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증오라는 이름의 수갑 (2)
철왕전기 제트카이저의 최종합체인 ‘파이널퓨전’.
애니메이션에서는 그 장면이 무려 75초나 된다.
몇몇 영특한 꼬마들은 모두가 열광할 때 나 홀로 차가워져서는 생각해보곤 한다.
‘어째서 악당은 주인공 로봇이 합체할 때 공격하지 않는 거지?’
용자물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여아용 마법소녀물에서도 이 법칙은 통용된다. 아무리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당도 변신이나 합체할 때는 기다려줘야 하는 법이다.
거기엔 어른의 사정이 있다.
자주 사용되는 장면에 제작진이 한 땀 한 땀 만드는 장면을 뱅크 씬(Bank Scene)이라고 하는데 변신합체 장면이 대표적이다.
제작비를 갈아 넣어 퀄리티를 높인 장면이기 때문에 새로운 배경이나 인물이 난입할 수 없는 구조다.
악당이 도중에 방해하는 것이 곧 제작비 출혈로 이어지는 것이다.
“무슨 짓거리인지 몰라도 내가 구경만 할 것 같으냐.”
하지만 여기는 차원감옥인 푸르가토리움.
이곳에 어른들의 사정 따윈 없다.
크로톤은 훌쩍 뛰어올라 대검을 내리칠 기세였다.
‘아닛, 저 비겁한 녀석.’
공중에 떠 있는 제트카이저의 동체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내가 당황한 채 대응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제르비어스는 망설임 없이 외쳤다.
“맥시멈 윙 디펜스 모드!”
제트카이저의 백플레이트에 결합된 맥시멈 윙이 황금빛 방어막을 형성해 크로톤의 대검과 충돌했다. 태산을 잘라버릴 듯한 기세였던 대검이 한없이 느려졌다.
[결합 케이블 도킹 완료]
[거신병의 합체가 완성되었습니다.]
[파일럿 4인의 마인드 싱크로가 형성됩니다.]
[기동력이 400%로 오릅니다.]
[유압 액추에이터의 출력이 400%로 오릅니다.]
오므렸던 맥시멈 윙이 펴지자 그 중력파의 압력에 크로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제르비어스의 눈빛은 먹잇감을 포착한 독수리의 그것처럼 빛났다.
“파이널퓨전의 유지시간은 길지 않아. 최단 시간에 승부를 본다!”
“마왕, 네 말이 맞아. 크로톤이 이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놔두면 안 돼.”
“그럼 간다. 제르카이저 부스트 온!”
……방금 저 녀석, 로봇의 이름을 은근슬쩍 자기 이름과 비슷하게 바꿔 부른 것 같은데?
그 의심을 입 밖으로 낼 여유는 없었다.
제트카이저의 인피니티 블레이드가 지상의 크로톤과 충돌하면서 검술을 담당하고 있는 내 쪽도 바빠졌기 때문이다.
조종간과 레버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쇳덩어리로 전락했다.
‘마인드 싱크로’의 면모가 발휘되면서 네 명의 정신작용이 동시다발적으로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파천황이 내려준 텔레파시 권능의 존재 덕분에 이런 허황된 설정조차 구현화되고 만 것이다.
“고철덩어리로 짓이겨주마!”
크로톤의 대검이 맹폭하게 휘둘러졌다.
나는 무극파천검법의 초식으로 대응했다. 인피티니 블레이드의 내구력은 실로 대단해서 그 막대한 무게가 깃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쿠아아아앙!
로봇과 거인의 무기가 서로 충돌할 때마다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일대의 지형을 실시간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크로톤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민첩하게 움직이는 제트카이저의 운신 능력에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이 틈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마자,
캉이가 맹수 특유의 본능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촤아아아악!
허리를 깊게 베인 크로톤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녀석이 흘린 피가 설원을 붉게 물들였다. 거인과 로봇 사이에 붉은 실선이 만들어졌다.
“내 주먹은 천만마력으로 불타오른다!”
검을 휘두르면서 저런 대사를 외치는 건 좀 이상하다고 느끼던 찰나,
제트카이저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다른 세 파일럿이 정신적으로 나를 홱 하고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는 전투에 집중하느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데도 말이다.
“미, 미안. 잡념은 버릴게.”
크로톤을 몰아붙이던 인피니트 블레이드가 결국 녀석의 방패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아마 받은 충격량이 일정량을 넘어서는 순간 역소환되는 구조인 듯했다.
녀석이 다른 무기를 소환하기 전에 치명타를 입혀야 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다음 행동에서 파일럿들이 할 움직임이 빠르게 정해졌다.
이제 완전히 몰입한 아스티나가 명령어를 외쳤다.
“맥시멈 윙 모드 체인지!”
황금날개가 촤라락 접혀 드는가 싶더니 여덟 개의 기다란 채찍처럼 형태를 변환했다.
‘아니, 이런 기능이 있는 줄도 나는 몰랐는데.’
맥시멈 윙은 단순한 비행장치가 아니었다. 방어는 물론이거니와 훌륭한 공격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네 개의 채찍이 크로톤의 양팔을 붙잡아 거칠게 끌어내렸다. 거인의 압도적인 괴력이 그것에 저항했으나 그 순간 안면 방어에 허점이 생겨났다.
검을 들지 않은 제트카이저의 주먹을 대포처럼 겨누었다.
“데우스 엑스 로켓 펀치!”
불을 뿜으며 장쾌하게 날아간 주먹이 크로톤의 얼굴을 짓이겼다.
레나스가 말했던 출력 400%의 수치는 허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경악스럽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크로톤의 뒤통수가 등과 닿을 정도로 로켓 펀치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늘어난 목을 붙잡고 비틀대던 크로톤은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짓을 벌였다.
“거추장스럽군.”
대검을 버리더니 양팔로 자신의 귀를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고장 난 부품을 떼어버리듯 목 위의 얼굴을 강제로 몸에서 떼어냈다.
그것은 자해를 넘어선 자살에 가까운 개념.
우리 네 파일럿이 잠깐 주춤한 사이 크로톤은 극적인 형태 변환을 시도했다.
“내가 선호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지금은 달리 수가 없겠어.”
어깨 위에서 다시 솟아오른 크로톤의 얼굴엔 수십 개의 붉은 점이 붙어 있었다.
‘점? 아니야. 저게 모두 눈이다.’
그것은 포유류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곤충의 눈에 더 가까웠다.
다리의 개수 역시 6개로 늘어났다.
가슴 근육의 대흉근 두 쪽이 포문처럼 개방되니 그 안에 꿈틀대고 있는 것은 흉악한 모래선충의 입이었다.
전체적으로 곤충과 벌레가 결합한 그로테스크한 변신이었다.
“젠장.”
어물쩍대다가 공격 타이밍을 놓친 것이 아니었다. 반응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찰나에 가까운 변신이었던 것이다.
“내가 붙잡아왔던 세 녀석 모두 그 안에 기어 들어간 줄은 몰랐다. 감옥의 5층에서 내 주박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지.”
입술에 꽤 가까운 무언가가 크로톤의 얼굴에서 꿈틀댔다.
“토니아, 진작에 얼어 죽었다고 생각했거늘, 아직도 그 숨을 연명하고 있었나.”
내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페어리 퀸의 동작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은 본능에 각인된 두려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네놈들의 장단에 맞춰주지 않겠다. 제물을 넷이나 잃어버리는 건 아깝지만, 토니아 너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면 비싼 값도 아니지.”
지금까지 크로톤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이유야 명약관화하다. 제트카이저 안에 탑승한 우리 넷을 탐내고 있었기에.
하지만 이제부터는 ‘오직 죽이기 위해’ 덤벼올 것이다.
타라라라락!
일순간 크로톤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까마득히 먼 거리까지 물러났다. 여섯 개나 되는 크로톤의 다리가 일궈낸 괴물 같은 기동 속도였다.
덤벼들 거라 생각했던 우리는 허를 찔렸다.
“아뿔싸. 무기를 버린 이유가 있었어. 원거리에서 요격할 생각…….”
콰아아아아앙!
크로톤의 가슴에서 일직선의 빛줄기가 쏘아져 제트카이저의 오른팔에 충돌했다.
“크으윽!”
“으윽.”
네 명의 파일럿은 일제히 오른팔을 움켜잡았다. 불길에 타는 듯한 통증이 동시에 우릴 덮친 것이다.
고통에 익숙한 내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바로 후속타가 올 거야. 정신 차리고 피해!”
여전히 크로톤은 거리를 좁힐 의사가 없었다. 연료가 바닥날 걱정을 하지 않고 연사를 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 다니면서 제트카이저는 우주 최강의 로봇에서 폐품 근처의 무언가로 전락하는 중이었다.
최초의 포격을 허용했던 오른팔은 구동률이 30%로 떨어졌고, 방패 역할을 했던 인피니티 블레이드도 검신이 절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필패야. 승부수를 띄운다.”
평소라면 내가 내뱉었을 대사였건만,
이번에는 달랐다.
폭렬마왕 제르비어스의 눈빛이 승부사의 그것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승부수가 무엇인지 다른 셋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한 명이 저지르면 그 즉시 우리 또한 알게 되는 마인드 싱크로 상태니까.
“저 녀석, 잡자.”
맥시멈 윙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팽이처럼 제트카이저의 동체를 휘감았다. 그러고 나서 펼쳐지는 반탄력으로 파괴력을 높였다.
제트카이저의 동체를 한순간 ‘거대한 드릴’로 만들어낸 것이다.
대흉근을 덮어버린 크로톤이 내뺄 준비를 했다.
“그런 무식한 공격을 지금의 내가 맞아줄 것 같으냐?”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출혈을 감내하기로 했다.
“축퇴로 폭주를 허가한다!”
철왕전기 제트카이저 마지막 회.
우주정거장에서 최종 빌런을 무찌른 제트카이저는 훈이를 지구로 되돌려보내기 위해 핵심 엔진인 축퇴를 폭발시켜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재현하려는 것이다.
[축퇴로가 3초 후 폭발합니다.]
[거신병의 하반신이 완전 소멸할 수 있습니다.]
꽈아아아앙!
인간으로 치면 아랫배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막대한 폭발이 일어나 제트카이저의 상반신을 밀어내었다.
“뭣이?”
생물체의 반응속도론 절대 피할 수 없다.
무기는 진작에 내다 버렸고,
맥시멈 윙이 일직선으로 변해 공기저항을 줄였다.
노리는 것은 단 하나.
제트카이저의 가슴에 달린 사자상이 크로톤을 씹어 삼키는 것이었고,
그것은 성공했다.
“끄아아아아악!”
깨문다기보다는 거의 크로톤의 육체에 탄환이 되어 처박힌다는 느낌의 충돌이 일어났다. 사자상의 네 송곳니가 크로톤의 가슴과 복부에 깊게 박혀 놓아주지 않았다.
[거신병의 출력이 20% 이하로 떨어집니다.]
[모든 부스터의 작동이 정지됩니다.]
콕피트의 전원이 전부 내려갔는지 액정은 모두 검은 돌덩어리가 되었다. 버튼에서 나오는 주황색 불빛만이 을씨년스러웠다.
“크아아아아! 죽여버리겠다. 이 쇳덩어리와 함께 집어삼켜 주마.”
마인드 싱크로가 해제되었다.
파일럿들은 이제 바깥 상황을 알 방법이 없었는데,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와 촉수가 꿈틀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압착기에 들어간 듯한 진동은 덤이었다.
레나스가 상황을 알려왔다.
[층장 크로톤이 점성 고체로 변환해 거신병의 표피를 부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콕피트가 완전 흡수될 때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여기서 더 덩치를 키울 수 있는지는 몰랐다.
아예 제트카이저의 남은 상반신 전체를 집어삼킨 후 위산으로 그것을 녹여버린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토니아가 내 귓불을 잡아당기며 비장하게 말했다.
“슈바인 스트링거, 지금이야. 크로톤의 육체로 건너가야 돼.”
“레나스, 사자상의 입과 내 파일럿 석을 연결시켜 줘.”
[위험합니다. 적의 신체 내부로 돌입한다는 작전은 파일럿의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토니아가 그 말을 잘랐다.
“내가 있으면 안전해. 나를 크로톤의 본체가 있는 곳까지 옮겨다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승부도 끝나.”
“떨어지지 않도록 내 옷섶에 들어가 있어, 토니아.”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나는 조종간을 놓고 일어섰다.
오른손에 소환되는 것은 마검 디아볼릭.
오랜만에 잡아보는 단단한 칼자루의 감촉이 나를 안정시켰다.
“괜찮겠어, 슈바인?”
“30분까지 걸리지도 않아. 그 안에 크로톤의 본체를 죽이고 너희를 구출하러 오겠어.”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 캉이는 약속이나 한 듯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드 싱크로의 기능은 해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사불란한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다녀올게.”
레나스와 나는 사자상의 턱에서 뛰쳐나와 크로톤의 뱃속을 찢고 들어갔다.
잠시 후 꿈틀대는 녀석의 장기 내부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이제 대미를 장식할 차례다.
“기생충에 잡아먹힐 준비는 됐냐, 거인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