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영혼 폭발 (2)
“기억나, 크로톤?”
불길한 예언 속 어린아이였던 한 페어리는 딱 한 번 일족의 어른들의 말에 반항해본 적이 있었다. 절대로 올라가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받았던 세계수의 꼭대기.
샴쌍둥이 페어리 크로토니아는 갇혀 지내는 답답한 마음에 중요한 제사가 일어나던 날에 몰래 둥지를 빠져나와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올랐던 것이다.
“분명 정오부터 나무를 올랐는데도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지.”
“…….”
“그 꼭대기에 걸터앉아 까마득한 곳에서 불빛을 내뿜던 인간들의 세상을 내려다보던 게 생각나. 참으로 아름다웠어. 지금까지 내가 이 눈에 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말야.”
크로톤의 몸에서는 이미 급속도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토니아의 중얼거림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크로톤의 머리를 다소곳이 받치고 있는 토니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둥지를 벗어난 게 발각됐을 때는 정말 무지하게 혼이 났지. 사흘이나 치도곤을 당했던 것 같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크로톤의 입술이 가까스로 열렸다.
“닷새였어, 멍청아.”
퉁명스러운 말투였으나 표독스러움은 묽게 희석되어 있었다. 피와 함께 빠져나가는 크로톤의 생명력처럼.
“그랬던가. 어쨌든 기억하고 있네?”
“……내게는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그때 우리는 약속했었어. 언젠가 둥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저 불빛들이 반짝이는 곳보다도 훨씬 먼 곳까지 날아가 보자고.”
그러나 한몸을 갖고 태어난 이 페어리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는 허락된 적이 없었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도 마찬가지였고, 세계수를 불태운 업보로 수갑을 나눠 찼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우리, 정말 멀리까지 와 버렸네.”
어디서부터 잘못 꼬인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두 남매 모두가 갖고 있는 생각이었으나 서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걸까.
“혼자 있고 싶으니까 꺼져라, 토니아.”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허세를 부려야겠어? 이제 네가 지배하던 거인들도, 너와 한몸이 되었던 죄수들도 더는 곁에 없는걸.”
“……여기 남아 있다간 너 또한 압사당해 죽을 뿐이야.”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크로톤이 눈빛으로 말했다.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며 토니아가 마음으로 답했다.
“네 예언은 빗나갈 거야. 우리 둘이 다시 만나게 되면 둘 중 하나는 죽게 될 거라고 했지? 아니, 우리 둘 다 죽을 거야.”
토니아는 한때 용기가 부족해 하지 못했던 선택이 있었다.
“이번엔 네 옆에 있을 거야.”
토니아는 믿고 있었다. 크로톤이 빙설협곡의 거인왕이 되었을 때부터 자신은 물론 페어리 전체를 눌러 죽이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음을. 위협이 되지 못해 무시했다고 하기엔 그 세월이 지나치게 길었다.
“마지막까지 귀찮게 하는구나.”
크로톤이 토니아의 오른쪽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가녀린 팔을.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개체가 되어버린 남매의 육신을.
“떠나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로톤은 토니아에게 정령술을 걸었다.
토니아는 비수처럼 품고 있던 독한 마음이 잘려나가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하지만 번쩍하는 빛과 함께 자신을 밀어내는 힘에 도무지 저항할 수가 없었다.
*
“젠장. 처음부터 크로톤과 함께 죽을 생각이었어.”
토니아는 내 귓속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강제로 내 곁에 소환시켜보려 했으나 그것 역시 여의치가 않았다.
[친구 토니아의 소환이 거부당했습니다. 친구 소환의 권능이 회복되려면 앞으로 20시간 39분 남았습니다.]
제트카이저의 콕피트에 친구들을 소환시킨 지 3시간이 조금 넘었기 때문에 토니아를 크로톤의 곁에서 빼내오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저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억지로 데려올까? 무리를 한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그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토니아는 이번 층에서 나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크로톤의 주박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두를 구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우정이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미약한 전우애는 분명히 우리 사이에 존재했다.
‘그렇다고 신념을 걸고 내린 결정을 뒤엎으라고 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용사야, 지금 네 요정 친구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저길 봐.”
제르비어스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내면에 침잠해 있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방금 전과 크게 달라진 풍경을 인식할 수가 있었다.
“줄어들고 있잖아?”
마치 거대한 해삼이 뒤덮고 있던 꼴이었던 크로톤의 기암거성이 본래의 구조물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폭주하던 크로톤의 조직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작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떤 신호로 읽어야 할지 판단 내리기도 전에 용사의 기감이 심상치 않은 파동을 읽어냈다.
아스티나와 내가 동시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게 뭐야?”
광구(光球).
빛나는 구슬이 거성의 꼭대기 위에서 뭉치고 있었다. 멀리서도 그 크기가 점점 불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로톤의 조직에서 빠져나오는 빛의 기운이 뭉쳐 마치 열매를 맺듯이 응집하고 있는 것이다.
털을 바짝 곤두서게 만드는 섬짓함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스티나, 제르비어스. 저거 크로톤이 벌이는 마법일까?”
“아니야. 마법진도 없거니와 주변 현상이 너무 이질적이야.”
“마나 스트림도 조용하다, 용사야. 저게 뭔진 모르겠다만 적어도 크로톤이 준비해 둔 최후의 수단 같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둘의 대답은 내가 참월의 마녀에게 배운 마법 지식과도 일치하는 대답이었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켜 술자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기적의 행사다.
그런데 저 광구에서는 그런 균열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위협적인 벼락이나 태풍도 그 파괴력과 상관없이 마법이라 할 수 없듯이 저건 본래 자연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직감에 모든 걸 맡겨둘 수 없기에 단탈리온을 꺼내 들었다.
“저 현상의 이름이 뭐야, 단탈리온?”
다행히 녀석은 내 마력을 가져가는 대신에 답을 알려주었다.
- 저것에 붙여진 이름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용사님. 하지만 저라면 설명을 드릴 수는 있지요. 저건 죄수 465명의 영혼이 한데 결합한 영혼 결합체입니다.
“영혼 결합체? 크로톤이 지금까지 흡수한 죄수들의 영혼이 밖으로 드러난 거야?”
- 용사님께서 크로톤의 본체와 대면해 기원검의 조각을 그에게서 회수하셨지요? 그로 인해 강제로 달라붙어 있던 465개 영혼의 인력이 붕괴되고 척력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자연히 영혼을 잃어버린 육체는 사멸하게 되는 것이고요.
단탈리온의 글씨가 그 어떤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휘갈겨지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을 결코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 영혼의 좌표는 본래 중첩될 수 없습니다, 용사님. 물질계에선 두 개의 개체가 하나로 뭉치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영혼은 물질이 아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거인 크로톤이 하나의 몸에 수백 개의 영혼을 붙잡아두고 있었던 것은 기원검의 권능과 교도관이 뒤틀어버린 법칙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 밧줄 중 하나가 풀려버렸으니 영혼은 중첩되지 않는 성질을 다시 회복하려 할 겁니다.
“더 쉽게 설명해줘. 압축돼 있던 영혼들이 에어백처럼 부풀어 오른다는 소리야?”
- 용사님이 있던 세계에는 핵폭탄이라는 게 있지 않았습니까? 그 원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핵이 쪼개지면서 발생하는 중성자가 연쇄폭발을 일으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뿜어내지 않습니까. 영혼이 존재하는 차원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단탈리온의 설명을 듣는 와중에도 영혼 결합체인 광구는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거리로 계산해봤을 때 직경 200미터는 될 것처럼 보인다.
나와 단탈리온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스티나가 끼어들었다.
“이상하잖아, 단탈리온. 너는 분명 저 광구에 붙여진 이름이 없다고 했어.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자세히 알고 있는 거 아니야?”
- 아스티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일단 숨이 붙어 있어야 가능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저 현상을 목격했던 생명체들 중에선 지금껏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뭐라고?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영하의 기온이라 하더라도 둔해질 수 없는 싸늘한 경고가 단탈리온의 페이지에서 완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 영혼 폭발입니다. 465개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해방되면서 주변에 존재하는 개체의 영혼에 막대한 타격을 줄 겁니다. 제가 가진 기록엔 한 흑마술사가 제물로 바친 무고한 인간의 영혼을 중첩시켰던 것이 최고 수치였는데 그때의 제물은 아홉 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영혼 폭발은 대륙의 절반을 뒤덮었습니다. 그보다 50배 강력한 폭발이라면 제 계산으론…… 소멸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영혼은 이 층에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럼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뭔가 해야…….”
“꾸어어어어어!”
그때, 크로톤의 조직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거인들 중 하나가 광구를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거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저 현상을 가까이서 접하고 있으니 본능적인 이질감과 공포감을 몇 배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거인이 손에 든 곤봉을 마치 투창처럼 광구를 향해 집어 던졌다.
하지만 그것은 광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채 통과할 뿐이었다.
- 영혼계와 물질계는 서로 간섭할 수 없습니다. 이 층에 남아 있는 존재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 하더라도 저것을 소멸시킬 순 없습니다. 폭발이 일어나도 물질계의 차원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벽돌 하나 부서지지 않겠지요.
하지만 영혼은 완전히 찢어 발겨질 것이다.
핵폭탄에 직격당한 무력한 송아지처럼.
“그 영혼 폭발이란 거 언제 일어나게 되는데?”
- 저는 미래를 모르므로 정확한 시간을 예고해드릴 순 없습니다. 하나 시점을 예측할 수는 있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는 크로톤이라는 페어리, 그의 죽음이 확정되는 순간 폭발은 일어날 겁니다.
안 될 말이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멍하니 여기 서서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다.
다음 층으로 달아나야 한다.
나는 하늘을 향해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지?”
잠시 후, 기다렸던 반응이 날아왔다.
[5층의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이 등반죄수를 주시합니다.]
“나는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층장 크로톤을 무찔렀다. 기원검의 조각도 회수했으니 완전히 승부가 났다고 봐야 해. 그러니 당장 화신체를 만들어서 내 눈앞에 튀어나와라. 우릴 다음 층으로 올려 보내줘.”
6층으로 향하는 포탈.
오직 그것만이 영혼 폭발이라는 대재앙에서 무사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그런데 교도관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5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의 요청을 정식으로 거부합니다.]
[5층의 교도관은 자신에게 화신체를 만들어낼 의무가 없으며, 포탈을 열어줄 의무는 더더욱 없다며 웃음 짓습니다.]
이 망할 교도관 새끼가.
이딴 식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겠다고,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