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영혼 폭발 (4)
익숙한 식탁이 만져진다.
정확히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나 이 감옥에 잡혀 들어온 이래 반복해서 앉아본 적 있는 낡은 4인용 식탁.
‘층간 구역으로 나를 다시 데려온 건가?’
그러나 이곳이 층간 구역과는 전혀 다른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풍경이 이질적이었다. 원래였다면 나른한 석양 빛깔이 넘실거려야 하는데 지금은 완전한 어둠뿐이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곰인형을 향해 말했다.
“신들의 재판장소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박하지 않아?”
평소와 달리 다소곳하게 양팔을 모으고 있는 교도관장의 화신체가 답했다.
“원한다면 전설 속의 금속으로 깎아 만든 화려한 신전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요. 하나 이 감옥은 쓸데없는 자원 낭비를 하지 않아요.”
원래 이 공간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의식만이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유년기에 살았던 집의 낡은 식탁이 구현화된 원인은 다름 아닌 내게 있었다.
“여기가 내 영혼의 방어기제가 만든 거라고?”
“그렇습니다. 아무런 입력 정보가 없는 공간의 압박과 위협으로부터 인격을 지켜내기 위해 반사적으로 구현한 거죠. 많은 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벼랑에 떨어졌을 때 ‘엄마야!’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까. 생명이 다급한 순간에 찾게 되는 가장 안전하고 따스한 무엇.”
“나에겐 그게…… 이 식탁이란 거구나.”
“그렇습니다.”
손을 뻗어 식탁 모서리를 만져 본다.
어린 꼬마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숫자가 적혀 있다.
7 x 5 = 35
7 x 6 = 42
7 x 7 = 77
7 x 8 = 56
상희가 처음 구구단을 배웠을 때의 흔적이다.
당시 숫자의 세계에 흠뻑 빠진 내 동생은 집 안에 존재하는 모든 평면에 크레파스로 구구단을 적곤 했다. 그래서 아빠는 차라리 식탁에 앉아 쓰라고 했지.
‘야, 박상희! 바보냐? 왜 7 곱하기 7이 77이냐고.’
‘아는데? 행운의 숫자니까 많이 쓰면 좋잖아. 바보는 내가 아니고 오빠지.’
‘이게!’
약이 오른 나는 상희가 쓰는 매직을 유성 매직으로 바꿔놓았다. 좀 더 커서 이 엉망인 구구단을 다시 보면 창피해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동생을 속여 식탁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아빠에게 꿀밤을 맞은 뒤 벅벅 닦아야 했던 건 나였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이런 시간들이 내 영혼에 축적되어 있다는 것조차. 그리운 시간들이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소환되는 건가.’
마음속에 잔영처럼 떠다니던 어린 상희의 모습과 목소리가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역시 무조건 탈옥해야겠다.
나는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표정이 달라졌군요. 결의를 충분히 다진 것 같으니 시작에 앞서 몇 가지 사항을 알려드리죠.”
곰인형의 말투가 엄숙해졌다.
“당신은 재판을 요구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한 가지 안건에 대한 투표 회의에 가깝습니다. 모든 교도관이 회의에 입장해 발안자의 안건과 사정을 청취한 뒤 요청을 승인할 것인지 아닌지 투표하는 것이지요.”
“내가 대기실 문 앞에 섰을 때 교도관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제비뽑기를 했을 때와 비슷한 거군.”
내 영혼과 육체가 불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와 접촉했다는 점 때문에 당시 모든 교도관들은 자신의 층으로 날 데려가고 싶어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무런 독소도 없는,
재미난 노리개처럼 취급 당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 당신은 ‘안건’이었고 지금은 발안자라는 것이겠지만요.”
“5층 교도관인 그 녀석에게도 투표권이 있나?”
“아니요. 안건과 얽혀 있기 때문에 투표권을 박탈했습니다. 이 회의는 당신과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이 서로의 논리를 펴서 다른 투표권자의 표를 얻어오는 싸움이 될 겁니다.”
“여기서 내가 이기면 그놈은 더 이상 교도관이 아니게 되는 걸 테고. 만약 투표에서 내가 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당신의 고발이 워낙 무겁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정해질 겁니다. 어떤 처벌이 결정되든지 더 이상의 등반은 무조건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각오는 되셨나요?”
“하나만 더 물을게. 내 친구들은 지금 무사한 거야?”
“해당 층의 교도관이 입회해야 하므로 제가 물질계와 영혼계의 시간을 동시에 멈춰두었습니다. 적어도 투표 결과가 정해질 때까지 당신의 친구들은 괜찮을 겁니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다른 교도관들은 언제 입회하는 거야?”
“이미 당신보다 먼저 입회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원형 식탁에는 내 손바닥보다 작은 접시들이 올려져 있었다. 각 접시에는 간단한 심볼이 그려져 있었고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저 배배 꼬인 막대기는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일 거고, 송곳니를 드러낸 독사는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란 식이겠네.
특이한 것은 이미 깨져버려 산산조각 난 접시가 두 개 있었다는 점이다. 접시에 새겨진 문양은 하품하는 수염이 인상적인 생쥐였다.
0층의 교도관 ‘나태에 짓눌린 쥐’.
“대기실의 교도관은 입회하자마자 기권표를 던졌습니다. 이유야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귀찮다는 이유겠지.”
“그리고 다른 접시는 본래 4층 교도관의 것이었으나 아직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무효표가 되었고요.”
그렇다면 유효한 표는 이제 7표. 어느 쪽이든 간에 무승부는 나지 않겠군.
물론 내 앞에도 접시가 있었다.
불이 붙은 꼬리를 핥고 있는 고양이.
“불타는 삵.”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슈바인 스트링거. 이 투표에서 내가 최대한 당신을 도와드릴 테니까.”
“믿어도 되는 거냐?”
“당신이 투표에서 패배하면 저 또한 완전 망해버리는 겁니다. 내 소중한 후임자를 어이없게 잃어버릴 수야 없지요.”
화신체와 대화하는 것도 아닌데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소통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반대쪽의 한 접시는 크게 노한 듯 보였다.
“이 회의가 소집된 것 자체가 불쾌하다! 교도관장이 싸고도는 녀석이라는 소문이 사실로 입증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 다들 동의하지 않나?”
접시에 그려진 것은 바늘이 없는 저울이었다.
저놈이구나.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
내가 이 투표를 통해 꺾어야 할 장본인이다.
‘벌써부터 기 싸움을 시작했구나.’
녀석의 목표는 명확하다. 내게 반감을 갖고 있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교도관들에게 처음부터 선입견을 주입하려는 거다.
“그렇지 않냐고. 저 녀석은 일개 죄수야. 우리 교도관들과 겸상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거지. 나는 이 회의 자체의 적법성이 조각나 있다고 주장하겠다. 교도관장은 어찌 생각하지?”
교도관이 교도관장의 부하라는 개념은 옳지 못하다고 전에 그랬었지. 사기꾼 저울 녀석이 이렇게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걸 보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교도관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슈바인 스트링거의 자격은 제가 확인했습니다. 그에게는 이 푸르가토리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에 안건을 낼 자격이 있습니다.”
“후임자는 어디까지나 후임자다.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점찍어뒀을 뿐이지. 만약 이게 가능했다면 다른 후임자도 이 회의에 참석했겠지만 아니잖아? 이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이때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첨언했다.
“나도 저 말에 동의한다. 교도관의 후임자라는 이유로 발의가 통과된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지. 투표는 물론이거니와 이 회의 자체가 열리지 말았어야 해. 그리고 저 죄수에겐 모든 교도관에게 헛걸음을 하게 만든 죄를 따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비늘이 뜯긴 녀석답게 말투에는 은근한 증오가 차 있었다.
메시지를 공격하는 것보다 한발 빠르게 메신저의 자격을 끌어내리는 것.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공격 방식이고 그만큼 효과적이다.
그러나 곰인형은 고개를 저었다.
“기각합니다. 물론 교도관의 후임자에게 자격이 없다는 말은 옳습니다. 다들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해 설명 드리자면 지금 슈바인 스트링거는 1층 교도관의 후임자로 이곳에 와 있는 게 아닙니다.”
접시들이 일제히 달그락거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곰인형아. 그럼 내가 여기 왜 있을 수 있는 건데?
“그는 ‘왕’의 자격으로 이곳에 있는 겁니다.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뜨악해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교도관장은 앞발을 슬쩍 들어서 소란을 잠재웠다.
“감히 이곳에서 왕의 자격을 따지려는 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의 잡음은 허락하지 않겠어요. 정식으로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발안자인 슈바인 스트링거는 준비가 되면 시작하세요.”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린 뒤 심호흡을 했다.
아직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교도관들이 많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든지 간에 이 자리에서 설득해야 한다.
“5층 빙설협곡의 교도관은 ‘더 큰 자가 더 강하다’는 율법 아래 거인들이 소인들을 핍박하고 지배하는 풍토를 만들었어.”
“교도관의 율법은 신성불가침이다. 설마 지금 그것을 지적하려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그 율법 때문에 크로톤이라는 페어리가 층을 지배할 정도의 거대한 거인으로 자라나고 말았다는 걸 말하려는 거다. 그 과정에서 크로톤은 465명의 죄수들을 제물로 바쳐 자신의 몸을 키웠지. 영혼도 흡수하면서.”
그렇다.
영혼. 단순히 다른 죄수를 죽이거나 잡아먹었다면 태업과 방임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톤은 자신의 영혼과 다른 죄수들의 영혼을 강제로 합쳤다.
내가 물고 늘어져야 할 교도관의 핵심 죄목이다.
“그로 인해 층 전체의 생명체가 영혼이 말살될 위기에 처했어. 크로톤이 죽는 순간 벌어질 영혼 폭발 때문에. 그렇게 되면 500에 달하는 존재들의 영혼이 윤회의 고리에 돌아가지 못한 채 완전히 끝나버리는 거야.”
4층의 교도관 그룬덴 사니릭투스는 레나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엄청난 무리를 했다.
주인이 없어야 다른 층으로 옮겨질 수 있는 ‘무기’인 레나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단순한 자살이 아닌 완전한 영혼의 소멸.
신적 존재인 교도관에게도 평범하지 않은 그 형벌이 지금 5층의 목전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만약 이 영혼 폭발이 일어나 5층 빙설협곡에 존재하는 영혼이 싹 다 증발해버린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죄수들이 갖고 있었던 형량은 어떻게 되는 거지?”
본래 크로톤이 다른 죄수를 흡수하면서 덧붙여진 녀석의 형량.
“형량이라는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야. 이 푸르가토리움이 한 존재가 본래의 세계에서 저지른 업보를 저울에 올려 책정한 기간이다. 그것이 일거에 무효가 되어버리는 거야. 5층 교도관은 바로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해. 감옥에 화재가 일어나서 그 안에 갇힌 죄수가 전부 타 죽었는데, 그렇다면 시설 관리를 개떡같이 한 관리자의 책임이 아니고 뭐겠어?”
잠시의 침묵이 식탁 위를 넘실댔다.
나는 곧 반격이 올 거라 예상했고, 역시 사기꾼 저울 녀석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슈바인 스트링거, 너의 이야기는 근본부터 잘못되었다. 지금부터 내가 그걸 설명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