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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70화 (170/300)

#170. 나의 합체와 너의 합체 (3)

‘아빠와 엄마 중에 누굴 더 사랑하냐니.’

문명의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아동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고 있는 유서 깊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아스티나는 꼬리를 세우는 살쾡이처럼 대꾸했다.

“당연히 거기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래. 바로 그게 너의 한계란다, 아스티나 류.”

47번이 아스티나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스티나라는 한 존재를 껍질부터 발라내 속살을 헤집는 듯 날카로웠다.

“보통의 꼬마들에게 이런 질문은 큰 의미가 없지. 부모가 아이를 시험하기 위한 귀여운 투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의 경우는 달라.

이 감옥 전체를 놓고 봐도 무척 특별하기 때문에.

“너는 천마와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 내공과 마나를 한 몸으로 다룰 수 있는 천혜의 육체를 갖고 태어났지. 그렇기 때문에 본녀와 방금 다투었을 때조차 정확히 절반의 비율을 의식하면서 성질이 전혀 다른 무학을 구사하고 있더구나.”

아스티나는 그에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자가 훈수 두듯이 하는 말은 정확히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초식이든 술식이든, 심지어 암기술이라 하더라도 기술의 본질은 도구다. 하나 백 개의 병장기를 다룰 줄 안다고 해서 한 개의 검만 들고 있는 자보다 백 배 강한 건 아니지. 무림에서 쌍병을 휘두르는 고수가 적은 이유기도 하다.”

마법진을 사용하는 검사.

보법을 구사하는 마법사.

그것이 아스티나의 정체성이었으나 47번은 바로 그 점이 어중간해진 약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양쪽 부모를 똑같이 아끼는 건 훌륭한 자식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무인에게는 거슬리는 제약일 뿐이야. 너는 어느 한쪽을 주력으로 확실히 정한 뒤, 다른 한쪽을 보조로 삼아야 하느니라.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복수의 대상을 쓰러트리는 건 천년이 걸려도 불가한 일.”

무공과 마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아스티나는 지금까지 그런 발상을 머릿속에 들여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47번뿐 아니라 만철도시에서 충돌했던 강력한 등반죄수들을 떠올려 봤을 때, 그녀가 벽에 부딪혔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벽을 넘어설 수 있다.

오직 그것만으로도 아스티나의 두뇌는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녀인 어머니의 것.

삶의 목표인 복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그 두 개를 분리시켜서 더 효율적인 싸움방식을 만들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씨앗이 이 순간 아스티나의 뇌리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칫.’

아스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47번의 혜안은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떠한가. 눈앞의 안개가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 들지 않더냐?”

“……감사의 인사는 하지 않겠어.”

“본녀도 그런 건 바라지 않느니라. 하나 생각해 보거라. 네 동료인 슈바인 스트링거와 함께 하면 이런 비슷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지.”

동료를 버리고 이쪽으로 오라.

개인을 버리고 공동체가 되자.

47번의 심해처럼 어두운 동공은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아스티나가 거기에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47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혹 연정의 마음 같은 걸 품고 있기라도 한 건가?”

“연정? 아니거든!”

“생각보다 과한 반응이군. 그런 걸 구분하기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지. 청춘은 부럽구만, 그래.”

“닥쳐. 슈바인은 내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야. 차원의 미아로 삶을 반복하던 나를 그곳에서 꺼내준 구원자라고.”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느냐? 당연히 자신의 목적인 탈옥을 이루기 위해 강한 동료가 필요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천마와 마녀의 스킬을 훔쳐 써야 하는데 때마침 그 둘의 무학을 체득하고 있는 네가 눈앞에 튀어나왔으니 욕심이 난 것 아니겠느냐!”

쿠우우우웅!

47번이 있던 공간이 무자비하게 응축되면서 중력파를 발산했다.

마법진의 광휘에 비친 아스티나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 번 더 지껄이면 죽여버릴 거야.”

“흥. 도발은 동급의 호적수끼리나 하는 것이다. 네가 본녀에게 육두문자를 남발한다 하더라도 허공에 노 젓기니라.”

47번은 신묘한 보법으로 이미 아스티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아스티나 류. 너의 목적은 탈옥이 아니라 복수이지 않느냐? 본녀를 보거라. 합일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이렇게 원한다면 개체로서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느니라. 우리와 함께 하면 너는 훨씬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서 복수를 이룰 수 있을 터. 아래층으로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친 녀석을 향한 그 알량한 동료애 때문에 다 망칠 셈인가.”

아스티나는 이 순간 설공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가족과 동료들을 학살했던 사내.

꿈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

그를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미래를 꿈꿀 수 없다.

“너희는 등반을 포기했다고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어. 8층에 올라 있는 내 숙적을 무슨 수로 복수하겠다는 거지?”

“그야 그자가 노리는 것이 푸르가토나투스인 너이기 때문이지. 네가 올라가지 않으면 설공은 반드시 너를 한 번 더 노릴 것이다. 그때까지 본녀는 너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고수로 만들어줄 수 있느니라.”

47번의 자기소개는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음험하지만 확실히 효과 있는 독이 아스티나의 마음에 퍼지고 있었다.

“이리도 확실한 복수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채찍은 생각보다 강력한 무기다.

그것을 휘두르는 자가 단순한 생명체를 초월한 마인이라면 그것의 위력은 보통의 파괴력을 우습게 웃돈다.

꽈아아아아앙!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오메가 위프를 피해 물러나던 218번 크로톤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만. 더 이상 성을 망가트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폭렬마왕.”

전후좌우 총 4개의 뿔이 달린 218번은 힘겨루기를 그만하자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지만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반면에 제르비어스는 어깨가 크게 들썩일 정도로 체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아직 네놈을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덤벼, 이 자식아.”

“에헤이. 마왕끼리 아랫것들처럼 투박한 드잡이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폭렬마왕에게 배정된 욕탕에는 물 대신 수십 개의 분사구에서 나오는 불길이 나오는 화로였다. 불길로 잡티를 씻어내리는 마족의 특성을 감안한 세심한 배려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제르비어스는 불쾌했다.

“내가 어떻게 나오는가 보려고 시험했군.”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지요. 하지만 궁금하지 않습니까, 폭렬마왕? 제가 당신을 어떻게 판단 내렸는지 말예요.”

“말해봐.”

“당신의 힘과 기술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1층 화룡도를 주름잡았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218번의 노란 눈동자는 뱀처럼 세로로 갈라져 있었다. 순혈 마족이라는 증거였다.

“마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광기가 보이질 않는군요. 상대의 피부를 찢고, 뼈를 갈라버리겠다는 포악성이 없어요. 대체 폭렬이라는 별명은 왜 붙인 건가요? 후후.”

“절대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흡수당하진 않겠다. 그건 마왕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날 집어삼키면 분명 배탈이 날걸.”

“우리의 위장은 충분히 튼튼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합일은 결코 한쪽이 한쪽을 잡아먹는 포식의 과정이 아닙니다. 바로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만.”

제르비어스처럼 218번 역시 화로에서 올라오는 불길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제르비어스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어쨌든 제가 본 당신은 평화주의자입니다. 상황이 당신에게 폭력을 쓰도록 몰아갈 뿐, 나를 죽이겠다고 말한 것도 결코 진심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나를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라. 불쾌하니까.”

“그러면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리의 주박을 용케 빠져나간 슈바인 스트링거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자는 용사의 운명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왕과 함께 등반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당신의 부하입니까.”

제르비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삼월초원에서 마용파를 부르짖으며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었으나 절반은 농담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의 부하인가요?”

“아니. 우리는 동등한 친구다. 누가 우위에 있거나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지.”

“흐음. 당신도 마왕군을 이끌던 자라고 들었는데 교도관이 허튼 말을 해줬을 리는 없고. 흥미롭군요. 마왕이 누군가의 밑에 들어간 것도 특이한데, 그 상대가 마족도 아닌 인간이라니.”

“밑에 들어간 게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처지냐? 크로톤에게 굴복해서 그에게 영혼을 갖다 바친 주제에, 마왕의 체면을 버린 건 내가 아닌 네놈이야.”

나름 날카롭게 쏘아주었다고 생각했으나 218번은 계속 능글거리는 표정을 유지했다.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가 된 겁니다. 당신은 자신의 손가락에 상하관계를 따지나요? 아니면 발가락에 충성맹세를 받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합일이라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어쨌든 너희들과 한몸이 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마왕의 긍지를 우습게 보지 마라.”

“긍지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긍지는 타고난 그 파괴력을 절대 쾌락을 위해 휘두르지 않겠다는 것이겠지요. 제 말이 틀립니까?”

“…….”

“들어보세요. 당신의 동료인 슈바인 스트링거는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제르비어스는 마그마 볼의 결승전을 떠올렸다.

결코 자신을 넘어설 것이라 생각지 않았던 약골에게 패배했던 그 순간을.

‘내 동료가 돼라, 제르비어스. 책임지고 이 지긋지긋한 감옥을 탈출시켜 주겠어. 이 우주 어딘가엔 마족이라고 핍박받지 않고, 마왕이라 해서 습격당하지 않으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도 있겠지. 그런 곳에 데려다 줄게.’

슈바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먼저 손을 건네었다.

용사 주제에,

마왕에게.

“당신의 소망을 이뤄준다 하였지요? 하지만 지금 이 꼴은 어떻습니까. 동료들을 제물로 내팽개친 채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지 않았나요?”

“녀석은 포기를 모르는 놈이야. 반드시 다시 돌아와서 우리를 꺼내줄 거다.”

슈바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제르비어스의 두 뿔처럼 단단해 보였다.

218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쉽지 않은 설득 상대가 자신에게 배정되었다고 속으로 투덜대었다. 하지만 갈라진 혓바닥은 여전히 유려하게 준비해둔 다음 말을 꺼내었다.

“하지만 결코 제 시간에 돌아올 순 없을 겁니다. 그자가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이 성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218번은 엉덩이에서 이어진 검은 끈을 가리켰다.

“저는 이것을 통해 다른 방의 크로톤들과 이어져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함께 공유하고 있지요. 그 아리따운 은발의 마검사는 제법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귀여운 귀와 꼬리를 가진 그 친구는 어떨까요?”

“캉이를 어떻게 했어?”

“그 친구는 무척 순진하고 해맑군요. 완전히 끝난 게임이나 다름없어요. 다른 크로톤이 알려주길…….”

218번이 사악하게 웃었다.

“그 아이를 설득하는 데엔 별다른 술책도 필요 없었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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