 짓누르는 ‘나태’를 고쳐주겠다는 요정의 말에 승복할 생각이 없었다.
‘소멸시켜 버리고 싶다.’
능력은 충분했다.
오만은 부지런한 자들의 특권이다. 반면 0층 교도관은 그 유난한 성격 때문에 본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과시할 일이 없었다.
베일에 싸인 9층 교도관을 제외한다면 나태에 짓눌린 쥐는 다른 교도관들과 정면으로 맞붙어도 패배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실제 손짓 한 번으로 이 네 명을 전부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곳은 다시 평화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권한이 없어.’
그가 마음껏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는 죄수는 아직 정식배정을 받지 못한 죄수에 한했다.
그러나 제르비어스와 토니아는 정식 죄수다. 한술 더 떠서 아스티나와 캉이는 애초에 죄수조차 아니었다.
즉 처치곤란의 네 명이 그의 보금자리를 계속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은신마법을 풀었다.
“제가 졌습니다. 당신들의 질문에 대답해 드리지요.”
“오오오오, 토니아!”
“잘했어, 캉이야. 우리도 못한 걸!”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도 몰려들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교도관에게 제르비어스가 다시 물어보았다.
“우린 언제 이 대기실에서 나갈 수 있는 거야? 응?”
“그건 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들을 내쫓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층간 이동의 유일한 수단은 심판의 문이고 지금 그 존재가 묵묵부답인 건 제 소관 밖이에요.”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했는지 아스티나 류가 손을 들었다.
“우린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동료야. 원래대로였다면 우리 등반대의 대장인 그 녀석과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안 되었다고. 영혼 폭발로부터 피신시켜준 곳이 이곳이었어. 제르비어스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여기가 감옥의 대기실인 줄도 몰랐을 거야. 페어리는 1층 화룡도로 이감. 거인들은 4층 만철도시로 이감. 그런데 왜 우리만 정식 층이 아닌 대기실로 날아온 거지?”
“등반을 하는 자들이 다시 층을 내려오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만 가능합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겠어?”
나태에 짓눌린 쥐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발화를 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곧 도달할 테지만 그렇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간 이 고통이 끝나지 않으리란 생각에 계속 답해주었다.
“파천황 르팔타커스를 아십니까? 그대들 등반대의 대장 슈바인을 가호하고 있는 전설적인 죄수 말입니다.”
캉이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설명이 빠르겠군요. 그는 9층까지 멈추지 않고 등반을 했으나 결국 꼭대기층에서 탈옥을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내려와야 했지요.”
“그리고 이곳 대기실에서 자살을 했지.”
“네. 그 장소가 바로 여러분 등 뒤에 있는 저 감방입니다.”
인간 두 명이 들어가면 딱 적당해보이는 삭막한 감방이 아스티나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렇다면 궁금해본 적 없습니까? 어째서 르팔타커스 시온처럼 강력한 죄수가 재도전을 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자살을 택하는 대신 성공할 때까지 탈옥을 시도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죠.”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의 시선이 부딪혔다.
듣고보니 맞는 말이었다. 르팔타커스에 대해서 자신들은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푸르가토리움의 엄격한 룰이 한 죄수의 ‘재등반’을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파천황뿐 아니라 슈바인 스트링거에게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슈바인은 화룡도에 다녀온 적이 있잖아? 그런데 왜 자격이 박탈되지 않은 거야?”
“그렇다면 분명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라는 신물의 특성을 이용한 거겠지요. 본체로 내려가지 못하는 대신에 능력이 제한된 그림자로 여행한 겁니다. 아스티나, 당신을 노렸던 8층의 죄수 설공을 떠올려 보세요.”
“설공…… 그랬구나.”
그대들에게 또 하나 물어보지요. 애초에 푸르가토리움이 왜 죄수의 등반을 허용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번엔 대답이 돌아왔다.
제르비어스가 뿔을 긁으며 대답한 것이다.
“교도관들의 유희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등반죄수에게 사사건건 개입할 필요가 없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후가 뒤바뀌었습니다, 제르비어스 폰타인. 유희를 위해 등반을 허락한 게 아니라 등반죄수들이 생겨나자 교도관들이 그들을 관조하는 재미를 깨달았다고 봐야지요.”
목적은 유희가 아니었다.
“등반죄수들은 움직이는 선전도구입니다. 탈옥을 꿈꾸는 죄수들을 단념시키기 위한 프로파간다용 광고판이지요. 등반죄수들은 각 층의 층장들을 꺾거나 설득해서 열쇠를 건네받아야만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등반죄수가 얼마나 강력한지, 혹은 지략이 좋은지 모든 죄수가 알게 됩니다.”
각 층의 정점에 오른 층장.
그런 층장을 굴복시키고 다음 층으로 건너갈 수 있을만큼 강력한 등반죄수.
그런 등반죄수마저도 결국 푸르가토리움의 9층은 돌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주는 절망과 체념. 등반죄수를 허용하는 본질적인 이유였다.
“아시겠습니까? 광고판은 한 번 사용하고 나면 가치를 잃어버리지요. 그래서 등반의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형량이 까마득하게 늘어난 죄수들은 절망에 몸부림치다 결국 파천황처럼 자살을 택하게 되지요.”
캉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형아는 나를 바깥 세상으로 데려다 준다고 했어.’
소년이 완벽히 이해하긴 무리였다.
슈바인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얼마나 막대한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누구도 성공한 적 없는 탈옥에 도전한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지금도 이 생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절반은 이해하지 못하는 캉이였다.
보통 이렇게 어려운 말이 나왔을 때 쉽게 설명해주던 슈바인과 강제로 떨어져 있는 지금 그 울적함은 배가 되었다.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당신들 역시 등반죄수로 분류돼 있습니다. 그래서 삼월초원이나 화룡도에 발을 들이면 등반이 실패로 간주됩니다. 교도관장은 바로 그 사태를 막기 위해서 대기실로 보낸 겁니다. 저에게는 아주 원망스러운 사태라 할 수 있지요.”
아스티나는 이 교도관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했다.
등반대의 대장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등반의 진정한 목적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초조한 건 슈바인으로부터의 소환이 예상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층의 정보를 엿보거나 할 순 없어? 하다못해 우리 대장이 지금 정확히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고 싶어.”
“알 순 있으나 여러분께 알려드리긴 곤란합니다. 특히 6층 교도관과 7층 교도관은 유독 까탈스럽거든요.”
잠시의 침묵 이후 교도관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여러분이 등반죄수 슈바인의 곁에 소환되려면 그가 가진 권능의 회복 시간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12시간 정도 남았군요.”
“뭐야? 그렇다면 아까 물어봤을 때 12시간 남았다고 말해주면 되잖아. 왜 모르겠다고 한 거야?”
나태에 짓눌린 쥐는 고민했다.
대답을 알고 있었으나 이걸 들려주면 이 네 명이 더욱 발광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결국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소환 권능이 회복되기 전에…… 그가 6층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