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증오라는 이름의 수갑 (1)
“오메가 위프야, 너는 싸우고 싶으냐.”
성의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일까.
제르비어스가 홀로 서 있는 화로에는 더 이상 불길이 타오르지 않았다. 그가 채찍을 휘둘러 무너뜨린 천장과 벽의 잔해 속에서 미약한 잔불만이 티딕거리며 단말마를 내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해 봐라, 인마. 네가 만들어진 목적은 마음껏 날뛰고 싶어서잖아.”
스스로를 마왕이라 가리켰던 218번 크로톤은 어느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본체에게 흡수당해 버렸다.
그로부터 이십 여분이 지났으나 제르비어스는 화로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기 어려웠다.
누군가가 붙잡아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부메랑처럼 날아온 질문 때문이었다.
“그래, 애꿎은 너를 탓할 문제가 아니지. 만철도시에서 교훈을 배웠잖아. 무기에겐 죄가 없어. 그걸 쥐는 자의 의지가 중요하지. 결국엔 내가 스스로 정해야만 해.”
나는 왜 감옥을 오르고 있는가.
폭렬마왕은 무엇을 위해 폭력을 해방하는가.
“투쟁과 살육의 나선에서 언젠가 내려오기 위해서지.”
그 이유를 선사해주었던 슈바인 스트링거가 처음 다른 층으로 떠나버리면서 제르비어스 폰타인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사나이를 움직이는 대의명분을 타인에게 맡겨서는 안 되었다.
‘그랬으니 다른 마왕의 빈정거림에 제대로 대답도 못 했지.’
이제부터는 달라야 한다. 다르게 살겠다.
이 수갑으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폭렬’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망설이지 않겠다.
잔불 속에서 한 마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늘어난 채찍이 화로의 문을 두 동강 냈다.
“어머나, 깜짝이야!”
“으음?”
아무것도 없는 복도의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르비어스는 곧 그것이 허둥대며 날개를 퍼덕대는 작은 요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냐?”
“설명할 시간이 없어. 이 성에 남아 있다는 건 등반죄수 슈바인의 친구라는 뜻이겠지?”
“그놈의 상사다. 내가 마용파의 수장이야.”
“……그렇게 말할 거라 하더군. 어쨌든 너를 해방시켜 주러 왔어. 내가 만지면 크로톤의 주박이 풀릴 거야. 괜찮지?”
“너야말로 괜찮겠나. 내 피부와 접촉하면 생명력을 빼앗기고 저주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얕보지 마. 나는 정령으로부터 태어난 페어리들의 여왕이거든.”
페어리 퀸 토니아가 제르비어스의 뿔을 어루만졌다.
*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이 소환에 응했습니다.]
*
“형아가 나를 부른다고? 것 봐, 내 말이 맞았잖아.”
토니아가 두 번째로 발견한 성안의 억류자는 구미호 소년 캉이였다.
아이의 주변에 일렬로 세워진 도미노 블럭을 본 토니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바깥이 무슨 상황인 줄은 알고 있는 건가?
그런데 캉이는 아무 생각이 없는 천치가 아니었다.
“형아를 믿으니까.”
페어리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순도 높은 신뢰인지를. 어린아이가 그 부모에게 품는 감정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형아도 나를 믿어.”
“그러니?”
“나는 짐덩어리가 아니라고 했어. 엄연히 등반대의 일원이야.”
캉이는 토니아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엉덩이 뒤에 달린 하얀 꼬리가 캉이의 허리에 또아리를 틀었고, 토니아는 그 위에 살포시 앉았다. 포근하고 말캉한 감촉이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몸에 잠재된 힘 또한 환상적이었다.
‘정령왕에 버금가는 신비로운 존재. 성체로 자라나게 되면 정말 볼만하겠는걸.’
토니아가 주박을 풀자 캉이는 싱긋 웃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이제 너도 같이 노는 거지?”
소환에 응한 캉이는 토니아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심 없는 꼬마의 한 마디가 페어리 퀸의 눈썹을 파르르 떨리게 했다.
“글쎄, 꼬마야.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
[친구 캉이가 소환에 응했습니다.]
*
“허억허억! 도대체 출구는 어디에 있는 거야?”
어느덧 아스티나의 은색 머리카락은 빳빳하게 말라 있었다.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뛰어다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로톤의 성안은 정직한 구조였다. 구불구불한 미로나 기문둔갑의 힘이 실린 진법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크기만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 뿐.
“출구는 포기하자. 먼저 친구들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몰라.”
눈을 감고 기감을 최대로 펼쳤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약동하는 생명력을 포착할 수 있었다.
아홉 개의 근원을 가진 환수.
구미호 캉이를 찾은 것이다.
폭류천마검의 수정구에서 광휘가 터져 나왔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하이퍼 워핑(Hyper Warping)]
아스티나의 몸이 주욱 늘어나듯 공간을 찢고 내달렸다.
그러나 그녀가 멈춰 섰을 때 캉이는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사이 은둔술이라도 새로 익힌 건가 싶었으나 주변 어디에도 구미호의 기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찾을 필요 없어. 네 친구인 슈바인 스트링거의 곁으로 간 거니…… 꺄악!”
토니아는 무방비하게 아스티나에게 날아오다가 기겁을 하며 날갯짓을 멈췄다.
폭류천마검의 서슬 퍼런 칼날이 페어리 퀸의 목젖을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느닷없이 집채만 한 무기가 성큼 다가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함부로 내 간격에 들어오래?”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네 친구의 부탁을 받고 널 주박에서 풀어주러 온 거야.”
토니아의 말에도 아스티나의 동공에 담긴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월장석을 팔아서 미안해.”
“뭐?”
“그렇게 전하면 날 믿을 거라고 했어. 의미는 나도 몰라.”
원래 그녀가 있던 차원에서 어머니인 일레인 쿠디슈에게서 받았던 월장석.
아스티나는 4층 만철도시의 카지노에 잠입하기 위해 그것을 팔아야 했고, 그 사실은 오직 슈바인과 그녀 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폭류천마검이 스르륵 밑으로 내려왔다.
“미안. 크로톤이 나를 세뇌하려 들어서 예민해져 있었거든.”
토니아는 경계를 푼 아스티나에게 접근해 조심스레 상대의 어깨에 올라탔다.
“페어리는 접촉한 상대의 마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어.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이미 세뇌당한 거 아니고?”
자칫 위험한 스파이를 유일한 원군에게 데려가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 토니아의 마음속에 우려가 담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아스티나의 마음속에 각인된 복수의 원념은 강렬했던 것이다.
‘어떻게 필멸자인 한 인간의 삶에 이토록 두꺼운 감정이 쌓여 있는 거지?’
까마득한 시간 동안 회귀를 반복하며 고통받아야 했던 아스티나 류는 자신의 사연을 줄줄 읊는 대신 한 마디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마법사니까.”
“……마법사? 너, 검을 들고 있잖아.”
“이제 더 이상 혼동되지 않아. 전공은 마법. 부전공이 무공이야.”
아버지인 천마 류운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닌 의지. 아스티나는 자신이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마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크로톤은 모두 실패한 모양이네. 너희 셋은 이 기암거성에서 무언가 각성한 것처럼 보여.”
“맞아. 그러니 이제부터는 감히 마법사를 우롱하려 든 대가를 이 성의 주인에게 치르도록 할 거야.”
*
[친구 아스티나 류가 소환에 응했습니다.]
[친구 토니아가 소환에 응했습니다.]
*
순간이동을 마친 아스티나는 당황했다.
난생 처음 접하는 금속 장치들에 둘러싸여 요란하게 날뛰는 거신병의 뱃속에 소환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나, 그 막대기를 잡아! 어서!”
하지만 아스티나의 옆 좌석에서 캉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바이크 라이더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른쪽을 바라보니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리가 비었잖나, 아스티나 류. 어물쩍거렸다가는 한 명의 파일럿으로 제 몫을 다하지 못할 거다.”
“제르비어스? 아니, 것보다 이게 도대체 뭔데?”
“으익! 층간 구역에서 무식하게 용사 놈과 칼싸움만 하더니 이 꼴이 난 거 아니냐!”
조종석에 엎드려 있는 제르비어스의 손놀림은 현란했다. 실시간으로 두 개의 스틱과 세 개의 레버를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두 눈은 정면의 패널을 주시하고 있었다.
혼란을 잠재우는 것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우린 오늘만큼은 마왕 녀석의 지휘를 따르기로 했어.”
“슈바인? 돌아온 거야?”
“응. 재회의 감격은 나중으로 미뤄두자, 아스티나. 지금은 저 미친 거인을 쓰러트려야 하니까.”
쿠우우우웅!
거센 충격과 함께 아스티나의 몸이 조종석에서 튕겨나가려 했으나 제트카이저의 관제 AI가 된 레나스가 한 발 더 빨랐다. 벨트가 휘리릭 늘어나며 아스티나의 허리에 채워진 것이다.
[4번 파일럿 아스티나 류를 승인합니다. 전투 포지션은 원거리 포격과 교란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기 어려웠으나, 아스티나는 일단 조종간을 붙잡기로 했다.
원거리에서의 싸움이라면 마법사의 특기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당면한 상황은 아스티나가 활약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제르비어스가 이를 악물었다.
“마운트 포지션을 빼앗겼다. 용사 놈아, 양팔로 스프롤을 했어야지!”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너만 아는 용어로 설명하지 말라니까.”
“에잇! 됐고. 캉이야, 오른쪽 페달을 누르면서 3번 스틱을 중간까지 당겨. 내가 신호하는 순간 놓으면 되는 거야.”
“응!”
콕피트의 액정에 검은 주먹이 가득 찼다. 제트카이저를 넘어트리고 올라탄 크로톤이 파운딩을 내려치고 있었던 것이다.
파일럿이 분산되면서 혼란스러운 틈을 상대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어딜! 호크 아이 빔(Hwak Eye Beam)!”
하지만 제르비어스가 버튼 3개를 순서대로 번개처럼 누르자 제트카이저의 안구에서 두 줄기의 레이저 빔이 쏘아져 나갔고, 그것은 크로톤의 오른쪽 눈썹을 태우며 상대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뭐야? 저런 기능도 있었어?”
슈바인 스트링거의 얼빠진 목소리가 콕피트를 가득 채웠다.
“5화에 제트카이저가 이 호크 아이 빔으로 훈이를 폐건물에서 꺼내주잖아. 아오, 내가 이것들을 데리고 메인 파일럿을 해야 하다니.”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제르비어스는 손을 한 치도 쉬지 않았다.
곧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구구구구궁.
제트카이저의 하반신이 180도 회전하더니 상체가 뒤틀린 채로 무릎을 튕겨낸 것이다.
생물체와 전혀 다른 매커니즘으로 꿈틀대는 바람에 크로톤은 당황했고, 메인 파일럿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용사 놈아! 라이트 훅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슈바인이 때마침 지시를 따랐고 제트카이저의 주먹이 크로톤의 턱을 후려쳐 빈 공간을 만들어냈다.
“익스트림 부스트 온! 20퍼센트 출력으로.”
통하고 튕겨 오르듯 하위포지션에서 빠져나온 제트카이저가 다시 하반신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일이군. 방금 전까지는 술 취한 노병처럼 비틀대더니 갑자기 민첩해졌어?”
크로톤의 입장에서는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소중한 제물을 셋이나 빼앗겼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르비어스가 레나스에게 외쳤다.
“맥시멈 윙과 인피니트 블레이드는 어떻게 됐지?”
[4분 전 연성을 마치고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습니다. 21초 뒤에 상륙합니다.]
“상륙 포인트에 때맞춰 서 있어야겠군. 캉이야, 들었지? 네가 두 다리를 맡고 있으니까 항상 내 명령을 주시해라.”
빙설협곡의 한쪽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제트카이저의 체고에 맞먹는 황금색의 날개와 파괴의 신을 형상화한 듯한 대검이 날아들었다.
제트카이저가 제 자리에서 수직으로 솟구치면서 그 날개와 융합했다.
“외쳐라, 파이널퓨전!”
제르비어스의 외침에 슈바인과 아스티나가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자 분노에 찬 마왕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보라색 마기가 콕피트를 가득 채웠다.
“망설인다 이거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시동어는 모두 함께 외쳐야 제대로 발동됩니다.]
맥시멈 윙이 제트카이저의 등에 충돌할 기세로 날아들고 있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두 동강이 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된다.
결국 콕피트 안에는 네 명의 약속된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에라, 모르겠다. 파이널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