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불사자의 사막 (2)
[6층 만골사막에 입장하였습니다.]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온 이래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라면 단연코 포탈을 빠져나온 직후일 것이다.
새로운 층에 들어선다는 것은 완전한 미지의 장소에 불시착하는 탐험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말 그대로 불시착이었다.
“어어엇?”
머리카락이 거칠게 정수리 위로 솟구친다.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발아래 까마득한 지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젠가 포탈을 빠져나왔을 때 허공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건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짜릿한 낙하에 돌입한 스카이다이버의 자세에서 냉큼 균형을 잡아 똑바로 섰다.
곧바로 경공술을 펼치려 했으나,
[천마어기행공을 시전할 수 없습니다.]
[친구 아스티나 류와 같은 층에 있지 않습니다.]
아스티나가 현재 내 곁에 있지 않다는 의미를 뼈아프게 체감할 뿐이었다.
추락은 아찔한 속도로 이어졌다.
아무리 용사의 대단한 육체라 하더라도 이만한 높이에서 지면에 충돌한다면 무사할 수 없다.
다행히도 내 주머니엔 믿음직한 ‘낙하산’이 상시 대기 중이었다.
“레나스!”
철컥철컥.
인벤토리에서 해방된 레나스가 머리 위에서 날개를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연금무장술 살상 기능 해금]
[형태변환 D: 비행 특화형]
레나스의 단단한 금속 팔이 내 허리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내 추락 속도를 세심하게 계산한 더할 나위 없는 도킹이었다.
네 쌍의 금속 날개에 부착된 분사구가 역추진의 불꽃을 내뿜자 우리는 안전하게 지면에 다가설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관객님.”
레나스가 날개를 접으려 하자 나는 먼저 황급히 그것을 말려야만 했다.
“기다려 봐. 조금만 더 이대로 비행을 유지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고급 부스터 팩을 등에 매단 것과 같은 셈이었다.
레나스와 나는 지면으로부터 200여 미터 상공에 떠 있었는데, 발아래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이었다.
‘분명 이 층의 이름이 만골사막이라고 했지.’
건조한 삭풍이 얼굴을 때렸다.
나는 단탈리온을 꺼내 펼쳐 들었다. 그런데 녀석은 내가 묻기도 전에 속필로 비명을 내질렀다.
- 아아아아악! 용사님, 살려주세요.
“왜 그러는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
- 잊으셨나 본데 제가 아무리 대단하고 뛰어난 지식의 전도사인 것은 맞지만 본체는 섬유질로 이뤄진 서적이란 말입니다. 강수량이 적어 극도로 건조한데다 이런 무자비한 직사광선이라니. 여긴 제게 너무 해롭습니다. 엉엉. 온몸이 푸석해져서 찢어지면 어떡해요.
어째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마치 피부 건강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딸을 강제로 사막 여행에 데리고 온 철부지 아빠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면 빨리 물을게. 저 사막의 모래에 내려서도 괜찮을까? 이전 층에서처럼 사악한 술법 같은 게 걸려 있을지 모르잖아.”
-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 모래가 용사님의 피부에 닿자마자 저주에 걸리거나 함정에 걸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막이다, 이런 건가?”
- 아니오. 그렇지는 않아요. 열대 기후와 퇴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막과 달리…… 이 층의 자연환경은 강제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원래는 제가 배정받은 삼월초원 못지않은 마나 스트림이 휘몰아치는 장소였으나 초월적인 힘의 개입으로 생태계가 붕괴되었어요.
“애초에 사막이 아니었던 곳을 이렇게 만들 정도의 힘이라고?”
- 용사님이 배운 무공 중에 ‘천마흡성대법’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접촉한 순간 생기를 빨아들이는 흡성대법에 당한 자는 어떻게 되나요?
“내공을 빼앗기게 돼.”
- 그것이 오랜 시간 이어지면 폐인이 되거나 사망하게 될 겁니다. 6층 만골사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그것을 엄청난 규모로 확대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이 층의 생태계 전체가 뱀파이어에게 피를 빼앗긴 미라에 가깝습니다.
단탈리온의 말은 갈수록 무시무시해졌다.
- 최대한 빨리 이 층을 벗어나시길 추천 드립니다, 용사님. 이 사막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용사님의 육체에 치명적인 독소가 쌓일 겁니다.
“사막을 밟아도 저주에 걸리는 건 아니라며?”
- 제가 드린 말씀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이 층에 들어서신 순간 용사님께서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저주에 걸리신 겁니다.
이 설명이 뜻하는 바는 곧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띠링!
[용사의 육체가 항거불능의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HP가 1초에 1포인트씩 감소됩니다.]
[6층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이 상태 이상의 효과는 지속될 것입니다.]
내가 알파 테스터로 활동할 때 플레이했던 게임들이 떠올랐다. 몇몇 게임들에선 체력이 도트 데미지로 깎이는 스테이지가 존재했다.
이 사막이 그런 스테이지라고 한다면 말이 된다.
보이지 않는 타임 리미트가 존재한다. 생존하는 방법은 단 하나, 최단 시간에 보스를 때려잡아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방법뿐이었다.
“누군가 내 생명력을 조금씩 빨아들이고 있어. 그 범인을 알 수 있나?”
- 용사님이 계신 곳의 11시 방향을 살펴보십시오.
마도서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챙을 만들어 지평선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까마득히 먼 곳에 여러 개의 검은 기둥이 하늘까지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기둥? 탑?
그것은 제사용 향로에 꽂힌 얇은 향초를 연상케 했다. 빙수 위에 꽂힌 막대초콜릿 같기도 했고.
기둥 끝을 포착해보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마치 우주와 연결된 궤도 엘리베이터처럼 대기권 너머에까지 닿아 있는 듯하다.
지평선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저 기둥의 둘레가 어느 정도일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저게 이 층 전체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주범이군? 정체를 알 수 있나.”
- 용사님이 그만한 대가를 갖고 잊지 않습니다.
이미 몇 차례 문답을 통해 단탈리온은 적지 않은 MP를 가져간 뒤였다.
마도서를 인벤토리에 넣은 뒤 사막에 내려섰다.
백색의 하얀 모래가 수갑에 달라붙었다.
당면한 숙제는 하나였다.
저 심상치 않은 기둥을 향해 달아날 것인가.
아니면 발상의 전환으로 기둥의 정체를 직접 밝히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상한 근원지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옳겠으나 내 목적은 일신의 안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탈옥이다.
푸르가토리움에선 문제 옆에 해답이 있을 경우가 더 많았다.
게다가 계속 깎여나가는 체력이 문제였다.
HP가 0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65분. 3시간 안에 다음 층으로 건너가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한 번의 선택 미스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직전 층에서 소중한 1코인을 사용해 버렸으므로 이제는 한 번 한 번의 선택이 더욱 중요해졌다.
‘토니아라도 곁에 있었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텐데.’
가장 최근에 친구가 된 페어리 퀸을 정수리에 얹고 다녔다면 이 상태 이상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들을 소환하려면 앞으로 19시간이 더 필요하다.
“어디까지 난이도를 올릴 셈이냐, 빌어먹을 감옥. 혼자서 다음 층까지 올라야 한다고?”
무극파천공도, 중력마법도, 업화의 쌍장이나 여우트림도 모두 봉인되었다.
층간 구역에서 홀로 남겨졌을 때보다 훨씬 더 아득한 외로움이 나를 휘감았다.
“관객님, 여러 개의 생체 반응이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때,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한 건 레나스의 경고였다.
“그래? 분명히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거야?”
“일곱 개의 방위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중입니다. 관객님을 발견하고 접근해 오는 게 분명합니다.”
곧 모래 언덕 너머에서 여러 개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처음 느낀 감상은 상어의 등지느러미였다.
마치 파도를 헤치며 선원을 공격하는 식인상어처럼 무언가가 모래 속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기감을 펼칠 수 있었더라면 더 빨리 반응할 수 있었겠지만 친구들의 스킬이 봉인되었다는 단점은 이런 방면에서도 리스크를 지게 했다.
차캉.
디아볼릭을 꺼내 들며 레나스에게 말했다.
“내가 신호하기 전엔 공격하지 마.”
아직 상대의 정체를 모른다.
4층인 만철도시에서 마차를 타고 우릴 마중 나왔던 암스트롱처럼 우호적인 안내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느러미 속에 있던 형체가 모래 위로 튀어나왔을 때 나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안내자라고? 그럴 리는 없겠는걸.’
그것은 코끼리만 한 덩치를 가진 대형 전갈들이었다.
내가 지느러미라고 생각했던 것은 둥그렇게 말려진 녀석들의 꼬리였다.
쉬이이이익!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대형 전갈이 위협적인 집게발을 휘둘렀다.
‘모든 스킬을 다 빼앗긴 건 아니거든?’
나는 내 모든 움직임의 근간이 되는 존재의 스킬을 빌려왔다.
[친구 르팔타커스 시온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만전불패의 검술 Lv. 6]
유려한 움직임으로 대형 전갈의 집게발을 튕겨내자 녀석은 배를 드러낸 채 버둥거리다가 곧 몸을 원래대로 뒤집었다.
“혹시나 해서 편견 없이 묻는 건데, 너희 말할 줄 아냐?”
대답은 다른 방향에서의 꼬리 공격이었다.
현무의 꼬리 공격 못지않은 빠르기였으나, 지금의 내 민첩 스탯은 삼월초원에서 성장했을 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훌쩍 뛰어 그것을 피한 뒤 레나스에게 소리쳤다.
“그냥 몬스터다, 레나스. 없애 버려!”
퍼어어어억!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두 마리의 대형 전갈이 뱃가죽이 꿰뚫린 채 죽어 나갔다.
어느새 원거리 특화형으로 변신한 레나스가 초전자포로 녀석들을 지져버린 것이다.
내게만 들리는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6층의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가 등반죄수를 주시합니다.]
새로운 교도관이 나를 발견했다는 메시지였다.
이끼라서 그런가.
이제야 궁둥짝을 드러내는 건 너무 늦은 거 아니야?
[6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에게 층장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층장 바르한이 등반죄수에게 말하기를…….]
멍하니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덤벼오는 대형 전갈의 집게발을 디아볼릭으로 잘라내야 했기 때문이다. 갑각류의 표피를 찢어내는 감각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절대 전갈을 해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사막의 전갈을 죽일 경우 감당할 수 없는 생물을 깨우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에에엑? 뭐라고?
치이이이익.
오체분시된 대형 전갈의 시체에서 초록색 진액이 뿜어져 나와 사막의 모래 속에 스며들었다.
“레나스, 잠깐만!”
나는 다급히 외쳤으나 레나스가 양손의 대포를 철컥하고 거두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늦었다.
일곱 마리의 대형 전갈은 이미 숨통이 끊어져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망할 교도관놈. 분명 일부러 층장의 말을 늦게 전달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하필 내가 대형 전갈 한 마리를 죽인 타이밍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레나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육중한 무게 때문인지 이 오토마타는 사막에 내려서는 대신 계속 비행모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객님, 이 전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체반응이 포착됐습니다.”
지금껏 레나스가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막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전갈의 체액 냄새를 맡고 몸을 일으킨 것이다.
우르르르르르.
심상치 않은 지진과 함께 눈앞에서 믿기 어려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직경 수백 미터의 모래언덕이 느닷없이 출몰한 것이다. 게다가 그 언덕은 점점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초 단위로 지형이 바뀌는 셈이었다.
‘생물이라고? 저게?’
그것은 존재만으로도 자연에 모독을 저지르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일종의 신비를 획득해내고 있는 괴수였다.
촤아아아아아!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모래벌레가 사막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