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증오라는 이름의 수갑 (3)
어두컴컴한 동굴을 탐색하는 느낌이었다.
이곳이 어떤 생명체의 체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광대했다.
광원은 부족하지 않았다. 디아볼릭으로 뽑아낸 검기가 빛을 발하고 있었던 데다 토니아의 날개에서도 찬란한 광휘가 가루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선을 두는 곳마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불쾌해.”
꿈틀거리는 통로의 내벽에서는 얼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 크기도, 생김새도, 종족도 각양각색이었다.
여지껏 크로톤이 흡수해온 죄수들의 얼굴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으앗!”
하지만 눈앞의 땅바닥에서 한 죄수의 얼굴이 튀어나왔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보법을 시전해 뒤로 물러나고야 말았다.
그 순간 토니아는 일시적으로 나를 놓치고 말았고 우리는 이 통로에 돌입한 이래 처음으로 분리되는 상황에 다다랐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폭포수처럼 내 정신에 쏟아부어졌다.
‘우리와 하나가 되자, 등반죄수여.’
‘당신의 무거운 숙원 역시 이곳에서는 무의미해집니다.’
‘영혼이 끝내 원하는 것은 안식. 우리가 그것을 줄 수 있다.’
‘윤회는 더 나은 차원의 존재가 되기 위한 끝없는 고행. 그곳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열쇠를 우리는 찾았노라.’
‘슈바인 스트링거, 지금 당장 자신의 목을 찔러라. 그러면 그 피를 우리가 탐하여 합일을 이룰 수 있다.’
물리적으론 구분하기 어려운 시끄러운 외침들이 기이하게도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뇌리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만 둬!”
토니아가 다시 내 이마에 내려서자 나는 흠칫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디아볼릭의 검끝이 내 명치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정말로 내가 목을 찌르려 한 건가?”
“정신파의 물결에 휩쓸리면 안 돼. 혼자서 수백 명의 상대와 줄다리기를 할 수 없듯 무력한 꼴이 될 테니까. 나와 절대 떨어지지 마.”
토니아가 내 정신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페어리 퀸과 떨어지는 순간 전염병 창궐지역에서 방역복을 벗어 던지는 꼴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미안. 점멸 같은 거 쓰면 큰일이겠네. 앞으론 주의할게.”
“괜찮아. 우리가 크로톤의 본체를 향해 가는 걸 저들은 막으려는 거야. 신체에 침입한 세균에 백혈구가 대항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거지.”
“적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아까처럼 잡아먹으려 드는 거군.”
“내가 버티고 선 이상 문제 될 건 없어. 승부는 체내에 우리를 침투시킨 시점에서 이미 끝난 거야. 우리는 전리품을 주우러 가는 거고.”
토니아의 말대로 다른 방해꾼이나 예상 외의 사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통로의 천장이 높아졌을 땐 늘어난 물주머니 같은 거대한 장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마치 외계 생명체의 둥지에 떨어진 SF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데까지 생각이 뻗칠 수 있었던 건 기괴한 몸속 풍경에 대해서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고 그건 반가운 신호였다.
“갈림길이 나왔어, 토니아. 이제 어디로 가지?”
“내 요정술로는 본체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그러면 설마 찍으라는 건가?”
“아니야. 너에겐 기원검의 일부가 있잖아. 이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파천황의 신물이 서로를 잡아당길 거야. 우리는 그걸 따라가면 되고.”
토니아의 말대로 인벤토리에서 기원검 네메시스의 칼자루를 꺼냈다. 그러자 어디선가 사자의 포효가 한 번 들리는 듯하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통로에서 우릴 지켜보던 죄수들의 얼굴이 질겁해서 달아나버린 것이다.
‘칼자루밖에 없을 때도 이 정도의 신령함을 발휘하는데, 이걸 전부 회수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긴. 그러니 8층의 죄수들마저 이 검의 파편을 탐내는 거겠지.
기원검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선이 갈림길의 한쪽을 가리켰다.
“좋았어. 가자.”
토니아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경공술을 쓸 수는 없었지만 너무 느긋하게 달릴 수는 없었다. 제트카이저의 콕피트를 벙커 삼아 버티고 있는 친구들의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동속도는 준마가 내달리는 수준에서 타협을 보고 있었다.
점점 크로톤의 본체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토니아의 긴장감과 고양감, 그리고 혼란스러움마저 내게 전염되는 것 또한 명징해졌다.
“왜 그래, 토니아. 크로톤에게 복수할 순간이 다가오니까 긴장되는 거야?”
토니아는 크로톤에게 한쪽 날개와 한쪽 팔을 잘렸다고 한 바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은 적 없지만 신체를 그렇게나 훼손시킨 불구대천의 원수라면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오랫동안 복수의 기회만을 기다리던 자가 목표물의 턱 끝까지 추격해왔을 때 흥분하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정령왕의 부산물에서 빚어졌다는 페어리라 하더라도 말이다.
“고백하자면 복수라고 할 수는 없어.”
“복수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복수’라는 단어를 쓰는 생명체는 우주 어디에도 없으니까.”
황당한 마음에 달리는 속도가 잠깐 주춤거렸다. 그만큼 토니아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더 숨기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내 왼팔과 왼쪽 날개는 크로톤이 떼어간 것이 맞아. 하지만 그건 습격이나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었어. 기원검의 파편이 잘라낸 것은 원래 한 생명체의 절반이었으니까.”
충격적인 사실이 토니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크로톤과 나는 샴쌍둥이거든.”
*
신화 속의 존재가 인간세계에 어우러져 사는 한 대륙이 있었다.
숱한 인외종들 중에는 인간들과 전쟁을 벌이거나 노예로 삼으려 들 만큼 호전적인 종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인간들과 거래를 하거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종족 또한 적지 않았는데, 페어리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생명체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서 힘의 원천을 얻으니까. 자연히 풍부한 감정을 가진 인간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어.”
페어리를 꿀벌이라고 친다면 인간의 왕국은 그야말로 만발한 꽃밭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숱한 로맨스와 기사도의 낭만,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이야기들이 인간과 페어리의 합작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우리가 태어났지.”
그 페어리의 이름은 크로토니아.
정령왕의 장난이었는지, 아니면 불온한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크로토니아의 존재는 페어리 일족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신체의 절반을 함께 공유하는 샴쌍둥이 페어리가 태어난 것이다.
“새로운 페어리는 세계수의 꽃잎에서 흘러나온 포자가 뭉쳐서 만들어져. 워낙에 드문 일이라 일족의 모두가 함께 모여 막내 페어리의 탄생을 기리지.”
하지만 크로토니아가 형체를 갖추었을 때 장로들의 손에 든 축배는 모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페어리들의 설화에서 샴쌍둥이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몇몇 나이든 페어리들은 정령왕이 현신했을 때의 언령들을 기록하고 있었어. 그 문헌들에는 분명히 한 존재의 탄생을 경고하고 있었거든.”
“일종의 예언을 한 거구나. 묵시록처럼.”
“한 쌍의 날개를 두 아이가 나눠 갖게 될 터이니 한쪽은 사내요, 다른 한쪽은 여인일 것이라. 그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세계수는 말라붙어 다시는 그 뿌리를 만천하에 드리울 수 없으리라.”
달리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분명한 예언이었다.
세계수가 사라진다면 정령의 관할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존속이 위태로워진다. 샴쌍둥이 페어리가 태어나는 순간 일족의 멸망이 다가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불길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당장에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장로들 사이에서 흘러나왔어. 하지만 페어리는 절대 서로를 해칠 수 없어. 다른 생명체의 감정을 좌우할 수 있는 페어리에겐 동족 혐오의 유전자가 애초에 없었거든.”
죽일 수 없으니 머나먼 땅으로 추방하자는 이야기와 인간세계에 내놓았을 때 더 큰 혼란이 일어날 테니 일족의 내부에서 계속 곁에 두고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크로토니아라는 페어리의 특별함에 있었다.
“보통의 페어리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온통 오른쪽의 여자아이가 품고 있었어. 바로 나지. 하지만 왼쪽의 사내아이의 능력은 역사상 그 어떤 페어리도 갖지 못했던 힘이었거든.”
샴쌍둥이의 사내아이가 가진 힘은 감정의 크기를 키우는 힘이 아니었다.
용기가 없던 자에게는 불굴의 용기를 주고,
미약한 연모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의 사랑으로 키워주곤 했던 페어리들의 정령술.
그런데 사내아이의 힘은 그 정반대였다.
“감정을 완전히 죽여버리는 힘. 그 어떤 난폭한 투사도, 위대한 정신을 가진 숭고한 영웅도 백치 어린아이처럼 만들어버리는 존재.”
크로토니아가 성장하면서 장로들은 자연히 예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예언 속의 이 페어리를 세상에 내보냈다가는 세계수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가 말살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고 종족을 번식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바로 ‘감정’이다.
그런데 이 페어리는 그 감정을 완전히 죽여 버린다.
자연히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번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증오하지 않아 전쟁 또한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살아남고 싶지 않아 종말이 도래할 것이다.
“그래서 장로들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어. 우리를 두려워한 나머지 인간들에게 세계수의 입장권을 열어준 거야.”
그것은 페어리 일족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도박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크로토니아를 어찌할 수 없었기에 인간들을 부추겨서 이 페어리를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다.
간접적인 축출.
하지만 용단의 순간이 너무 늦었던 것이 탈이었다.
크로토니아라는 페어리는 그때 이미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각성했고, 단순한 접촉만으로 생명체의 감정을 키울 수도, 죽여버릴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거듭나 버렸다.
“우리를 이용하려는 인간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았어. 나는 그들을 모두 설득해서 돌려보내려 했지. 아무리 위험한 암살자라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순수한 동심을 일깨우는 건 내겐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내내 차별받아오기만 했던 사내아이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존재의 감정은 표백시켜버리는 것과 달리 이 사내아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말살 대상으로 취급해 온 일족과 세계 전체에 대한 증오의 불씨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끔찍한 일의 단초가 벌어지게 되었다.
“우리 둘은 허구한 날 다투었어. 하지만 본질적으로 서로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으니 언제나 더 강한 열망을 가진 쪽이 승리하게 되었지.”
그리하여 사내아이의 복수심이 샴쌍둥이 안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세계수의 안에서 최초로 인간들의 군대가 만들어졌어. 크로톤의 힘으로 표백된 감정을 가진 인간들이 나의 힘으로 우리를 지킨다는 절대명령을 품은 병사들로 탄생하고 만 거야.”
사내 아이 크로톤의 열망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다.
예언을 피하기 위한 발버둥이 거꾸로 예언을 완성시키는 아이러니.
“우리는 세계수를 불태워버리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