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불사자의 사막 (1)
“영혼의 기억에서 보았겠지요.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약속을 한 건데?”
기억 속에서 내 영혼은 자신을 데리러 온 교도관장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그전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평범한 인간 박상식이 차원감옥의 교도관장이며 우주의 창생사멸을 기록한 아카식 레코드를 주무르는 관리자와 어떻게 만난 적이 있다는 걸까.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는 당신이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내 기억이 재현한 고시원 단칸방의 모습을 떠올렸다.
꿈속에서처럼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게 재현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확인한 기억이 없는 상희의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내 기억을 복원한 게 아니야. 다른 관찰자, 혹은…….’
아카식 레코드.
나는 영혼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그 우주의 대도서관에 접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 기회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때는 이번에 알지 못했던 과거까지 파헤칠 수 있으리라.
[당신은 현재 5층 빙설협곡의 유일한 죄수입니다.]
[자연히 5층의 층장이 되었습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층장의 열쇠가 양도됩니다.]
손등의 붉은 반점이 총 다섯 개로 늘어났다.
기나긴 싸움은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고,
나는 다음 층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은 것이다.
[메인퀘스트 #2. ‘열쇠 수집’을 5/9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스탯 하나의 x2 효과, 혹은 스탯 하나의 한계돌파]
크로톤과 맞부딪혔을 때 느꼈던 것은 분명한 힘의 격차였다.
다음 층에서 더 강력한 층장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상정한다면 파괴력이 가장 시급하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근력의 한계돌파를 선택했다.
[근력의 한계 수치가 사라집니다.]
[용사의 성장보정치가 합산되어 근력이 오릅니다.]
[이름: 슈바인 스트링거]
[HP: 9,999]
[MP: 14,199]
[근력: 1,485]
[민첩: 870]
999였던 근력이 1.5배에 가깝게 성장했다. 한계에 막혀 있던 성장이 한꺼번에 이뤄진 순간의 고양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축하드립니다. 제가 드린 육체가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군요.”
“처음 이 몸을 얻게 되었을 땐 게임 캐릭터에 빙의했다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 내 영혼을 푸르가토리움에 불러들이기 위해 네가 빚어낸 일종의 그릇인 거지?”
“그렇습니다.”
“그릇을 만든 장인은 언제든 그것을 부술 수도 있지. 내 생살여탈권을 네가 쥐고 있다고 해석해도 되나?”
이것은 나름 중요한 질문이었다.
기계의 전원 버튼을 눌러 작동을 정지시키듯 내 목숨이 교도관장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내겐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곰인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죠.”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지구에 남아 있는 당신의 동생을 예로 들어보죠. 지금 당신의 육체라면 그 행성에서 손쉽게 대학살을 벌일 수 있을 겁니다. 문명의 존속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밸런스를 붕괴시키는 수준이죠. 그렇다고 해서 지구로 돌아가면 동생을 죽일 수 있나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자신과 똑같은 대답을 하자 곰인형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제겐 당신뿐 아니라 이 감옥 전체를 통째로 없애버릴 능력이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곧 필요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난 너의 가족이 아니야. 내가 네 목에 칼을 들이대도 그 능력을 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전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도 장담할 수 있나요?”
“뭘?”
“당신이 제 가족이 아니라고 무슨 근거로 확신하냐는 거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녀석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곧 이 초월자가 날 놀리기 위해 농담을 던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망할 자식. 이딴 장난은 악취미다.”
“후후후, 죄송합니다. 사과의 의미로 한 가지 힌트를 드리지요. 당신의 육체는 화신체 전용으로 만들어진 유기체입니다. 단순한 그릇과는 달라요.”
그러면서 곰인형은 또 하나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이 투표로 타천시킨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이 영혼 폭발을 일으킨 진짜 이유를 아시나요?”
“그야 날 제거하기 위해서…….”
“그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의 화신체로 당신의 육체를 갖고 싶어했어요. 최고의 샷건을 탐내는 카우보이의 심정에 비유하면 얼추 비슷할 겁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엔 일리가 있었다.
만약 날 없애버리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크로톤과 대결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해서 힘의 균형을 바꿔버리는 게 더욱 합리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 교도관은 대결에 끼어들지 않았다.
“영혼 폭발로 주인이 소멸되어버린 육체를 쟁취하려 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교도관장인 제가 빚어내었고 수왕 르팔타커스 시온의 간택을 받은 주인공입니다.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앞으로의 등반에도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게 되는 걸까?
[현재 이 층엔 교도관이 부재중입니다.]
[죄수를 주시할 존재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투표를 제안해 교도관 하나를 필멸자로 떨궈버리는 걸 모두가 목격했으니, 교도관들의 경계는 더욱 올라갔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이도가 쉬워질 일은 없겠지.
“그나저나 네가 이렇게 내 옆에 있는데도 메시지가 전달되는 건 좀 기묘한걸?”
“저는 동시에 여러 장소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기억 속에서 내가 본 그 소녀처럼?”
“그 또한 저의 무수한 형체 중의 하나이지요.”
알면 알수록 이 곰인형의 본체인 교도관장은 신비로운 존재였다. 과연 이 녀석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내는 날이 오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곰인형의 등 뒤에 포탈이 형성되었다.
“이 층엔 이제 교도관이 없으므로 제 권한으로 포탈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더 이상 이 혹한 지대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레나스를 인벤토리에 수납한 다음 포탈 안으로 들어섰다.
*
익숙한 거실의 소파에 난 홀로 앉아 있었다.
“이 정도로 심심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아스티나, 제르비어스, 캉이가 없으니 이층집의 거실은 황량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층간 구역에 혼자 떨궈진 적은 처음인 것이다.
당연히 처음엔 친구들을 이곳으로 소환해보려 했다.
[친구 아스티나 류를 옆으로 불러들일 수 없습니다.]
[친구 소환의 권능을 재사용하려면 앞으로 19시간 38분 남았습니다.]
[현재 용사가 거한 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층간 구역. 다음 층에 발을 들여야 재사용 대기 시간이 차감됩니다.]
5층에서 제트카이저에 친구들을 탑승시키느라 미리 사용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쿨타임이 다시 차오를 때까지 기술을 쓸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야 여기 계속 머무를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곧바로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 냉동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너무 작아서 발견하지 못 할 뻔했다.
손톱보다 작은 하얀 물체.
치아였다.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당신을 가호하고 있는 파천황의 권능이 한층 두터워집니다.]
[권능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다른 층에 머무르는 친구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연결된 친구는 반투명한 영체로 소환되어 교감할 수 있으며, 그 어떤 물리력으로도 소환 중인 친구를 해칠 수 없습니다.]
무척 유용해 보이는 능력이 또 하나 업그레이드 되었다.
다른 층에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2층 삼월초원에 남겨두고 온 두 명의 스승님이었다.
천마 류운학과 마녀 일레인 쿠디슈.
‘두 분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어쩌면 이미 이 시간선의 아스티나를 출산했을지도 모르겠네.’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를 찾을 때마다 생기는 부가기능들은 언제나 해당 층에서 내게 역전과 반격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친구를 내 옆으로 불러들이는 권능이 이전 층인 빙설협곡에서 제트카이저의 최종합체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렇다는 건 6층에선 지금껏 만나온 친구들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응?”
냉장고의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냉동칸의 얼음들이 스르륵 모여들더니 한 사내의 얼굴을 만들어내었다.
용모만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괴력이 느껴지는 사내.
“순조롭게 짐의 기원검 파편을 모으고 있구나.”
나는 그 얼굴의 장본인을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르팔타커스? 이렇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겁니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 그대의 주변에 다른 죄수들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지.”
“벌써 당신이 얘기했던 시험의 때가 온 겁니까?”
르팔타커스의 얼굴을 한 얼음 덩어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고드름처럼 바닥에 떨구어졌다.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렇게 등반을 계속한다면 머지않아 조건을 충족하는 때가 올 터.”
“그렇군요.”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음 층인 6층에 관해 그대에게 조언해줄 것이 있기 때문이다.”
파천황은 교도관장과 달리 내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퀘스트를 주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을 모을 수 있도록 권능을 조금씩 빌려줄 뿐.
그런 그가 꺼낸 ‘조언’이라는 말의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듣겠습니다.”
“짐은 무패의 검투사로 본래 있었던 세계를 호령했다. 이 감옥에 붙잡혀오기 전까지 한 번도 패배해본 적이 없지. 그것은 수갑을 차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느니라. 다만…….”
“다만?”
“무패라는 개념은 곧 짐의 격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하나 그것이 모든 적수를 살해했다는 뜻은 되지 않아. 짐이 이 감옥에서 굴복시키지 못한 단 한 명의 죄수가 있느니라. 우리의 승부는 치열했고 상대가 먼저 검을 거두었으나…… 짐은 그걸 승리라 칭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무승부겠지.”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과 무승부를 일궈낸 죄수가 있다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8층의 죄수인 뇌신 지드조차 전성기의 파천황과 맞붙어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내 관점으론 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맞대결이었다.
그런데 8층의 죄수도 어렵지 않게 제압한 르팔타커스를 고전시킨 죄수가 6층에 있다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분명히 일어난 일이다. 짐의 조언은 이것이다. 그자와 맞서게 된다면 그자가 구사하는 괴이한 능력의 정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니라. 짐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자와 혈투를 벌였으나 끝내 그 강함의 원류를 밝혀내지는 못했으니.”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제 입장에서는 수백 년 전의 까마득한 과거입니다. 어쩌면 그 죄수는 이미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거나…… 다른 죄수에게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요?”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파천황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자는 불사자(不死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