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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72화 (172/300)

#172. 나의 합체와 너의 합체 (5)

“퉷!”

크로톤은 입속에서 오물대던 핏덩어리를 거칠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내 등 뒤를 향해 파리를 내쫓는 듯한 손짓을 했다.

“지금부터 다가오지 마라. 괜히 휘말렸다가 브루퉁스의 꼴이 나기 싫으면.”

나는 브루퉁스라는 녀석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 죄수의 최후가 참혹했을 것이라는 것에 내 오른쪽 손목을 걸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뒤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던 거인들이 혼비백산 달아나는 것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그래, 우두머리라면 그런 태도를 지녀야지.”

제트카이저의 콕피트에는 후방을 비추는 패널이 있었기에 어차피 거인들의 습격엔 당하지 않았겠지만 크로톤이 일 대 일 대결을 선포한 것은 역시 달가운 일이었다.

츠아앙!

녀석은 곧 일전에 보여주었던 불투명한 대검과 방패를 소환했다.

그리고 대검의 날을 방패와 한 번 부딪히고는 내게 턱짓했다.

“등반죄수여. 그 장난감의 어느 부위에 숨어 있는지 말해라. 그 깡통을 두들겨 패다가 실수로 네놈을 죽여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느냐.”

“안 알려줄 건데? 이쪽에서는 네 급소를 닥치는 대로 공격할 거니까 내가 훨씬 유리한 셈이군.”

“말해주지 않겠다면 알겠다.”

크로톤의 이마에서 세 줄기의 실선이 뻗어 나오더니 제트카이저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가슴 부근에 있군. 게다가…… 너무 작아서 처치곤란이었던 페어리들이 한데 모여 있기까지.”

“젠장. 탐색마법 같은 것도 할 줄 아냐.”

사실 놀랍지도 않다. 녀석이 흡수한 죄수들 중에서 저런 기본적인 능력을 가진 녀석이 한둘은 아닐 테니까.

“죽이지 않아볼 터이니 유언은 들어볼 필요 없겠군. 덤벼라.”

“잠깐만. 내 쪽에서는 널 죽일 작정이니까 유언을 들어줄 아량이 있거든? 뭐 하나만 물어보자.”

크로톤은 도개교의 한쪽 끝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자리를 비운 동안 1층 화룡도의 교도관을 만나고 왔다.”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인가?”

“그래. 그 음흉한 녀석이 말해주기를 교도관은 특정 죄수를 후임자로 지정할 수 있다더군. 그때 문득 궁금해지더란 말야. 네 녀석처럼 막강한 놈이 어째서 탈옥을 노리지 않고 5층에 짱박혀 있는 거지? 혹시 교도관으로 내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패가 무서워 등반하지 않는 거냐?”

“아니다. 내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과 긴밀한 사이인 건 맞다만 후임자의 계약 같은 건 맺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 층에 머물러 있는 거다.”

“왜지? 페어리들의 말에 의하면 너의 제물이 된다는 뜻은 영혼마저 하나로 합체된다는 뜻이라던데. 그러면 네가 여지껏 흡수한 죄수들의 형량이 계속 더해진다는 뜻이잖아. 이 황량한 설원이 뭐가 좋다고 계속 늘어나는 형량을 감당하면서까지 층장으로 군림하는 거냔 말이다.”

크로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녀석은 잠시 입을 떼었다가 마음을 바꿨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나만 묻는다고 하지 않았나. 미안하지만 문답은 여기까지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쪼잔하시구만.”

“마음껏 비난해라. 어차피 나와 흡수당하고 나면 자연히 그 답은 알게 될 테니까.”

“좋아. 간다.”

순식간에 전투 모드로 들어간 나는 조종간을 붙잡은 채 납작 엎드렸다. 그러자 내 정수리에 엎드린 토니아가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머리카락을 말고삐처럼 붙잡는 게 느껴졌다.

‘재밌네. 로봇에 올라탄 나와 내 머리에 올라탄 요정이라니.’

제트카이저의 강철 준족이 도개교의 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크로톤과의 거리는 찰나 간에 좁혀졌고 나는 준비한 주먹을 내질렀다.

녀석은 한 대 맞아보고 무식한 대응은 하지 않기로 했는지 방패를 비스듬히 들어 안면을 보호했다.

까아아앙!

불투명한 방패에 제트카이저의 주먹이 튕겨 나가자 발밑의 구동축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사람으로 치면 척추가 뒤틀리는 반동.

크로톤이 휘두르는 대검이 좌측에서부터 대각선 위로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제트카이저의 목을 노리는 것이다.

나는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으음?”

크로톤의 대검은 제트카이저의 가슴에 부착된 사자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녀석의 얼굴에는 당황이 어렸다.

백병전 상황에서 스스로 땅에 등을 대는 것은 전투의 기본을 무시하는 짓이니까.

물론 내가 기본을 무시할 때는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때뿐이다.

“숄더 부스터 온!”

제트카이저가 대자로 쓰러지기 직전에 견갑의 후방에 달린 부스터가 불을 뿜었다. 그러자 스프링처럼 다시 일어선 로봇은 그 반탄력을 이용해 높이 비상했다.

“먹어랏!”

크로톤의 방패를 붙잡은 뒤 살짝 밀어내고 무릎을 차올렸다. 완벽히 허를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허리를 유연하게 뒤틀며 제트카이저의 니킥을 피해냈다.

터업!

빗나간 공격의 관성을 유지하며 날아가려는 제트카이저의 발목을 크로톤이 붙잡았다. 순식간에 대검과 방패를 역소환시키고 맨손으로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익스트림 부스트 온! 최대출력으로!”

뒤꿈치에 달린 분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크로톤의 허벅지를 태우고 있었다. 단단한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는데도 통각을 차단시키기라도 했는지 크로톤은 여유만만했다.

“그 정도로는 내 악력을 벗어날 수 없다. 멀미에 내성이 좀 있기를 빈다, 슈바인 스트링거.”

크로톤의 양팔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더니 제트카이저의 다리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으으으윽!”

온몸의 피가 아래쪽으로 쏠리는 느낌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콕피트의 액정에는 하늘이 팽그르르 돌고 있었다.

프로레슬링 기술인 자이언트 스윙으로 집어 던져진 제트카이저는 계곡의 벽면을 뚫고 동체의 절반 이상이 처박혔다.

[레버를 놓지 마십시오. 파일럿에게 신속한 회피를 권합니다. 상대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레나스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으나 크로톤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던 모양이다. 돌무더기를 뚫고 녀석의 대검이 후욱 찔러 들어왔다.

까드드득!

제트카이저의 사자상이 검날을 깨물지 않았다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치명타를 요리조리 피하는구나.”

크로톤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액정 패널의 시야가 깨끗해졌다. 강제로 벽면에서 끌려 나온 것이다.

비틀대는 제트카이저에게 맹공이 퍼부어졌다.

“으라으라으라!”

날아드는 수십 개의 운석을 받아치는 기분이었다.

화룡도의 압력을 견딘 푸르가토늄이 아니었다면 두세 번 만에 팔이 날아갔겠지만 제트카이저의 완갑은 다행히 너끈하게 버텨주었다.

문제는 파일럿인 나의 체력이었다.

크로톤은 대검을 마치 몽둥이처럼 휘두르고 있었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기까지 했다.

내가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트카이저가 입는 타격은 고스란히 파일럿의 육체에 데미지를 쌓아나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크로톤의 복부에 어퍼컷을 먹여 녀석을 경직시킨 뒤 거리를 벌릴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었다.

폭주하는 황소에 달라붙은 투우사의 심정을 체험하고 있을 토니아의 요정술 덕분이었다.

“우우욱. 슈바인 스트링거, 네 머리에 토해도 뭐라 비난하지는 않겠지?”

“여왕으로서 체통을 지켜. 어차피 수백 년 동안 먹은 것도 없을 텐데.”

“내장이라도 쏟아낼 수 있을 기분이야. 으윽.”

“그나저나 방금 뭘 한 거야? 순간적으로 멀미가 사라지고 집중력이 올라간 기분이었는데.”

토니아는 내 세포의 자연치유력을 올려준 원리처럼 방향 감각을 관장하는 두방위세포(頭方位細胞)의 활동력을 끌어올린 것이라 설명했다.

“이 효과가 그렇게 오래 가진 못할 거야. 본래의 기능을 증폭시키는 것은 결국 후폭풍을 가져올 수 있거든. 그 전에 네가 뭔가 묘수를 짜내야 해.”

크로톤은 굶주린 야수처럼 흉폭하게 덤벼들었다.

싸움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전황은 급속도로 내게 불리해졌다. 녀석은 제트카이저의 움직임과 패턴에 익숙해지는 반면 내 집중력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나스, 뭔가 방법이 없겠어?”

[관객님께서는 현재 이 거신병의 성능을 최대치로 발휘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25퍼센트를 가까스로 달성하는 수준입니다.]

“고작 4분의 1이라고?”

자존심이 팍하고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알파 테스터로서 온갖 게임을 클리어해온 내가 어째서 이 정도 출력 밖에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비록 현실엔 존재하지 않았던 변신 로봇의 컨트롤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어진 레나스의 셜명은 내 머릿속에 전구를 켜게 만들어 주었다.

[말씀드렸듯 이 거신병을 창조한 연금술의 기본은 관객님의 기억에 존재하는 철왕전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잊으셨나요? 제트카이저의 파일럿은 원래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랬다.

제트카이저의 콕피트는 어째서 마름모꼴인가. 그것은 세 명의 파일럿을 더 탑승시킬 수 있는 ‘최종형태’를 위한 예비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트카이저의 파일럿이라면 나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녀석이 있잖아?’

마음속에 세워둔 계획의 순서를 재배치했다.

원래는 크로톤을 쓰러트리고 친구들을 구출해낼 생각이었는데, 그 순서를 조금 앞당겨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너무 위험한 계획이야.”

토니아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크로톤의 뒤차기에 걷어차인 제트카이저가 설원에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너라면 내 친구들의 주박을 풀어줄 수 있잖아. 크로톤이 밖에 나와 있으니 성은 완전히 비어 있을 거야. 빠르게 침투해서 친구들과 접촉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파천황의 진화된 권능으로 친구들을 내 곁으로 불어들일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일 뿐, 충분히 먹혀 들어갈 수 있는 계획이다.

“전에도 설명했지? 내 요정술은 본래 인간이 갖고 있는 의지를 증폭시켜주는 힘이고…… 그게 전부야. 만약 네 친구 중 한 명이라도 이미 크로톤의 설득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내가 그의 주박을 풀어준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어. 네 결단이 늦지 않았길 바라.”

“절대 늦지 않았어. 나는 그 녀석들의 뚝심을 믿거든.”

“그리고 내가 없으면 너는 지금까지의 집중력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후유증을 안고 싸워야 해.”

“승부를 내기보다 방어에 집중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여왕이시여! 이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켜보던 페어리들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외쳤으나 토니아는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어리석은 소릴. 이자가 층에 올라왔을 때부터 나는 이자에게 명운을 걸었음이니.”

토니아가 내 머리카락을 놓고 자유롭게 날아올랐다. 나는 조종간을 놓고 팔걸이에 부착된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콕피트 비상 개방!”

그러자 제트카이저의 사자상이 입을 조금 벌렸고 토니아가 격납고를 빠져나가는 전투기처럼 비상했다.

몸이 현격히 무거워졌다.

하지만 크로톤이 이상함을 눈치채게 해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토니아가 무사히 내 친구들을 만나게 될 때까지는.

“그렇게 비실비실해서 날 쓰러트릴 수 있겠냐, 크로톤?”

“아직 기가 죽지 않았구나. 하지만 이제 네놈이 보여줄 건 바닥난 것 같은데?”

제트카이저의 양팔이 엑스자로 교차되면서 크로톤의 대검을 막아 세웠다.

나는 어깨가 통째로 뽑히는 듯한 통증을 견뎌내며 씨익 웃었다.

“한 번 보자고. 나의 합체와 너의 합체 중 무엇이 더 위대한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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