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공층전 (1)
층과 층이 벌이는 전쟁이라니.
그것은 내 의식이 한 번에 소화시키기 어려울 만큼 낯설고 거대한 개념이었다.
단군 할아버지와 제우스가 서로 멱살잡이를 하는 것처럼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일처럼 느껴졌다.
[6층의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가 죄수 앙굴렘의 말엔 과장이 없다고 전합니다.]
[7층 교도관인 ‘영겁에 똬리를 튼 용’과 자신은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으며 이 전쟁은 위층의 월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립니다.]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
녀석은 일전의 투표에서 내 편을 들어주었던 교도관들 중 한 명이었다.
이유는 자신의 층에서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태평할 것이라는 오만함에서 나온 것이지만 녀석의 한 표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지도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반면에 7층 교도관은 내 등반을 반대하는 쪽에 한 표를 던졌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인접해 있는 교도관끼리 오랜 앙숙이라는 건가.’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가 아래층의 생태계를 침범하면서 증오의 골이 깊어졌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앙굴렘 군단장, 전쟁에는 보통 전투가 따라붙게 마련이잖아요? 7층과 어떤 식으로 싸움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그건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는 게 빠를 거요.”
앙굴렘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약동하는 뿌리의 표면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봤을 때는 매끈한 기둥처럼 보였던 위그드라실의 뿌리는 일정한 박자로 꿀렁이고 있었다. 마치 유기체의 혈관이 심장의 펌프질로 맥동하는 것처럼.
“다섯 번째 뿌리가 우리 층의 생명력을 뽑아 올리는 중이오. 뿌리의 근처엔 지진이나 벼락, 돌풍 등 이상기후가 일어나기도 하지.”
“그렇다면 위험한 장소라는 소리인데요. 어째서 안전을 위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뿌리 바로 밑에 죄수들이 몰려 있는 겁니까.”
“모순적이지만 바로 그 안전을 위해서요. 생존을 위해서 뿌리를 떠날 수가 없는 것이지. 자, 보시오.”
앙굴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움직임은 일어났다.
성벽 아래의 투석기가 세차게 용틀임을 했다. 꼬아 놓은 밧줄 타래가 풀리면서 지렛대 끝 용기에 놓인 거석이 허공을 날았다.
꾸우우우웅.
표피에 타격을 입은 뿌리가 마치 통증이라도 느끼는 듯 꿈틀거렸다. 상처 입은 부위에서 연두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저게 뭡니까.”
“위그드라실의 수액이오. 우리는 주기적으로 뿌리에 상처를 내 흡수의 속도를 늦추고 있소.”
뿌리의 주변에 도열해 있던 해골 병사들이 분주해졌다. 수액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에는 무시무시한 병장기들이 들려 있다.
흉흉한 살기와 군세가 여기까지 전달돼 왔다.
연두색 수액이 뿌리 표면에서 뭉치더니 곧 살아 있는 생물체로 화하기 시작했다.
[위그드라실이 자가 방어를 위해 2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그림자의 이름은 사신수 ‘백호’입니다.]
[그림자의 이름은 사신수 ‘주작’입니다.]
하얀 털을 지닌 대호가 뿌리의 표면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추락과 동시에 내리친 앞발에 해골 병사 수십이 뒤로 튕겨 나갔다.
“대형을 유지하라! 2열 장창 부대 앞으로!”
하지만 해골 병사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능숙한 집단 진형을 갖춰 백호를 몰아세웠다.
나는 2층 삼월초원에서 사신수 중 한 마리인 현무와 맞붙었던 적이 있다. 거북이의 등껍질에 채찍 같은 꼬리를 지닌 위협적인 환수.
그런데 백호의 그림자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훨씬 더 강대했다.
‘본체가 있는 7층과 가까워져서인가.’
백호가 벌린 입에서 대포에 가까운 풍탄이 내쏘아졌다. 근거리에서의 물리력 또한 굉장한데 원거리에서도 치명적이라는 건 사신수의 공통점이기라도 한 건가.
“달라붙어라!”
나가떨어진 해골 병사들이 후열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포위진에 합류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마치 아무런 고통이나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듯.
“주작은 내가 잡는다!”
지면에 내려서지 않고 화염 깃털을 내쏘고 있던 주작을 향해 누군가가 날아올랐다. 뼈로 이뤄진 한 쌍의 날개로 비행하는 해골 병사였다.
앙굴렘이 내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2군단장인 드라우카스요. 익룡의 날개를 달고 있지.”
드라우카스가 과격한 몸짓으로 주작의 목덜미에 달라붙은 채 조르기 시작했다. 비틀대던 날갯짓으로 몸부림치던 주작의 몸통에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가 박혔다.
피육! 피유욱!
상처 부위에서 맹렬한 화염이 들끓었으나 달라붙은 드라우카스는 해골로 이뤄졌기에 불타오를 머리카락이나 피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소용없다! 너를 구운 닭대가리로 만들어주마!”
드라우카스의 뻥 뚫린 눈자위와 입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지속적으로 주작에게 타격을 입히자 사신수의 고도는 눈에 띄게 낮아졌고, 곧 다른 해골 병사들이 성벽에서 뛰어올라 주작의 꼬리에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일대를 붕괴시키며 폭주하는 두 환수의 그림자와 해골 병사들의 전투는 쉼 없이 이어졌다.
“앙굴렘,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내 임무는 등반죄수인 당신을 골제에게 데려가는 것이오. 여기에서 지체할 수는 없지. 게다가 다른 군단장들에게 환수의 그림자는 큰 문제가 되지 않거든.”
그의 말대로였다.
백호와 주작은 만만치 않은 괴력을 발휘하며 해골 병사들을 떨쳐냈으나 ‘죽지 않고’ 덤벼드는 병력의 물량 공세에는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소멸될 뿐이었다.
“알겠군요. 수액을 강제로 채취해 속도를 늦추고, 그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7층 환수들의 그림자를 상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토록 위험한 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소. 가끔 군단장도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들이 튀어나올 때도 있지. 예를 들면 폭룡이나 뇌룡처럼.”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땐 이 몸이 혼자서 상대한다네.”
묵직하고도 또렷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의 말이 들리자마자 앙굴렘과 해골 병사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지면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골제를 뵙습니다.”
“골제를 뵙습니다.”
붉은색 망토를 펄럭이며 한 사내가 도로 위에 서 있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역시 수갑. 그리고 뼈다귀 손이 쥐고 있는 지팡이였다. 보통 수정구가 있어야 할 꼭대기엔 염소의 두개골이 달려 있었다.
‘엄청나게 강력한 흑마법사다.’
아직 꽤 거리가 벌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골제의 전신에서 이글거리는 마력이 느껴졌다.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달빛 아래의 까마귀라면,
저자는 어둠 속에서 송곳니를 드러내는 대형 독사다.
“다들 일어서라. 병영 안에서 쓸데없이 허례를 차리다가는 기민하게 반응할 수 없는 법.”
파바밧.
모래 먼지가 해골 병사들의 발아래에서 피어올랐다. 엄청난 빠르기의 차렷 자세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소녀의 머리가 달린 호버 보드에 계속 올라타 있는 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레나스의 등 위에서 뛰어내렸고 오토마타는 다시 인간 형태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상대는 레나스에겐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다가왔다.
“나는 6층장 바르한이라 하네. 기다리다 지쳐 이렇게 마중을 나왔지.”
“슈바인 스트링거. 등반죄수다.”
“자네의 소문은 익히 들었어. 아래 층에서 영혼 폭발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서 자칫 등반이 멈출 뻔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지.”
크로톤과의 싸움을 말하는 거였다.
아마 6층 교도관이 층장인 이자에게 전해준 것일 터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무척 서운했을 거야. 자네가 푸르가토리움에 입소하는 순간부터 이 만남을 학수고대해왔거든.”
“이쪽도 만나서 반갑다고 말해주고는 싶은데. 솔직히 그보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수상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야.”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등반죄수로서 내 앞까지 오지 못했을 테니까.”
그가 망토를 한 차례 펄럭이며 내게 손을 뻗었다.
“만골전으로 안내해주지. 대화는 그곳에서 나누는 게 어떤가. 자네의 사정 또한 느긋할 상황은 아닐 터이니.”
내 체력바가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용사의 육체가 항거불능의 상태이상에 걸려 있습니다.]
[HP가 1초에 1포인트씩 감소됩니다.]
[HP: 2,365/9,999]
*
만골전은 놀랍게도 뿌리의 내부에 구멍을 뚫고 만든 거대한 회랑이었다.
제단에 가까운 옥좌 뒤에 보이는 큼지막한 동굴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핏 보이는 동굴의 계단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위를 향해 뚫려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은 자네에게 걸린 저주를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겠지.”
골제의 키는 나나 앙굴렘보다 작았다. 레나스와 비견될 정도의 체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인에게 압도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순간 방심했다가는 바로 치명적인 비수가 내 미간에 꽂힐 것만 같은 존재감.
“당신이 죄수들에게 불사자의 축복을 내려준다고 들었어.”
“맞네. 리치로서 습득한 흑마법을 이용해 죽음을 막아주었지.”
“원리가 뭐지?”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네. 저잣거리의 마술사에게도 트릭을 말해달라는 건 실례인데 하물며 마법사에게 그런 질문은 실례 아닌가.”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본질을 회피하고 있다.
나는 그 점을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판돈에 걸린 게 내 목숨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원리를 알 수 없는 흑마법에 하나뿐인 소중한 몸을 내어줄 수는 없거든.”
“이쪽도 강요할 마음은 없다네. 선택은 자네가 하는 것이니까. 불사의 축복을 입는다 해서 내 노예가 된다거나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조건 같은 것은 없어. 바깥의 군단병들은 모두 자의에 의해 나를 따르고 있는 거야. 스스로의 의지로 이 전쟁에 나서고 있는 거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40여 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HP가 0이 되고 영락없이 시체가 되어 버린다.
인벤토리에 있는 3개의 엘릭서를 떠올렸다.
아깝긴 하지만 엘릭서를 마신다면 시간을 조금 더 벌 수는 있을 것이다. 한 병에 3시간씩 말이다.
그때 골제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복 약물에 의존할 생각이라면 넣어두게. 밑 빠진 독에 성수를 붓는 셈이니까. 내 축복을 입으면 그 어떤 약물에도 더 이상 기댈 필요가 없어진다네. 말 그대로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니까. 유일한 단점이라면 자네의 그 수려한 외모가 유지되지 못하다는 점 정도이겠군.”
“……당신들처럼 백골이 되는 건가?”
“그렇다네.”
“시간이 엄청 오래 흘러서 풍화된 게 아니고 곧장?”
“음. 곧장 그렇게 된다네.”
불사자의 축복을 입으면 7번 방의 동료 비르카와 같은 해골만 남게 된다는 뜻이다.
그 상태로 아스티나나 제르비어스가 돌아와 스켈레톤이 된 나를 보면 어떤 반응을 짓게 될까.
‘역시 순순히 이 녀석의 술수대로 움직여줄 순 없겠어.’
나는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엘릭서가 아닌 마검 디아볼릭이었다.
그 의도는 명백했고 골제 바르한은 그것을 읽어내지 못할 만큼 아둔한 자가 아니었다.
“굳이 부서질 일 없는 돌다리를 두드려 보겠다는 건가.”
“응. 너를 40분 안에 쓰러트리고 층장의 열쇠를 강탈한다. 그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 저주를 피해낸다. 내게는 이쪽이 더 직성에 맞는 것 같아서.”
이렇게 허풍을 치긴 했으나,
과연 지금의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스킬 대부분이 봉인된 데다가 여기는 적지의 한복판이다. 골제가 나와 일 대 일 대결을 받아주지 않고 병사들을 불러 집단 린치를 가한다면 그대로 게임 끝.
하지만 골제는 혼자서 자신의 안방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그렇다는 건 이런 사태를 충분히 예상했고,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소리.
“층장의 열쇠를 걸고 도전하겠다, 골제.”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자의 힘을 알아놔야 한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