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영혼 폭발 (3)
“그건 말도 안 되는 반칙이잖아.”
[5층의 교도관이 자신은 반칙을 쓰거나 억지를 부린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푸르가토리움에 끌려온 이래 난 지금까지 총 다섯 명의 교도관을 만났다.
그중에서 2층 삼월초원의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과 3층 대수림의 ‘증식하는 밀림의 뱀’과는 특히 사이가 좋지 못했다.
두 녀석 모두 자신의 시련을 격파한 나를 못마땅히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차를 인정하지 않거나 포탈을 열어주지 않는 식의 강짜를 놓지는 않았다.
층장의 열쇠를 두고 교도관들이 설계한 시련은 일종의 관문이며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그것을 격파한 나를 인정했던 거다.
그 교도관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성정이라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이 감옥의 율법이 신격인 그들이 죄수에게 행패를 부릴 수 없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5층의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은 위풍당당하게 내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어째서? 크로톤을 쓰러트린 날 다음 층으로 올려 보내줘야 할 제약에 걸려 있을 텐데?”
[5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의 말에서 한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전합니다.]
[당신은 아직 ‘층장’이 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을 제트카이저의 콕피트에서 탈출시키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크로톤의 죽음을 내 손으로 확정 짓지 못했다.
하지만 기원검의 상실로 인해 신체가 붕괴되고 합체했던 영혼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크로톤에게 사망은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5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가 층장의 열쇠를 이양받기 위해선 크로톤의 숨이 끊어져야 한다고 전합니다.]
역시 토니아의 부탁을 거부하고 직접 크로톤의 목을 내가 베어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내 영혼은 폭발에 휘말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로 소멸당했을 거다.
오히려 토니아에게 크로톤의 임종을 지켜볼 시간을 선물해 준 것이 도리어 나와 친구들의 생존을 유예시켜 준 거다.
아스티나가 내게 속삭였다.
“진퇴양난이야, 슈바인. 크로톤이 죽으면 영혼 폭발이 일어나서 층 전체가 휘말리게 돼. 그걸 피하는 방법은 포탈을 통해 다른 층으로 달아나는 것인데 그 포탈을 열려면 크로톤이 죽어야 하고.”
“모순이군. 폭발하기 전에 탈출해야 하는데, 탈출구를 열려면 폭발을 시켜야 한다니.”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순’은 언제나 강력한 마법 주문의 필수 요소였어. 어쩌면 이 교도관은 우리가 이 층에 떨어졌을 때부터 우릴 이 상황으로 몰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내가 크로톤과 싸우지 말고 층장의 열쇠를 평화롭게 물려받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었을 거야. 크로톤이 제 발로 열쇠를 양보했을 리 없어. 이 층을 지배하는 옥좌에서 스스로 물러나 줄 녀석이 아니었잖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함정이었다.
크로톤은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영혼까지 먹어치우려 할 정도로 탐욕에 미쳐 있었다.
당연히 탈옥을 위해 층장의 열쇠를 노리는 나와 격돌할 것이라는 건 교도관의 입장에서 자명했을 것이다.
그제야 내가 크로톤과 기원검을 두고 쟁탈하고 있었을 때 교도관이 웃음 짓고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은 당연히 크로톤의 승리를 응원할 것이라 믿었지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바로 이 순간을 공들여 설계한 것이다.
[5층의 교도관이 모두에게 고합니다. 영혼 폭발은 윤회의 고리로 돌아갈 수 없는 완전한 소멸을 가져올 터이니 지금 시간이 허락될 때 곁에 있는 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라고 말입니다.]
언뜻 배려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명백한 우롱이다. 쥐덫에 걸린 생쥐를 모닥불에 던져버리기 전에 불쌍하다며 진혼곡을 불러주는 수준의 기만.
마치 ‘너희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고 단언하는 듯한 오만함.
눈앞에 녀석의 화신체라도 있었다면 한 방 거세게 후려쳤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다스리고 방법을 궁리해야 할 때였다.
“슈바인 스트링거, 방금 교도관이 말한 게 다 사실이야? 그 폭발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데?”
페어리 무리에서 동료들을 다독이던 젠타가 내게 물었다.
“그건…….”
“괜찮아. 우리는 많은 상황을 각오했어. 진실을 얘기해줬으면 해.”
“이 층에 속해 있는 존재들 중에 영혼을 가진 자들이 모두 죽게 될 거야. 육체는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혼백육 중에서 혼백을 잃게 되니 빈 껍데기가 되어 썩어 가겠지.”
그야말로 한 층의 종말.
소울 아포칼립스(Soul Apocalypse)가 찾아오는 것이다.
“정령이시여, 어떻게 그런 일이…….”
“미안해. 내가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런 말이 어딨나, 슈바인. 우리의 여왕께서는 너를 해방자로 믿었고, 실제로 넌 그걸 해냈잖아. 우린 크로톤의 통치에서 자유로워졌어. 여왕께서 이 장소에 계셨더라면 절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라셨을 거야. 우린 그분께 굴하지 않는 태도를 물려받았다.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 마.”
우르르르릉!
영혼이 집약돼 있는 광구가 또 한 번 심상치 않은 굉음을 내뿜었다.
저 시한폭탄엔 보이지 않는 타이머가 존재하며 남아 있는 숫자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보통 30퍼센트의 혈액을 잃으면 쇼크로 사망하게 된다. 정령의 기운을 품은 페어리를 인간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겠지만 그리 긴 시간 버틸 수는 없을 거다.
그 안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포기하지 말라고. 그래, 고맙다.”
젠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에서 교도관을 붙잡고 씨름을 할 때가 아니었다.
띠링!
그때, 예상치 못했던 알림 창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13. ‘저울을 박살내라’]
[용사는 5층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의 흉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용사의 등반을 자신의 층에서 멈춰 세우기 위해 택한 방법은 파격적인 영혼 폭발. 그 폭발에서 살아남으십시오.]
[기한: 4분 21초]
[보상: 없음]
[실패 시 페널티: 없음]
교도관장이 오랜만에 다시 퀘스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저 살아남으라고 말할 뿐 아무런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게다가 퀘스트를 달성했을 때의 보상도, 실패했을 때의 페널티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건 이전 12번의 돌발 퀘스트를 모두 돌아봤을 때 한 번도 없었던 특수한 경우였다.
“용사야, 허공을 노려보는 건…… 설마?”
“그래. 교도관장이 내게 퀘스트를 주었어. 잠깐 방해하지 말고 있어 봐.”
녀석은 내 탈옥을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그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 영혼이 소멸되어 버리는 지금의 상황을 가만 놔둘 리 없다.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퀘스트를 내게 주었지만 분명 힌트가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생각하자. 교도관장은 내게 뭔가를 전달하려는 거야.’
이렇게나 집중해서 퀘스트를 읽어본 경험은 이제껏 없었다. 푸르가토리움의 죄수가 된 이후는 물론이고, 알파 테스터로서 게임 속 퀘스트를 확인했던 인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알아냈다.’
이 퀘스트에서 나는 중요한 몇 가지 정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일단 크로톤의 사망이 확정되기까지 남은 시간.
그것은 4분 가량이었다. 내 추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이다.
그리고 페널티 없음.
그것은 영혼 폭발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 주었다.
‘원래는 페널티가 죽음이어야 맞아. 단탈리온에 설명에 따르면 그래.’
하지만 내겐 죽음을 한 번 극복할 수 있는 권능이 하나 있다.
삼월초원에서 페널티 퀘스트인 설공 살해를 달성하면서 보상으로 얻은 1코인.
교도관장은 그것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퀘스트의 제목도 빠져선 안 돼.’
지금까지는 한 번도 퀘스트의 제목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 또한 꼼꼼히 살펴볼 수밖에 없다.
저울을 박살 내라.
즉, 이번 퀘스트에서 나와 친구들이 무사하기 위해서는 교도관 자체를 타깃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퀘스트 그 자체가 힌트야.’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라면 교도관장이 퀘스트를 내줬을 리가 없다.
내가 정확한 수를 떠올리기만 하면 이 상황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이라는 뜻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확신이었다.
*
“교도관! 듣고 있나?”
[5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에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제부터 너를 끌어내려 줄 거야. 그러니 시간이 허락될 때 곁에 있는 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둬. 아참, 그런 친구가 네놈 옆에 남아 있을 리가 없겠지?”
다짜고짜 하늘을 향해 소리치며 교도관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내 모습에 캉이가 당황했다.
“형아, 왜 그러는 거야? 응?”
“그래, 슈바인. 교도관을 놀리거나 도발하는 건 지금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용사 놈아. 다 포기하고 그냥 배 째라는 식으로 나가는 건 아니겠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쏘아대는 친구들의 말을 모두 무시했다.
[5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의 허풍에 자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자신을 분노하게 해서 화신체를 억지로 끌어내려는 계획이라면 더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고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 하지만 기각. 너는 화신체를 만들 생각도 없을 테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화신체를 만들 기회도 주지 않고,
나는 너를 끌어낼 거다.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을 향해 꺼낼 말을 모두 토해놓은 나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 겨냥하는 건 5층 교도관이 아니었다.
바로 이 감옥 전체였다.
“푸르가토리움에게 고한다! 5층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을 고발하겠다. 죄명은 근무 태만과 죄수 관리에 대한 방임이다!”
잠시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반응이 언덕 위를 가득 채웠다. 내 친구들은 물론이고 페어리들마저 내 정신 이상을 걱정하는 표정이었으며,
가장 가관인 반응은 지목당한 장본인에게서 나왔다.
[5층 교도관이 거침없이 폭소합니다. 아무리 등반죄수가 파천황의 가호를 받고 있으며 4개의 층장 열쇠를 손에 들고 있다 하여도 본질적으로 한낱 죄수에 불과하다고 전합니다.]
그래.
고작 죄수 따위가 대단하신 교도관을 가리켜 ‘저놈 잡아라’ 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내겐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화룡도에서 7번 방의 친구인 디멜 무바크와 진심으로 생사를 걸고 싸운 끝에 얻어냈던 권한.
1층 화룡도의 층장인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의 후임자가 된 것.
“엄밀히 말하면 나는 죄수임과 동시에! 1층 화룡도의 예비 교도관이다! 푸르가토리움이여, 내 고발을 받아들이겠는가!”
솔직히 모르겠다.
단계를 몇 개나 뛰어넘은 이 도박이 성공할지는.
하지만 교도관장이 내게 힌트를 주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타개책은 이것밖에 없었다.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권한이지만, 이것을 이용해서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을 거꾸로 이 감옥 전체의 저울에 올려놓는 것.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분여 남짓.
초조함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을 즈음에,
익숙한 감각이 나를 찾아왔다.
대애애애애앵!
4층 만철도시에서 톱니바퀴의 여신인 벨리오나가 시간을 멈추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
격풍에 흔들리던 캉이의 꼬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허공에서 열심히 날갯짓하던 페어리들의 날개가 훤히 보인다.
지금 누군가가 흘러가는 시간을 멈춘 것이다.
[1층 교도관의 후임자 슈바인 스트링거가 방금 5층 교도관을 고발했습니다.]
[교도관장은 이를 받아들여 간이 재판을 열 예정입니다.]
[열 명의 교도관은 모두 재판에 입장할 준비를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