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영혼 폭발 (1)
“감히 내게서 이것을 빼앗을 수는 없어!”
크로톤이 찢어질 듯 외쳤으나 녀석의 목소리는 무력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칼자루와 크로톤의 등 뒤에 떠 있던 검의 파편은 서로를 끌어당기듯 자연스럽게 합쳐졌다. 한계치에 달한 내 압도적인 근력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힘이 아니라 무공을 사용한다면?’
이런 발상으로 손바닥을 뻗어 무극파천공의 허공섭물을 시전했으나 기원검은 조금도 끌려오지 않았다.
마치 이 공간에 전혀 다른 물리 법칙이 작용하는 것 같은 막막함이었다.
[짐의 검이 그 파편과 융합하였도다.]
나는 뇌신 지드와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이 심상세계에서 격돌하는 것을 관전한 적이 있다.
그래서 르팔타커스의 무기가 온전한 상태였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안다.
“기원검 네메시스.”
비록 완전체의 3할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공중에 떠 있는 것은 분명히 일전에 보았던 기원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물론 칼자루의 길이보다 검신의 길이가 더 짧아 우스꽝스러운 꼴이었지만 나와 토니아, 크로톤은 조금도 웃지 못했다.
신격이 제련했다는 무기답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패기를 흘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니아,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여기서부터는 미지의 영역이야. 파천황의 선택을 받은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기원검이 내가 아니라 크로톤의 욕망에 손을 들어주면 모든 게 끝장이란 소리잖아.”
“……미안. 솔직히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은 몰랐어.”
토니아는 풍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파천황의 이야기만을 믿고 200년을 설원의 끝자락에서 버텨왔다. 뜬구름 잡는 전설이 실현될 거라는 희망에 모든 것을 건 것이다.
아마 본인이 기원검이라는 무기에 몸이 잘리는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도박을 벌일 수는 없었을 터.
그럼에도 기원검의 파편이 서로 뭉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지 못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함께 수라장을 헤쳐온 동료를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해보기로 했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사식 비천성검(飛天聖劍)]
꾸아아아아앙!
용사의 최종무장인 아론다이트가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금강석마저 두부처럼 베어낼 수 있는 성검조차도 파천황의 무기에 닿자 맥없이 도로 튕겨져 나올 뿐이었다.
허공에 떠 있는 기원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최종국면에서 이렇게 손가락만 빨면서 주사위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은 나를 무력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인 크로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얼굴 또한 초조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판결하겠다. 짐의 무기가 스스로 더 강한 숙원을 가진 자를 가리킬 것이다.]
파천황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자음과 모음을 분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잡생각마저 들었다.
기원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다음 순간 칼끝이 한쪽을 향했다.
나와 토니아는 동시에 헛숨을 들이켰다.
기원검의 칼끝은 내가 아니라 크로톤을 향해 있었다.
“크하하하하! 그럼 그렇지. 나는 세계수를 불태운 몸이다, 슈바인 스트링거. 네놈의 욕망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태어나면서부터 온 세계를 향해 증오를 키워온 나를 이길 순 없는 것이다.”
이런, 시발. 끝장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내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랬다가는 토니아가 내 몸에 깔려서 다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곧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푸하아아아악!
크로톤의 전신에서 선혈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방향은 모두 오른쪽을 향해 있었다.
기원검이 크로토니아라는 샴쌍둥이를 잘라내면서 생겼던 상처.
그것이 200년의 시간을 넘어 그에게 도달한 것이다.
“끄아아악. 뭐, 뭐야 이게?”
지금까지 녀석이 멀쩡했던 이유는 분명히 기원검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를 지혈시키는 마법 붕대처럼.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그 효력이 다 했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런 거였어.”
검이 그 주인을 가리킨다고 했을 때 칼끝을 향하는 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주인이 붙잡아야 하는 건 칼끝이 아닌 칼자루니까.
스르르륵.
기원검이 칼자루를 내 쪽으로 향한 채 미끄러지듯 날아왔다.
나는 행여나 도로 가져갈까 봐 그것을 허겁지겁 낚아챈 뒤 인벤토리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러면 교도관장이나 르팔타커스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내 허락 없이는 밖으로 못 꺼낼 거야.’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크로톤은 자신이 흘린 피 웅덩이에서 한쪽 날개를 퍼덕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째서? 왜? 내가 아니라 저 버러지가 선택받은 거냐.”
숙원을 향한 욕망의 크기가 물통의 사이즈처럼 명확하게 정해지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검은 나를 선택했다.
내 직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원검이 나를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크로톤을 외면한 것이라고.
“너의 그 합체가 문제였을 거야, 크로톤.”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같은 죄수들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이루지 못한 염원이 있었겠지. 너는 그것을 한 영혼의 그릇으로 섞어온 거야.”
이른바 순도가 탁해진 거다.
물병에 담겨 있을 땐 그 어떤 피보다 강렬했던 붉은 잉크가 호수에 떨어지면서 ‘희석’되고 만 것이다.
물론 강해지기 위해서, 압도적 군주로 5층에서 군림하기 위해 무수한 합체를 선택한 크로톤이었지만 이런 사태까지 예측하기란 무리였을 것이다.
업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그러나 토니아는 나와 달랐다.
“네 욕심이 가져온 업보야, 크로톤. 받아들여야 해.”
“이이이익!”
분하다는 듯이 꿈틀대고 있었지만 페어리 크로톤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맨몸이었을 때의 나는 물론이고 거대로봇 제트카이저마저도 손쉽게 절멸로 몰고 갔던 거인왕 크로톤의 기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라, 등반죄수!”
“내가 지금 어떤 눈으로 널 쳐다보고 있는데? 흥미롭군. 네가 거인이었을 땐 내 전신이 너의 눈동자에 비쳐 보였는데, 이젠 그게 역전되었으니 말야.”
“기원검이 나를 배신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 건방진 자세로 서 있을 순 없었을 거다!”
“배신이라. 내 생각에 널 배신한 건 기원검이 아니야. 그렇다고 교도관은 더더욱 아니고.”
크로톤을 등진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나 했더니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단 말야.’
내게도 있었다.
이 세상 전체가 나를 절망의 낭떠러지로 몰고 가 매정하게 걷어차 버린 것처럼 느껴졌을 때가. 감당할 수 없는 미움과 증오가 들숨과 날숨처럼 내 폐에 가득 들어차기만 했을 때가 있었다.
스르릉.
디아볼릭이 인벤토리에서 소환되어 울부짖었다.
“너의 가장 큰 죄가 뭔 줄 알아? 세계수를 불태워서 한 세계를 절멸시킨 죄도, 이 감옥 안에 들어와 다른 죄수들의 영혼을 너의 것으로 집어삼킨 죄도 아니야.”
다행히 추락하던 내겐 상희라는 낙하산이 있었다. 나를 돌봐주고 내가 아껴줘야 할 소중한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크로톤, 그건 너에게도 있었는데.
“너의 쌍둥이 남매를 지켜주지 못한 거다.”
가볍게 내리치기만 해도 크로톤은 먼지가 돼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디아볼릭의 궤적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훼방꾼의 존재에 멈춰 서야만 했던 것이다.
“토니아?”
“마지막은 내게 양보해줬으면 좋겠어, 슈바인.”
“저 녀석은 가만히 내버려 둬도 과다출혈로 죽을 거야. 차라리 지금 숨통을 끊어주는 게 더 자비로운 거라고 생각해.”
토니아는 슬픈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쌍둥이를 살려달라며 자비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크로톤이 죽는 순간의 참관인으로서 이 녀석보다 더 자격 있는 죄수는 없겠지.’
나는 결국 디아볼릭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진 않을 테니 밖에서 봐.”
“…….”
토니아는 순간이동으로 사라질 때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끝끝내 페어리 퀸의 대답을 귀로 담아내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
“뭐 하고 있었어, 다들?”
동료들은 내가 콕피트에서 빠져나갔을 때와 동일한 위치에서 초조하게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제트카이저의 관제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온 레나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서 있었다는 점 정도일까.
“늦었잖냐, 용사 놈아. 이 거신병과 함께 우리의 존재를 잊어버린 줄 알았다.”
제르비어스는 태연한 척 팔짱을 끼고 있었으나 팔뚝에 긁힌 자국이 있는 걸 봐선 어지간히 똥줄이 탔던 모양이다.
그걸 놀려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다.
“크로톤은 어떻게 됐어?”
물어오는 아스티나의 얼굴에 미혹은 없었다. 내가 멀쩡히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의 완수를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녀석의 숨통은 이제 거의 끊어졌어.”
“이긴 거구나.”
“응. 기원검의 조각을 내가 되찾아 왔으니 이제 이 층에서 우릴 막아설 적은 존재하지 않아. 눈발에 담긴 주박의 힘도 끊어졌고.”
“그럼 빨리 나가자, 형아! 여기 답답하단 말야.”
제트카이저의 파일럿으로서 페달을 조작했을 때는 흥에 겨워했으나 로봇이 작동을 정지한 지금 캉이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듯 보였다.
“그나마 기운이 남아 있는 내가 길을 뚫을게. 단숨에 따라와.”
내가 신호하자 레나스는 흩어져 있던 페어리들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아무런 화상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커다란 액정을 가리켰다.
“지금 거신병에 달라붙어 있는 신체조직의 두께가 가장 얇은 부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아, 간다!”
퍼어어어어엉!
디아볼릭이 만들어내는 천마회풍일섬이 사람 한 명이 능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터널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터널의 천장에서 폭주하는 크로톤의 조직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서 제트카이저의 동체를 빠져나왔다.
서늘한 바깥 공기를 다시 맡게 된 것은 무려 2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자칫 망설였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우리는 빙설협곡의 꼭대기에서 실시간으로 넓어지고 있는 생물재난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크로톤의 육체가…… 저 커다란 성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어.”
우리가 층에 묶여 있던 내내 기승을 부리던 폭설도 완전히 그쳐 있었다.
그토록 진절머리가 나던 눈발이었는데 막상 맑게 갠 하늘을 보자 지상의 풍경과 더불어 황량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때, 한 페어리가 뽀르르 나에게로 날아왔다.
나와 토니아를 만나게 해주었던 젠타라는 페어리였다.
“여왕께서 남기신 말씀은 없어?”
“나에게? 딱히 그런 작별인사는 나누지 않았는걸. 크로톤이 죽기 전에 뭔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여서 자리를 비켜준…… 왜 그래?”
젠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워낙 작아서 처음엔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젠타뿐만 아니라 다른 페어리들도 비통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해방자인 너에게도 말하지 않았나 보구나. 여왕께서는…… 돌아오실 생각이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분은 크로톤의 죽음을 지켜보러 남으신 게 아니야. 한날한시에 태어난 반쪽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시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