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망각된 약속, 약속된 망각 (1)
내뱉어진 욕설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순간 나는 깃털이 다 뽑힌 채로 식탁에 올라온 칠면조나 다름 없었다. 교도관들 대부분이 명징한 불쾌감을 드러내자 맨살에 포크 날이 꼽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오만하기 짝이 없군요, 슈바인 스트링거.”
“그래, 존재의 말살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는 존재 앞에서 너는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다.”
“교도관장, 저자의 불손한 태도를 두고도 계속 보고만 있을 것이오?”
극도로 화를 내는 교도관들 앞에서 곰인형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대다수는 제가 교도관장의 권한으로 저 등반죄수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걸 압니다. 하나 거기에는 크나큰 오해가 있지요. 저자는 본인이 억울하게 수감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의 살생부에는 엄연히 제 이름도 올라가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최종 층에 올랐을 때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온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난 교도관장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미 천명했어.”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질병으로 갑작스레 죽어서 사후세계에 온 것도 아니다. 수명을 다해 다른 차원에서 환생한 것도 아니다.
저 교도관장이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애꿎은 날 데려온 것이다.
푸르가토리움이라는 차원감옥에 대한 증오나 분노와는 별개로, 나는 저 교도관장의 폭거와 만행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저 곰인형이 계속 나를 성장시켜서 감옥을 오르게 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그 진정한 목적 역시 반드시 내 손으로 밝히고 말 것이다.
반면 교도관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교도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소이다.”
“네 녀석의 무례를 트집 잡아서 우리가 교도관의 권한으로 짓이겨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지 않아?”
“교도관을 조롱하고 감옥을 모욕한 것에 대한 대가로 사지를 찢어 각 층에 흩어놓을 생각을 하니 짜릿하군요.”
까마득한 격을 가진 자들이 살기를 노출하자 숨을 쉬는 행동조차 어렵게 느껴졌지만 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작 내게 질문을 던진 9층의 교도관의 반응은 평온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9층 교도관과 대화 중이야. 이미 투표권을 잃어버린 녀석들은 다 찌그러져 있어 줬으면 좋겠군.”
일순간 모두가 9층 교도관의 반응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 ■■ ■■ ■■■■, ■■■ ■■■■?”
이번에도 그의 말을 통역해준 것은 교도관장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냐고 물어보는군요.”
“그래. 나는 너희 교도관 전부를 쳐부술 거다. 그러니까 결정해라, 9층 교도관. 화룡도를 벗어나면서부터 난 분명히 너희 모두에게 도전장을 던졌어. 정당하게 내 탈옥을 막을 자신이 있다면 지금 내게 표를 줘.”
저 9층 교도관은 뭔가 다르다. 풍기는 느낌부터가 이질적이야. 나는 그게 무엇일까 계속 생각했다.
다른 여덟 교도관들은 모두 르팔타커스 시온이라는 죄수의 등반을 막아서지 못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저 마지막 녀석은 아니다. 파천황의 등반은 바로 저 녀석이 있는 층에서 멈췄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9층 교도관만이 어떤 죄수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즉, 프라이드가 가장 강할 수밖에 없어.’
그런 녀석을 상대로 리스크가 있는 허풍을 떠느니 속내를 있는 그대로 밝힌 것이다.
여기서 나를 살리지 않으면 너를 겁쟁이로 간주하겠다고.
9층의 교도관은 이렇게 답했다.
“■■■ ■ ■■ ■■■■ ■, ■■■ ■■ ■■■ ■■■■ ■■■■ ■■ ■■ ■■■■ ■■■■■.”
“당신이 내 앞에 다다랐을 때, 당신이 흘릴 후회의 피눈물은 화룡도에 돌려보내 거름으로 삼겠습니다……라는군요.”
그렇다는 건,
마지막 표가 내 쪽을 향해 던져졌다는 뜻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5층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으나 곰인형은 단호하게 한 번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저울이 그려진 접시는 쨍강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럼 신성한 투표 결과에 따라 집행하겠습니다. 5층의 교도관은 지금 이 순간부터 교도관의 자격이 박탈되며 죄수로 격하되었습니다. 그는 0층 대기실에서 다음 처분을 기다리게 될 겁니다.”
결판이 나자 다른 교도관들 역시 차례차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이번엔 접시가 깨지지 않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9층의 교도관이 내게 인사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 ■■■ ■■ ■■■■.”
“뭐라는 거야?”
“부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달라는군요.”
이제 식탁에는 나와 곰인형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띠링!
[돌발 퀘스트 #13. ‘저울을 박살내라’를 완료했습니다.]
[용사는 5층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의 근무 태만을 고발해 그의 자격을 박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상은 없습니다.]
나는 가까스로 등받이에 체중을 실은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긴장이 풀린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겨야 이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직 안도감에 젖어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슈바인 스트링거. 교도관이 타천했을 뿐 당신의 본체와 친구들이 있는 5층 빙설협곡은 여전히 종말의 위기에 빠져 있는 상태 그대롭니다.”
녀석의 말엔 틀린 데가 없었다.
이대로 이 심상세계를 탈출해 5층으로 돌아가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여에 불과할 것이다.
고작 3분 안에 모두를 살려야 한다.
“영혼 폭발은 그 사기꾼 저울 녀석이 유도한 짓거리잖아. 그 녀석이 강등됐다면 없던 일로 만들어줘야 하지 않아?”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건물의 총수가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그 건물에 설치된 폭탄까지 자동으로 제거되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발끈해서 대꾸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교도관장이 방금 내게 꺼낸 말 속에 뭔가 돌파구가 숨어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총수가 사라졌으니, 이제 그 건물은 엄연히 공백 지대야. 지금껏 개입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겠지. 아닌가?”
“눈치가 점점 빨라지는군요, 슈바인. 아무래도 내가 이 곰인형의 몸을 너무 오래 쓰고 있었나 봐요.”
“말 돌리지 말고. 어때, 우리를 탈출시켜줄 수 있겠어?”
원래대로라면 교도관장은 각 층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각 층의 시련을 방해할 수도, 화신체로 강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곰인형은 4층 만철도시에 직접 행차하신 적이 있다. 교도관 그룬덴 사니릭투스가 ‘사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라면 가능하겠지. 그러니까 ‘저울을 박살 내라’는 제목의 퀘스트로 내게 힌트를 준 거잖아?”
“둘러대봤자 시간만 낭비되겠지요. 맞습니다. 이렇게 되면 5층 빙설협곡에 한해 교도관장의 권한을 일시적으로 행사할 수 있지요.”
“그러면 난 이제부터 뭘 하면 되지?”
*
감은 눈을 떴다.
피부에 와닿는 차가운 공기.
다음 순간 나는 협곡의 꼭대기로 되돌아와 있었다.
“슈바인, 너 품에…… 뭘 안고 있는 거야?”
투표로 인해 사라지기 직전 내 눈앞에 서 있던 아스티나가 가장 먼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나는 교도관장의 화신체인 곰인형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제 털이 물기에 젖는 느낌이 몹시 불쾌하군요.”
“괜한 너스레 떨지 마. 프라이팬으로 후려쳐도 통각 같은 거 느끼지 못했잖아.”
“긴장을 풀어드리기 위한 나름의 성의가 이렇게 무시당하다니. 속상합니다.”
곰인형과 농담 따먹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방금 벌어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제르비어스는 뜨악하고 놀랐다.
“5층 교도관의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었다고? 그것도 우리가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응. 가장 큰 방해꾼이 사라진 거지. 하지만 영혼 폭발 자체를 없애버릴 순 없었어. 그래서…….”
나는 교도관장과 미리 맞춰둔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층에 아직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전부 다른 층으로 ‘이감(移監)’시킬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따라잡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젠타를 바라봤다. 녀석의 등 뒤로 살아남은 페어리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젠타, 너희 페어리들이 더운 곳에서도 잘 적응하길 바랄게.”
“더운 곳이라니?”
“너희는 내 친구가 층장을 맡고 있는 1층 화룡도로 가게 될 거야. 그곳에 도착하면 디멜 무바크라는 잭 프로스트를 찾아가.”
“그게 무슨…….”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그럼 건강해.”
내가 곰인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다음 순간 페어리들은 지우개에 의해 지워진 것처럼 사라졌다.
“페어리들은 화룡도로 이감되었습니다.”
빛의 기둥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있는 거인들의 무리가 보였다.
“저 녀석들에게 좋은 감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봉변을 당하게 둘 수는 없겠지. 교도관장, 부탁해.”
헐레벌떡 꽁무니를 빼고 있던 거인들 역시 스르륵 사라졌다.
“거인 죄수들은 4층 만철도시로 이감되었습니다.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려면 노동력이 필요하니 그들의 괴력은 오토마타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요.”
이제 남은 것은 내 동료들뿐이었다.
귀가 접힌 캉이가 내 다리에 엉겨 붙으며 물었다.
“우리도 딴 데로 보내지는 거야?”
“응. 너희를 어디로 보낼지 한참 고민했었는데…… 어떤 층을 골라도 교도관들이 괜한 수작을 부릴 위험이 있어.”
그래서 ‘모든 일에 의욕이 없이 나태한’ 교도관이 있는 곳이 낙점되었다.
“너희는 잠시 동안 0층 대기실로 옮겨질 거야. 제르비어스는 몰라도 아스티나와 캉이는 낯설 테지. 거기 가면 축 처진 눈썹에 궁시렁대기만 하는 생쥐가 한 마리 있을 텐데, 아마 너흴 귀찮게 하진 않을 거야.”
그때, 눈부시게 빛나는 은색 머리카락이 내 눈앞을 간지럽혔다.
“슈바인, 왜 우리가 아니라 너희야? 마치 너는 이 층에 혼자 남아 있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걸.”
“……맞아. 너희 모두를 대기실로 보낸 뒤 나는 혼자 여기 남아 있어야 해.”
“어째서?”
“그가 등반죄수이기 때문입니다, 아스티나 류.”
대답은 교도관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멱살을 잡을 기세였던 아스티나가 곰인형을 홱 하고 쏘아보았다.
“설명해.”
“등반죄수가 아래층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등반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교도관장인 제 권한으로 여러분을 대기실로 옮길 수는 있어도 등반의 주인공인 슈바인 스트링거는 이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스티나는 나만큼이나 이해가 빠른 여자다.
그래서 곰인형에게서 시선을 떼 나를 쳐다봤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미 내가 저지를 일을 직감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너 설마……?”
“그래, 어쩔 수 없어.”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가벼운 마실이라도 나간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난 여기 남아서 죽을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