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망각된 약속, 약속된 망각 (2)
아스티나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가까스로 내가 가진 독특한 권능 하나를 상기시키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잊었어? 나는 천마 설공을 쓰러트리고 1코인을 얻었잖아. 목숨 하나가 더 있는 셈이야. 이 빙설협곡에서 한 번 죽어도 되살아날 수 있어.”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다름 아닌 이 교도관장이 내게 건 보상으로 얻은 거니까. 그렇지?”
곰인형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일전에 교도관장의 진정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이상 녀석을 완전히 신용하는 건 위험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아스티나는 바깥 세계에서 이 감옥에 붙들려 온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수감되는 순간 교도관장의 압도적인 위력 행사를 체험하게 되는 죄수들과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교도관장, 널 믿어도 되겠어?”
“어차피 제가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저를 신용하고 있지 않잖습니까?”
“……슈바인이 잘못되면 천마와 마녀의 이름을 걸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감옥 전체를 헤매서라도 널 찾아가겠어.”
이 순간 아스티나가 내보인 살기는 진짜배기였다.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아스티나, 너 이 곰인형을 처음 봤을 때는 엄청 귀여워하면서 한 번만 안아봐도 되냐고 하지 않았어?”
“입 닥쳐. 지금 농담할 때야?”
쿠르르릉.
[영혼 폭발까지 남은 시간: 03분 17초]
남은 시간이 이제 3분 남짓이 되었다.
크로톤의 목숨이 등불처럼 꺼지는 순간 저 빛 덩어리는 협곡 전체에 종말을 가져올 터였다.
나는 진지하게 아스티나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그랬지? 1코인을 사용할 때는 꼭 너에게 허락을 받겠다고. 지금이 바로 그때야. 허락해줬으면 좋겠어.”
“……오래 기다리게 하면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곰인형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친구들은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후우. 영영 작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몰라.”
“슈바인, 아직 당신이 어디로 보낼지 정하지 않은 죄수가 한 명 존재합니다. 그걸 잊고 있는 것 같아서 굳이 말씀드리는 겁니다.”
“남아 있는 죄수? 설마 여기 레나스를 말하는 거야?”
만철도시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전투형 오토마타 레나스는 사라지지 않고 내 옆에 고고히 서 있었다.
“아니오. 이 인형에겐 영혼이 없기에 영혼 폭발에 휩쓸려도 멀쩡할 겁니다. 죄수도 아니고요. 제가 언급한 자는 페어리 퀸 토니아입니다.”
눈이 크게 뜨였다.
“토니아가 아직 살아있어? 저 덩어리에 삼켜져서 죽은 줄 알았는데.”
“페어리 퀸은 자신의 쌍둥이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크로톤의 의식이 남아 있을 때 그가 최후의 정령술을 발휘해 그녀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이죠.”
토니아의 계획이 어그러졌다?
두 쌍둥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층에서 계속 나를 도와주었던 토니아를 폭발에 휩쓸리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럼 뭘 망설이는 거야? 당장 토니아도 0층 대기실로 보내줘!”
“이감 조치에는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지요. 하지만 토니아는 현재 의식을 잃고 기절한 상태입니다. 그녀를 깨우지 않으면 영혼 폭발의 희생자가 될 테지요.”
“이런 젠장!”
기절한 상태라면 친구 곁으로 순간이동하는 파천황의 권능 또한 무용지물이 된다.
나는 천마어기행공으로 훌쩍 날아오르며 레나스를 향해 소리쳤다.
“레나스! 토니아를 찾을 수 있겠어?”
“생체 신호를 찾는 탐지기능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 거성의 외부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크로톤의 폭주하는 육신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걸로 추정됩니다.”
레나스의 차분한 대답이 내 위장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기암거성 전체를 뒤덮은 채 꿀렁이는 저 살덩어리 어딘가에 토니아가 있다는 소리다.
“느껴지지 않아.”
기감을 펼쳐보아도 페어리의 미약한 존재감을 읽어내는 건 무리였다.
망망대해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인 것이다.
[영혼 폭발까지 남은 시간: 02분 21초]
큰일이다.
기절한 토니아를 찾아내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일에 주어진 시간이 극히 짧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크로톤의 검은 살덩어리에 내려선 뒤 사자후를 내질렀다.
“토니아아아! 어디에 있는 거야! 들리면 대답해!”
내공을 잔뜩 실은 외침이었으나 되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아도 내 검지보다 작은 페어리를 기적적으로 찾아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곰인형이 물었다.
“토니아는 스스로 크로톤과 함께 죽기를 선택했습니다. 슈바인 스트링거, 당신에게 그녀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딴 건 몰라! 그래도 크로톤이 토니아를 밀어냈다는 건 마지막 순간에 쌍둥이 남매를 살리겠다고 결심한 거잖아? 아니면 토니아가 갑자기 살고 싶어져서 마음을 바꾼 걸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나도 포기할 수는 없어.”
“크로톤이 죽으면 페어리 퀸에게 남은 삶의 이유는 이제 실오라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아요. 당신이 그녀에게 그 이유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건가요? 이건 가벼운 질문이 아닙니다.”
“그래! 왜 나를 살렸냐고 욕한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어. 평생 비난해도 괜찮으니까 어디에 있는지 말해줘!”
묵묵히 내 외침을 듣고 있던 곰인형은 차분한 눈동자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분명 전지의 권능을 가진 푸르가토리움의 관리자. 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건 제게 무척 간단한 일이지만 당신에게 알려주는 것은 죄수의 운명에 간섭하는 일이 될 겁니다.”
“빌어먹을. 안 알려줄 거라면 시간을 뺏지는…….”
“하지만 당신에게는 제게 비견될 만한 전지의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떠올리세요.”
아! 그렇구나.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내 시야가 너무 매몰돼 있었다.
인벤토리를 열어 거친 동작으로 마도서를 끄집어냈다.
“단탈리온! 토니아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줘.”
- 용사님,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그게 그렇게 비싼 질문일 리 없잖아.”
- 아닙니다. 가만히 기다리시기만 하더라도 페어리 퀸 토니아는 용사님 눈앞에 나타날 겁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토니아를 찾는 일이 망망대해에서 기름 한 방울을 퍼올리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크로톤의 살덩어리가 나를 중심으로 파형을 일으키며 꿈틀대더니 곧 작은 기둥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 기둥에는 날개를 펼친 채 눈을 감은 토니아가 누워 있었다.
“토니아?”
내가 조심스레 손바닥을 내밀어 토니아를 받아들자 기둥은 곧 사르락 허물어졌다.
교도관장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마도서 단탈리온은 아무런 물리력이 없다.
즉, 이 현상에 개입한 주인공으로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크로톤, 너인가?”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버린 쌍둥이를 죽이지 않고 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 적수였던 내가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건 의식적으로 한 행동일까.
아니면 남매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단말마였을까.
어찌 되었든 지금은 토니아를 깨워야 할 차례였다.
“일어나, 토니아.”
만약 제르비어스를 깨워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뺨을 후려치면 됐을 것이다. 상대가 아스티나였어도 어깨를 거칠게 흔들면 되는 일이었을 거고.
하지만 너무도 미약한 페어리를 깨우는 일엔 어느 정도의 힘을 줘야 하는지 난감했다.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목뼈라도 부러트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영혼 폭발까지 남은 시간: 1분 55초]
레나스에게 부탁해서 전류를 흘려보내 볼까?
아니면 혈도를 강제로 풀어내는 것처럼 내공을 주입시킬까?
페어리의 신체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 어느 것도 확실한 방법은 되지 못했다.
그때, 번뜩이며 떠오른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이 페어리의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가능할지 따지는 대신 일단 시도해봤다.
[친구 토니아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요정술 다섯 갈래 - 풍령의 치유]
언제나 내 머리숱에 달라붙어 상처를 치유해주었던 토니아의 요정술.
아무리 지쳤을 때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어주었던 정령의 힘이 이번엔 내 손바닥을 통해 토니아에게 전해졌다.
페어리 퀸의 눈이 스르륵 하고 떠졌다.
“토니아, 정신이 들어?”
“이게 대체…… 크로톤은 어떻게 됐어?”
“너에게 날 보냈어. 이대로라면 영혼 폭발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교도관장이 필요한 정보를 알려줬어. 네 다급한 감정이 내게도 전해지고 있고.”
내 손바닥 위에서 페어리 퀸은 똑바로 일어선 채 슬픈 얼굴을 했다.
“괜찮아, 토니아?”
“크로톤은 죽고 싶다는 내 욕망을 완전히 없애버렸어. 그러면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그걸 찾을 때까지 살아달라는 게 네 오빠의 유언이 아니었을까?”
토니아는 이감 절차에 동의했고,
마지막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오빠가 아니라 남동생이야. 아주 오래 전에 우린 정해뒀거든. 한날한시에 태어나서 누가 위인지 가릴 수 없으니 먼저 죽는 쪽이 동생이 되자고.”
*
[영혼 폭발까지 남은 시간: 45초]
토니아마저 떠나버리자 텅 빈 층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우리 셋뿐이었다.
레나스와 교도관장, 그리고 나.
이 중에 영혼을 가진 것은 나뿐이니 저 폭발에 휘말리는 대상 또한 나로 한정된다.
“교도관장, 너도 영혼이 없다고?”
“영혼의 유무는 필멸자로 태어난 자들에게나 의미 있는 개념입니다. 저는 우주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불멸자. 영혼이란 개념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렇군. 알겠어.”
나는 내공이 잔뜩 실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드래곤하트 플레이트는 이미 벗어둔 채 인벤토리에 넣어뒀다. 자연히 내 가슴팍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 손으로 심장을 꿰뚫어서 목숨을 끊는다.
“레나스, 네가 해줬다면 일이 편해졌을 텐데.”
“제가 관객님 곁에 남아 있는 이유와 정면충돌합니다. 저는 관객님께 해를 끼칠 수 없어요.”
“그래, 이해해.”
누구의 도움에도 기댈 수 없다.
이 도박이 성공하려면 오직 스스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날 밀어 넣어야 한다.
교도관장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명심하세요, 슈바인 스트링거. 영혼 폭발이 당신의 몸에 닿기 직전에 죽어야 합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망설인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터.”
내가 세운 계획은 여러 개의 단계로 이뤄져 있었다.
먼저 확실한 죽음으로 이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킨다.
그러면 영혼 폭발이 내 육체가 있는 장소를 집어삼켜 영혼을 멀리 밀어낼 것이다.
폭발의 여파가 충분히 지나간 뒤 1코인의 권능이 발동되면 파괴된 심장이 재조립되고,
폭발에 휩쓸려 나간 영혼이 육체에 다시 붙들리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시간은 0.02초에 불과하다고 한다.
즉, 스스로의 심장을 찌른다는 행위에 일말의 번뇌라도 섞인다면 유일한 기회를 실패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빠르면 되살아나자마자 영혼을 잃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느리면 코인을 써보기도 전에 영혼을 잃게 된다.
“공교롭군요. 당신이 취한 자세가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던 바로 그 모습과 똑같다는 점이.”
교도관장의 무심한 말을 끝으로 나는 카운트다운을 셌다.
[영혼 폭발까지 남은 시간: 5초]
결국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다.
눈을 질끈 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정확한 타이밍에 가슴을 찔러야 하니까.
잔뜩 팽창한 광구가 터지면서 눈부신 빛이 협곡 전체를 덮쳤고,
내 오른손이 왼쪽 가슴팍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