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71화 (171/300)

#171. 나의 합체와 너의 합체 (4)

“해냈어! 334번!”

“433번이라니까. 그래도 잘했어, 캉이.”

“한 번 더 해볼래.”

이제 막 목욕을 마친 캉이의 꼬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환수의 핏줄인 이 아이에게 감기 같은 질병은 거리가 먼 이야기.

“질리지도 않는구나. 괜찮아,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캉이와 비슷한 체구에 악어의 꼬리를 가진 소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욕탕 바닥에 우르르 쏟아져 있던 푸른색 도미노 블록들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떠올랐다.

곧 그것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도미노 라인을 형성했다. 캉이는 그 줄을 따라 걸어가며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 눈을 빛냈다.

“여기다!”

캉이가 한 지점을 골라 손가락으로 블록을 건드리니 그 주변에 있던 블록들이 초신성 폭발에 밀려나는 소행성처럼 아찔하게 춤을 췄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3차원의 도미노는 캉이를 매료시켰다.

아직 성체가 되지 않은 이 구미호 소년은 여전히 어린 포유류 특유의 놀이본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저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고 따라다니는 유희 본능 말이다.

“우리와 함께 한다면 천년만년 새로운 놀이를 할 수 있어. 탐나지 않니?”

“응!”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캉이는 불현듯 자신이 뭔가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하지만 슈바인 형아가 기다리라고 했어. 꼭 돌아온다고도 했고.”

“암,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 결국에는 네가 대장처럼 따르는 그 형도 우리와 합일하게 될 테니까. 순서의 차이만 있는 거야.”

“형아랑 싸우지 않을 거라고?”

“물론 그 형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냐. 오해를 바로잡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너랑 그 형아도 아래층에서 한 판 신명 나게 싸웠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내가 변신할 때마다 폭주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그랬던 거야. 슈바인 형아가 그걸 고쳐준 뒤로 이제 난 폭주하지 않아.”

캉이가 발끈하려 하자 433번은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구미호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내가 말실수를 했네, 미안. 어쨌든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너희도 그렇게 한바탕 다투고 나서 더 친해졌잖니? 우리와 그 형도 그렇게 될 거라는 거야.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는 거지.”

캉이가 크로톤의 분신이 말하는 ‘합일’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영혼이 하나가 되고 체험과 기억이 궁극적으로 얽혀 들어간다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머리가 아파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433번은 훨씬 단순하게 접근했다.

“우리와 함께 있자. 그러면 영원히 작별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형아가 기다리라고 했는걸.”

“자, 차근차근 내 말을 들어보라고. 너희들의 대장인 그 형은 지금 다른 층에 내려가 있잖아. 하지만 이 푸르가토리움은 감옥이야. 죄수들이 마음대로 막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라고.”

“형아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나는 믿어.”

“누가 뭐래니? 나도 믿는다니깐. 하지만 이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걱정이 되고 발을 동동 구르게 되잖냐.”

캉이의 눈매가 어두워졌다.

3층 대수림에서 보내야 했던 기나긴 고립의 시간.

무의식중에 분신들을 만들어서 어른들을 기다리고, 그들이 목숨을 잃으면 또 다시 외로움의 형벌이 캉이를 덮쳤다.

두 번 다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누구와도 작별하지 않도록 할 거야.’

슈바인 스트링거는 캉이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같이 나아가자며, 무엇도 버리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을 어두운 수갑의 무덤 속에서 꺼내주었다.

433번의 말은 그래서 달콤했다.

“우리는 네 적이 아니야. 도와주려는 거라고. 그 형이 다시는 작별하지 않도록 만들어준다며? 우리가 하려는 것도 바로 그런 거라니까.”

*

“내 동료들을 현혹시키고 있을 거라고?”

“응. 크로톤의 진짜 무서운 점은 강함이 아니라 교활함이거든.”

토니아는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콕피트에서 균형을 잡느라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다른 페어리들은 레나스가 그들의 체형에 맞춘 좌석과 안전벨트를 만들어두었으나 토니아는 나를 회복시켜주고 있느라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은 그렇게 쉽게 꺾일 녀석들이 아니야. 제르비어스는 화룡도의 마왕이었고 아스티나는 영겁회귀에서도 광인이 되지 않은 정신력이 있어. 캉이가 좀 불안하지만…… 그래도 착한 녀석이니까 내 말을 잘 기억하고 있을 거야.”

“크로톤이 보통의 악한이라면 그렇겠지. 그는 생명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속의 약점.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 내밀한 욕망. 크로톤은 그런 것들을 파고들어 유혹하는 데 선수야. 약물이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대화와 논박만으로도 의지를 꺾는 것.”

토니아의 말이 길어질수록 미약한 불안감이 차오르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화룡도에서 너무 긴 시간을 보냈던 거라면 어떡하지? 7번 방의 동료들과 재회한 것에 울컥해서 대화를 나눴던 그 시간들이 악재로 작용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때,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레나스, 조금 더 빨리 날아갈 순 없어?”

[이미 파일럿에게 과부하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 출력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더 속도를 낼 경우 관객님의 컨디션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쳇. 알았어.”

무리해서 빨리 도착하려다가 정작 크로톤과 맞붙는 결전의 순간에 빌빌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페달을 밟는 다리에서 최대한 힘을 빼고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아직 제물이 바쳐지는 의식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내 역할은 크로톤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지금은 거기에만 집중해야 한다.

“녀석의 약점 같은 것은 없어, 토니아?”

“수백 명의 죄수들과 합체하면서 강력해진 육체는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요새야. 이 거신병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정면승부로 크로톤을 패퇴시키는 건 힘들 테니 단 한순간을 노려야 해.”

“단 한순간?”

“주먹이 되었든, 검이 되었든 크로톤의 단단한 피부를 뚫고 들어가서 그 안에 나를 들여보내 줘. 그러면 녀석의 체내 깊숙한 곳에서 보호받고 있을 ‘본체’와 접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승기는 우리 쪽으로 넘어올 거야.”

“크로톤의 입장에서 너는 작은 세균 덩어리나 다름 없을 텐데?”

“맞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일도 있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제트카이저의 부스터가 줄어들더니 지면에 착륙했기 때문이다.

콕피트의 화면에는 이제 한눈에 다 담지도 못하는 기암거성의 웅장한 위용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도착했습니다. 자율주행 모드를 종료합니다.]

이제부터는 내 컨트롤에 모든 것이 달렸다.

크로톤은 모든 거인을 탐색에 내보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도개교 앞을 지키는 일군의 거인 무리가 있었다.

숫자는 열댓 명.

그 안에는 투구를 쓴 행동대장 격 녀석도 보였다.

“뭐 하는 놈이야, 여기서 더 앞으로 나갈 순 없다.”

우렁차게 위협하는 거인의 앞까지 걸어간 나는 제트카이저의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맞부딪혔다. 푸르가토늄이 충돌하면서 굉음과 불꽃이 일어났다.

“너희 대장인 크로톤의 목을 썰어버리려 왔다. 조무래기들에겐 볼일이 없으니 비켜라.”

“이거, 그 소인의 목소리 아니야?”

“저 쇳덩어리 안에 숨어 있는 모양이군. 박살 내고 끄집어내자!”

흉흉한 기세로 거인들이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토니아의 경고를 듣지 않았더라면 여기에서 이 녀석들을 몽땅 쓰러트리고 도개교를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바로 쳐들어간다.’

나는 전력으로 레버를 앞으로 밀었다.

거인들이 아직 제트카이저의 파괴력에 대해 방심하고 있을 때 포위망을 뚫고 지나갈 심산이었다.

“어딜!”

투구의 거인이 거대한 곤봉을 휘둘렀으나 제트카이저가 그것을 붙잡아 무지막지한 악력으로 바스라뜨렸다.

박살 난 곤봉의 잔해가 투구 거인의 훤히 드러난 눈을 찔렀고, 녀석이 뒤로 비틀거리며 부하들의 덩치와 충돌했다.

“너를 내 선전포고용 돌덩이로 삼으마.”

한쪽 손으로 투구 거인의 멱살을 잡고 다른 쪽 손을 녀석의 고간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제트카이저는 상대를 링 밖으로 집어 던지려는 프로레슬러처럼 몸을 꼿꼿이 세웠다.

목표물은 기암거성의 단단한 외벽.

“이야아아아아압!”

파일럿의 외침에 기체가 공명한다는 사실에 완벽히 적응한 나는 목이 쉴 정도로 포효했다.

제트카이저는 거기에 보답했다.

꽈아아아아아앙!

거성의 3층 부근에 머리부터 처박혀 들어간 투구 거인은 양발을 버둥거리다가 곧 추욱 늘어졌다.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웠는데 나오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

끼이이이이익.

기암거성의 정문이 열리고 큼지막한 두 손이 양쪽 기둥을 짚고 나왔다.

붉은 산발을 한 초대형 거인 크로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제 발로 돌아올 줄은 몰랐군, 등반죄수.”

“내뱉은 말은 꼬박꼬박 지키는 편이거든. 약속대로 너를 쳐부숴 주러 왔다.”

“네가 버리고 간 친구들이 이제 거의 다 넘어왔거늘. 뭐, 상관없다. 파천황의 가호를 받는 녀석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잔챙이들이야 중요하지 않지.”

“누가 너 같은 변태놈과 합체해준대? 네 녀석의 머리카락 한 올도 되어줄 생각 없다. 덤벼.”

“크하하하! 일단 그 장난감의 목과 몸통을 분리시켜 준 다음에도 그렇게 떠들 수 있나 보자!”

꾸우웅!

크로톤은 아직 무기도 소환하지 않고 맨몸으로 태클을 걸어왔다.

제트카이저와 크로톤이 양팔을 마주 잡고 도개교 중간에서 충돌했다.

덩치 차이 때문에 크로톤의 황금색 동공이 콕피트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녀석의 눈가에는 여전히 오만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끄드드드득!

[경고. 거신병의 견갑부에 과중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회피기동을 추천합니다.]

“알았어. 어차피 힘을 가늠해 보려고 했던 거야.”

정면에서 맞부딪혔을 때 제트카이저가 조금씩 뒤로 밀리는 것을 확인했다. 미들급과 헤비급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 녀석과 씨름을 하러 온 게 아닌 나는 곧바로 다음 수를 발동시켰다.

“데우스 엑스 로켓 펀치!”

제트카이저의 양 손목에서 화염의 무리가 일어났다.

부스터로 발진하는 두 주먹의 운동에너지가 크로톤의 양손을 위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자연히 텅 비어버린 녀석의 턱을 향해 제트카이저의 팔꿈치를 휘둘렀다.

콰지이익!

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지는 크로톤의 무게 때문에 견고한 도개교가 요동쳤다.

제트카이저의 팔꿈치에 달린 드릴에 붉은색 혈흔이 아롱아롱 맺혀 있었다.

부르르릉!

한 번 드릴을 가동시키자 젖은 우산을 털어내는 것처럼 크로톤의 핏방울이 사방으로 요동쳤다.

거인들은 그것이 마치 염산이라도 되는 듯 멀찍이 물러섰다.

“아니, 어떻게?”

다시 일어선 크로톤은 멍하니 피범벅이 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녀석이 놓쳐버린 양 주먹을 다시 제트카이저의 손목과 결합시키는 중이었다.

“말했잖아. 두 번째로 널 찾아왔을 때는 네 몸속에 있는 피의 색깔을 확인시켜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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