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69화 (169/300)

#169. 나의 합체와 너의 합체 (2)

“당신, 삼월초원 출신이야?”

“그래. 물론 감옥에 붙잡혀 온 건 까마득히 오래전이라 본녀를 기억하는 자들은 남아 있지 않겠지만.”

느슨하게 낀 팔짱.

언뜻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보이는 평온한 얼굴.

하지만 아스티나의 등에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욕탕의 습기가 주는 영향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도 없었다.

“본녀의 경지를 어느 정도 짐작하는가 보구나. 그렇다면 예상보다 이야기가 훨씬 빠르겠어.”

“당신이 삼월초원 출신의 죄수라면 별호가 있을 텐데.”

“별호 따위야 크로톤과 합일하면서 버렸느니라. 구별을 위해서라면 47번 크로톤이라고 불러주련. 내 양 손목을 보거라. 수갑이 없지 않느냐?”

47번 크로톤의 말대로였다.

그녀를 구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스티나는 47번의 등 뒤로 이어진 검은 줄기를 확인했다.

자신을 가리켜 ‘본녀’라 칭하는 여인은 오래전에 크로톤에게 흡수된 죄수였다.

아스티나는 47번이라는 숫자로 미뤄보아 그녀가 47번째로 크로톤에게 제물로 ‘잡아먹힌’ 것이라고 추측했다.

“내게 할 이야기란 게 뭐지?”

“바로 본론인가.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와의 합일을 받아들여라.”

“…….”

“물론 주박에 걸린 네가 이곳에서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스티나 류. 제물이 되는 것은 달이 차고 기울어지는 것처럼 정해진 이치.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을 경우엔 융합이 번거로워지거든. 독에 중독되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녹아 없어지겠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종합 인격체가 되어버린 크로톤의 어떤 일면은 적개심을 가진 개체가 자신의 일부로 합체되었을 때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고생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신을 만들어 ‘협상가’ 역할로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부스럼이 되지 않도록 열린 마음으로 이 빌어먹을 처지를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말이야?”

“물론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한 가지만 알아 두거라. 본녀는 오직 너를 설득하기 위해서 엄정하게 ‘선별된 크로톤’이다. 당연히 복어의 독을 제거할 자신이 있는 요리사란 뜻이지.”

그렇게 말하고 47번 크로톤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상대의 동작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스티나는 자연히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그 짧은 사이 아스티나는 머릿속으로 상대에게 열일곱 가지의 기습을 퍼붓는 상상을 해보았으나, 모두 가로막혔다.

‘만약 이자가 만철도시의 악마가 내보낸 등반죄수 중 한 명이었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었을까?’

아스티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반면, 47번 크로톤은 한쪽 손등을 아스티나에게 내보이며 까닥거렸다.

“무공을 익힌 아녀자들에게 담소 같은 건 어울리지 않지. 몸으로 설득할 터이니 본녀에게 덤벼 보거라.”

그래서 무기를 빼앗지 않았던 건가.

아스티나는 폭류천마검을 쥔 손에 집중했다. 움직임을 제약하는 어떤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안심하거라. 우리의 주박은 ‘제물이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에 맞춰져 있다. 이 성에 들어온 이상 너는 자유의지로 본녀를 공격할 수 있어. 그러니 안심하고 전력을…….”

‘다하라’는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공격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상대의 말을 계속 들어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쿠득.

아스티나가 서 있던 타일 바닥이 박살나며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묘한 보법으로 47번 크로톤의 뒤를 잡은 아스티나는 상대의 목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채앵!

그러나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달갑지 않은 감각이 손목을 시큰하게 만들 뿐이었다.

“아무래도 맨손으로 널 상대하는 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말이다. 술법으로 만들어낸 검이니 불공평하다고 하진 않겠지?”

슈바인을 몰아세웠던 거인 크로톤이 무기를 소환했던 것처럼 47번의 손에는 어느덧 가느다란 연검(軟劍)이 들려 있었다.

“어디 옛날 솜씨 좀 발휘해볼까?”

47번이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쾌검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라 은근히 자부하고 있던 아스티나였지만 상대가 휘둘러 오는 연검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빠르고 변화무쌍했다.

“치잇!”

불과 다섯 합 만에 아스티나의 오른쪽 볼과 왼쪽 허벅지에 얕은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47번의 연검은 마치 적수를 깨물려는 살모사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아스티나를 몰아세웠다. 욕탕 바닥에 찰랑이던 물줄기가 47번의 움직임에 따라 물안개를 일으킬 정도였다.

‘시간을 끌수록 좋지 않아. 무리해서라도 단시간에 승부를 짓는다.’

중력 마법 워핑으로 거리를 벌린 아스티나가 기수식을 취했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혈룡굉월참(血龍宏月斬)]

이를 악문 아스티나가 큰 공격을 감행했으나 상대는 연검을 제자리에서 부드럽게 회전시켜 혈룡굉월참을 무력화시켰다.

아스티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말도 안 돼.’

받아친 것도, 흘려보낸 것도 아니다. 참격의 묘리를 근원부터 파헤치지 않고서야 절대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신기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아스티나가 아니었다.

이미 혈룡굉월참의 초식이 마무리되자마자 연이어 그녀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절반의 이치를 호출한 것이다.

“너희의 제물이 되는 게 달이 차고 기울어지는 것처럼 정해진 이치라고?”

폭류천마검의 손잡이 끝에 부착된 수정구가 광휘를 내뿜었다.

“나는 달을 베어낸 마법사의 딸이기도 해!”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그래비티 슬래시(Gravity Slash)!]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파장이 아스티나와 47번 사이의 사각 욕조를 덮쳤다. 놀랍게도 중력 참격은 욕조를 이루는 대리석뿐 아니라 그 안에 찰랑이던 물까지 깔끔하게 잘라냈다.

콰아아아앙!

처음으로 47번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주 인상적이야.”

소환으로 불러들인 그녀의 연검 또한 검신의 절반이 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부러진 검신의 끝이 자신의 허벅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

결국 무릎을 꿇는 것은 아스티나 쪽이었다.

그야말로 완패였다.

상대는 중력 마법이 발산하는 이질적인 기파를 정면에서 상대하지 않으면서 미세하기 짝이 없는 빈틈을 파고들어 아스티나의 피부를 도려낸 것이다.

“더 덤벼보겠느냐, 아해야?”

“……아니.”

“그래, 영리한 판단이다. 너의 기민한 반응에 본녀 쪽에서도 자칫 흥이 올라 살초를 써버릴 뻔했거든.”

아스티나는 울분을 내리누르면서 물었다.

“당신 같은 절대고수가 어째서 크로톤에게 반항하지 않았지? 분명 벗어날 방법이 있었을 텐데.”

“본녀는 무의 정점에 달하기 위해 오랫동안 살겁을 행해왔다. 본녀가 걸어온 길마다 시산혈해가 따라다녔지. 하나 그렇게 강호독존으로 우뚝 선 이후에도 미약한 결핍은 늘 본녀를 따라다녔다.”

손에 들고 있던 연검을 역소환시킨 47번의 눈빛이 잠시 회한에 잠긴 듯했다.

“몇 갑자의 내공을 단전에 쌓아둔다 한들 한 인간의 일생으로 지상의 모든 무학에 통달할 수 있는가? 본녀는 언제나 그 물음 앞에서 좌절해야 했느니라. 강자들과의 혈투는 본녀의 상대적 우위만을 확인해줄 뿐 진리에 답해주진 못했지.”

그러다가 47번은 만나게 된 것이다.

푸르가토리움이라는 감옥에서 크로톤이라는 불가사의한 죄수를.

“크로톤과의 합일을 받아들인 순간 본녀는 평생의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 안에는 본녀 못지않은 무의 길을 걸어온 자들의 기억이 하나의 영혼 아래 공존하고 있다. 생사결도, 논검도, 탁상공론도 필요 없었느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본녀는 46번 환생한 것처럼 광활한 식견을 얻게 되었지. 그야말로 개안의 순간이었다.”

상대의 장광설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아스티나는 어딘가에서 들려올지 모를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제르비어스나 캉이에게도 누군가가 찾아갔을 것이다.

‘친구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자칫 세뇌 같은 걸 당할지도 몰라.’

47번의 눈가가 게슴츠레해졌다. 아스티나의 신경이 딴 곳에 팔린 것을 눈치챈 것이다.

“아해야, 너에게는 동료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당연하지. 나는 당신과 달라. 혼자서 강해지기 위해 합체 같은 변태적인 방법으로 도피하진 않을 거야. 그런 사술에 굴복하지 않아도 내 부족한 면을 친구들이 채워줄 테니까.”

“친구라.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낭만적인 표현이로고. 아해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술 한잔보다 더 훌륭한 것이 칼로 나누는 대화지. 너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 싶어한다. 그것은 아마도 복수일 테지. 지금으로선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대에게 복수를 달성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과 힘, 그리고 경험을 갈구하고 있어.”

아스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상대의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 설공에 대한 강렬한 원한이 바로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끈.

“네 동료인 슈바인 스트링거는 어떻지?”

“나와 동일한 기술을 사용할 만큼 뛰어나.”

“그렇겠지. 하지만 결국 마검사로서의 네 능력에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너의 경지를 초월하여 스승처럼 이끌어줄 수는 없지. 녀석이 얼마나 쓸모가 있든 결국 복수는 자신의 손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 아닌가, 아스티나 류. 그 녀석이 네게 강력한 전력이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죄수는 무인이 아니야. 마법사도 아니지. 너의 기술을 훔쳐 쓰는 파렴치한 도둑에 불과해.”

“내 동료를 우롱하지 마!”

아스티나가 발산하는 기파가 욕탕의 벽면에서 물줄기를 내보내고 있던 조각상들을 우르르 무너뜨렸다.

하지만 47번은 뒤로 날아간 머리를 곱게 넘기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내가 본 너는 산을 가르는 검법과 바다를 뒤엎는 마법을 정확히 동일한 수준으로 구사하더구나. 하지만 모르겠지? 바로 그 점이 너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내 발전?”

“아버지인 천마 류운학. 어머니인 마녀 일레인 쿠디슈. 그 둘의 존재감이 너무도 거대해서 네 독자적인 무의 길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는 셈이지.”

예상치 못했던 이름들의 나열에 아스티나의 입매가 파르르 흔들렸다.

“도대체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너는 5층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잖아.”

“본녀를 비롯한 우리 크로톤은 다음 층으로 등반할 생각이 없거든. 그런 층장은 교도관과 딱히 적대할 이유가 없어. 교도관은 율법을 만들고, 층장인 우리는 그 율법을 죄수들에게 강제하는 제사장이다. 무지몽매한 너희를 일깨우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교도관은 크로톤에게 이것저것 다 꼰지른 건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나만 묻겠다, 아스티나 류.”

먹잇감의 몸통을 절묘하게 휘감은 독사의 눈빛이 된 47번이 이렇게 물었다.

“너는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더 사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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