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68화 (168/300)

#168. 나의 합체와 너의 합체 (1)

‘행성을 부수는 강철드릴!’

‘나의 주먹은 천만마력으로 불타오른다!’

그것이 철왕전기 제트카이저의 오프닝에 흘러나오는 후렴구의 펀치라인이었다.

혈관에 직접 비트를 때려 박는 듯한 기타리프와 함께 이 후렴구가 나오면 내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언제나 주먹을 불끈 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앞에서 태권도 도장이나 합기도장에서 배운 정권지르기를 뽐내는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내지르는 바람에 설거지하던 어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 스틱을 앞으로 밀었다.

“꾸헤엑!”

인간의 맨주먹 싸움은 유혈이 낭자하기 때문에 야만과 폭력의 상징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맨손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때린다는 건 공격자에게도 생각보다 리스크가 큰 기술이다.

뇌를 보호하기 위한 두개골은 무척 단단한 반면 인간의 손가락은 정교하고 섬세해서 골절되기 십상.

때문에 글러브가 발명되기 전 맨손 격투에선 손바닥으로 상대를 때리는 기술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고 한다.

신체의 파괴력을 주먹이 감당할 수 없기에.

‘하지만 지금 나는 로봇에 탑승해 있다.’

절대 금이 가지 않는 푸르가토늄으로 만들어진 강철주먹이 거인의 코를 짓뭉갰다.

티딕!

농구공보다 더 큰 괴물체가 콕피트의 전면 패널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아마 거인의 박살 난 입에서 튀어나온 치아였을 것이다.

“이 자식, 까불고 있어!”

일곱 명의 거인들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외눈박이 거인이 제트카이저의 옆구리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녀석이 반사적으로 내지른 훅을 피해 로봇의 허리를 감싸 쥐고 용을 썼다. 제트카이저의 펀치가 가진 살상력을 얕보지 않고 그라운드 싸움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다.

거인치고는 제법 머리를 썼다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제트카이저의 팔꿈치에 뭐가 달려 있는지 잘 봤어야지.”

나는 넘어지지 않게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을 준 채로 외쳤다.

“레나스! 팔꿈치의 드릴을 작동시켜줘.”

[이 거신병은 정확한 명령에만 반응합니다.]

“엥?”

[단순작동을 넘어선 특수기 사용을 원하신다면 사전에 입력된 시동어를 외쳐주십시오.]

쉽게 말해 용자물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기술명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라는 소리였다.

‘너무 민망하잖아!’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흉흉하게 배후를 노리는 거인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기술명을 외쳤다.

“라이징 썬더 엘보우(Rising Thunder Elbow)!”

전류가 흐르는 효과 따위 없으면서도 어째서 기술명에 ‘썬더’가 들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용자물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제트카이저의 오른 팔꿈치에 부착된 드릴이 맹렬히 회전하면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푸화아악!

척추를 끊어버릴 듯한 ‘라이징 썬더 엘보우’를 얻어맞은 외눈박이 거인이 무력하게 쓰러졌다.

“자, 다음은 누구냐아!”

내 외침에 거인들이 움찔하는 걸 보니 파일럿의 음성을 외부에 출력시켜주는 스피커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던 거인들은 곧이어 한꺼번에 덤벼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전후좌우 네 방향에서 동시에 육박해 들어왔다.

“어딜!”

정면에서 우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녀석의 목적은 시선 끌기였다. 어째서 그걸 알 수 있었느냐면 양팔을 얼굴 앞에 교차해 단단히 가드를 세운 채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게 방패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뻐어어어억!

호쾌하게 뻗어져 나가는 제트카이저의 스트레이트. 그 공격에 녀석의 팔은 금이라도 갔는지 덜렁거렸다.

“끄아아악!”

그 틈에 준비하고 있던 회심의 어퍼컷이 비명을 지르고 있던 거인의 턱에 작렬했다. 그 충격량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거인의 두 발이 지면으로부터 살짝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 틈에 좌우와 등 뒤에서 접근한 거인들이 마음껏 제트카이저의 거리 안으로 달라붙었다.

“찍어 눌러버리자!”

“우아아아아아!”

콕피트 내부의 기압이 갑자기 올라간 것처럼 숨쉬기가 곤란해지고 답답해졌다. 세 명의 거인이 동시에 제트카이저의 동체에 매달려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거신병의 구동 시스템에 과부하가 전달되기 시작했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엔진의 출력 저하가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수를 써야지.

나는 지금 제트카이저의 파일럿 훈이다. 자, 생각해내라. 훈이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탈출하려 했을까.

그러자 제트카이저가 지구방위대의 호출을 받아 떨어지는 운석을 막아냈던 장면이 떠올랐다. 정확히 몇 화의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행히 그 순간의 기술명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나는 풀려 있던 페달에 다시 발을 올리며 소리쳤다.

“익스트림 부스트 온(Extreme Boost On)!”

제트카이저의 허벅지 뒷면의 패널이 개방되면서 전력질주 모드로 기체가 돌변하는 것이 전신을 통해 전달돼왔다.

쾌속으로 달리다가 급정지!

치이이이익!

양쪽에 매달린 거인들이 급발진의 관성을 이기지 못해 나가떨어졌다. 부스트를 멈추고 등 뒤에 달라붙은 거인의 안면부에 손바닥을 뻗었다.

“크아아악!”

제트카이저의 손가락이 거인의 입속으로 들어갔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이 콕피트 내부를 가득 채웠다.

“으랏차아!”

매서운 엎어치기로 응징해 준 뒤 포효했다.

그 뒤로도 일곱 거인들과 제트카이저의 난전이 이어졌다.

처음 거인들을 마주했을 때 가진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도 우위를 점할 수 없었던 굴욕을 떠올렸다. 그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라면 여기서 완전히 박살을 내놓아야 한다.

“다시는 덩치를 믿고 까불지 못하도록 다져주마!”

호기로운 내 외침과 달리 거인들과 제트카이저의 싸움은 의외로 팽팽했다.

왜냐하면 각자가 뚜렷한 장점과 약점을 동시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거인들에겐 숫자의 우위가 있었다.

7 대 1.

한 녀석에게 유효타를 날려서 기세를 꺾어놓는 것까지는 쉬웠지만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다른 거인들이 육탄공세를 날려서 정신을 차릴 시간을 벌어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거인 녀석들은 집단전에 숙련된 편이 아니라는 게 곧 드러났다.

‘하긴. 그럴 수밖에.’

본래 몸담고 있던 각자의 세계에서 가장 덩치가 큰 녀석들이 이 빙설협곡의 죄수들이었다.

자신보다 크기가 작은 종족들이 떼를 지어 공격해오는 걸 독보적인 괴력으로 짓눌렀을 녀석들. 이 푸르가토리움 안에서도 크로톤이라는 절대강자가 출몰한 이후로 이들은 집단전을 겪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왜 내 앞을 가로막냐!”

“네가 알아서 비켰어야지, 크헉!”

그 예로 내게 공격을 퍼부으려다가 저들끼리 부딪혀서 튕겨나가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반면 내 쪽은 상황이 달랐다. 감옥에 들어온 이래 일대일의 정직한 싸움보다 다수에게 포위되어 린치 상황에 놓인 경험이 더 많을 정도로 난전에 익숙했다.

그럼에도 승부를 단시간에 끝낼 수 없었던 이유는 용자물에 등장하는 로봇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제트카이저의 기체는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의 육체와 비교해 관절의 가동범위가 유연하지 못한 데다, 천근추의 묘리로 상반신을 바닥에 닿을 듯 숙인다거나 하는 무술 동작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었다.

거인들은 금속 합체로봇과 싸우는 것에 도통 적응하지 못한 데 반해, 나는 제트카이저의 파일럿 역에 조금씩 익숙해져 나갔다.

“끄으으으으.”

결국 여섯 번째 거인이 얻어맞은 복부를 움켜쥔 채 눈밭에 쓰러지는 것을 기점으로 승기는 완전히 내 쪽으로 넘어왔다.

“제, 젠장!”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있던 거인 씨룸이 더 이상 덤벼들기를 포기하고 내게 등을 보인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냐, 인마!”

“크로톤 님이 우리의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너, 거기서 딱 기다려라.”

제트카이저의 파일럿 훈이는 패배하고 달아나는 악당 간부들의 뒤를 결코 쫓지 않았다. 그래야 같은 로봇 기체가 또 등장할 수 있기도 하거니와 용자물의 주인공이 도망치는 악당의 뒤통수를 공격하는 건 폼이 나지 않으므로.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

미안하지만 상대 쪽에서 만반의 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스틱의 첨단에 돌출돼 있는 버튼에 엄지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거부감이 거의 사라진 기술명을 우렁차게 외쳤다.

“데우스 엑스 로켓 펀치(Deus Ex Rocket Punch)!”

쿠아아아아아!

팔목에서 분리된 제트카이저의 주먹이 음속돌파의 소닉붐을 일으키며 언덕에 덮인 눈을 찢어발겼다.

로켓 펀치에 정확히 뒤통수를 직격당한 씨룸은 허공에서 두 바퀴 회전한 다음 언덕을 데구르르 굴러 내려갔다.

이미 흰자위를 훤히 드러낸 채 기절한 거인 위에서 주먹은 한 바퀴를 돈 다음 검지를 들어 좌우로 까닥거렸다.

레나스의 음성이 콕피트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관객님, 방금 그것은 순전히 파일럿의 의사에 반응한 동작으로 보입니다만. 의식을 잃은 상대에게 수어를 건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나요?]

“뭘 모르네. 원래 이족보행 로봇의 파일럿들은 무의미와 비효율의 극치인 것을.”

흠흠. 그래도 너무 과몰입한 것 같기는 하다.

내 역할은 거인들을 후들겨 패면서 힘자랑을 하는 게 아니다.

저 멀리 까마득하게 이어지는 협곡의 입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로톤의 기암거성이 저 안에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쓰러진 거인들 사이로 제트카이저의 거대한 동체가 또 한 발을 내딛었다.

“다들 조금만 버텨줘. 내가 지금 갈 테니.”

*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탕에서 한 여인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어깨 위로 젖은 은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에 그러모은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아스티나 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뭔가 엄청 좋은 걸 섞어 넣은 모양이네.”

그저 몸을 담갔을 뿐인데 전신에 쌓인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준 데다 향긋한 내음까지 풍긴다. 4층 만철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시설이었던 호텔 샹그릴라의 욕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본능은 이 탕에서 평생을 사는 게 어떠냐며 나른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아스티나는 단호하게 그 마음을 뿌리치고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서른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듯한 욕탕에 던져진 것은 오직 그녀 한 명뿐이었다.

제르비어스와 캉이 또한 그녀와 비슷한 공간에서 목욕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내가 부를 때까지 몸을 씻고 있어라.’

크로톤의 번뜩이는 눈빛은 마치 무생물을 대하는 듯 무미건조했다.

일견 호화로운 대접 같지만 본질은 끓는 냄비에 올리기 전에 칠면조의 깃털을 뽑아두는 행위나 다름없다.

“내 검들도 그냥 내버려 뒀어.”

청룡패웅검과 천마폭류검.

아스티나의 두 애병은 가지런히 정리된 옷가지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물로 잡아들인 인질에게 아무런 구속도 하지 않은 채 무기까지 빼앗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거성의 주인인 크로톤의 철통같은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말했어. 뛰어난 강자일수록 자신을 향한 의심을 멈춰선 안 된다고.’

붙잡아온 제물이 절대로 자력으론 탈출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는 그 오만함.

아스티나는 거기에서 빈틈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서 마냥 구출되기만을 기다릴 순 없지.”

그것은 마검사 아스티나의 성미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 그녀의 민감한 기감이 욕탕 문 너머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존재를 파악했다.

반사적으로 폭류천마검을 뽑아 들어 문 쪽을 겨누었다.

‘엄청난 고수다.’

상대는 그 힘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마음껏 뿜어대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거인의 발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5층에 떨어진 이래 처음 보는 중년의 여인이 뒷짐을 진 채 싱긋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세 개의 달이 내뿜는 정기를 소유한 자를 만나게 되어 반가워, 아스티나 류. 제물이 될 준비는 되었나?”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암, 그렇겠지. 이 성에 잡혀 온 자들은 모두 그대처럼 이야기하니까. 그래서 여기에 본녀가 온 것이다.”

여인이 정중하게 합장한 뒤 이렇게 말했다.

“삼월초원의 선배로서 이 정도 친절은 베풀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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