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천만 마력 (3)
“믿을 수가 없어. 물질을 소환하는 것도 아니고 복제할 수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나 빠른 속도로? 그건 필멸자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야.”
토니아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입이 내 오른쪽 귀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혼잣말치고는 지나치게 잘 들렸다는 점일까.
“네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야. 저건 3층 교도관의 무지막지한 덩치를 유지시켜 주고 있던 비늘의 힘이거든. 자연법칙을 깔끔하게 무시하는 신력의 정수인 셈이지.”
“저걸로 뭘 하려는 거지, 슈바인 스트링거?”
“말했잖아. 우릴 위해 싸워줄 거인을 소환할 거라고.”
동굴을 빠져나온 직후 본래의 이족보행 형태로 돌아온 레나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푸르가토늄 광석을 우아하게 낚아챘다.
잠시 눈을 감고 푸르가토늄의 성분을 분석하던 레나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굉장히 우수한 물질을 구해오셨군요, 관객님. 물질계 최고 수준의 경도와 분자 응집력입니다. 본래 저의 주인이셨던 그룬덴 사니릭투스 님께서도 온갖 물질들을 연구하셨지만 이 정도로 단단하면서도 완벽한 열저항력을 동시에 갖춘 금속은 만들어내지 못하셨지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본래대로라면 저 검은 광석은 죄수들의 수갑과 족쇄를 만들어내는 소재라고 하니까. 전 차원에서 붙잡아온 죄수들조차 벗거나 파괴할 수 없었던 수갑. 그리고 화룡도의 마그마에도 녹지 않았던 철구 역시 이 푸르가토늄으로 만들어졌다.
콰르르르르르르.
증식하는 푸르가토늄 덩어리들은 어느덧 이집트의 대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쌓여 나갔다.
당연히 이 정도로 큰 규모의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눈보라가 치는 설원이라 하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다.
“저게 뭐야?”
“새카만 게 꼭 거인족 똥 같은데. 원래 저기에 저런 게 있었나?”
저들끼리 다투던 거인들이 이쪽의 이변을 알아채고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똥이 아니야. 저 정도로 큰 배설물이면 냄새가 나야지! 하지만 아무 냄새도 안 나잖아.”
“가까이 가보자. 크로톤 님이 잡아 오라던 소인이 저기 숨어 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저거 아까보다 커진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아니, 니굴라스.
기분 탓이 아니다. 저게 늘어나는 속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나는 레나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이 작전에 있어서 대연금술사의 무기로 빚어진 레나스의 존재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화룡도에서 하드웨어를 구해왔으니 거기에 탑재될 소프트웨어가 필요하고, 그 역할은 이 오토마타의 머릿속에 심어진 예술적 부품들이 해줄 것이다.
“레나스. 층간 구역에서 캉이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가상의 로봇으로 변신했던 것 기억해?”
“철왕전기 제트카이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확히 기억하네. 그래, 내가 구해온 푸르가토늄을 소재로 삼아서 그 로봇을 ‘연성’할 수 있겠어?”
“물질변환 연금술을 펼친다면 가능합니다. 다만 저 자신이 핵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경전달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일정 크기 이상은 무리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 크기인데?”
“저 거인들의 평균 부피의 1.45배로 예상됩니다.”
“완벽해. 해보자.”
곧 레나스가 푸르가토늄 덩어리로 뛰어들며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계속 증식하는 광물의 무게에 압착되는 끔찍한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신화종의 비늘’의 증식을 멈추도록 했다.
[아이템의 사용이 중단되었습니다. 증식한 B급 아이템 푸르가토늄 덩어리들은 총 52톤이며 24시간이 지나면 소멸됩니다.]
24시간.
정확히 하루.
그 안에 거인들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기암거성에 쳐들어가 친구들을 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긴 시간 빙설협곡에 군림해온 최강자인 크로톤을 죽이고 층장의 열쇠를 건네받아야 한다.
[연금무장술 연성기능 해금]
[형태변환 E: 입자 연성 특화형]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있던 검은 광석 덩어리들은 곧 육중하고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로 응집되었다. 완벽한 지름과 매끈한 표면. 외부엔 아무런 배출구가 없었으나 기하학적인 무늬의 실금에서 은은한 광채가 약동하고 있었다.
레나스가 만들어낸 저 원통형 물체는 내게 있어 무척이나 익숙한 형태였다.
‘쟤는 정말 필요 이상으로 철저하다니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울컥하고 밀려들었다.
*
훈이라는 소년은 장난기가 많고 용감한 소년이었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으나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열두 살 소년.
어느 날 훈이가 반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떠난 버스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바닥에 충돌한다면 살아남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을 터. 서로를 껴안으며 울부짖은 친구들 사이에서 오직 훈이만이 창밖의 묘한 광경에 넋을 빼앗겼다.
하늘에서 날아온 원통형 물체가 절벽 옆에 처박히며 버스의 추락 궤도를 막아선 것이다.
곧이어 들려온 것은 정체불명의 텔레파시.
‘소년이여. 친구들을 구하고 싶은가 보군.’
‘누구죠? 어떻게 말을 거는 거예요?’
‘나는 은하계의 보안관 제트카이저. 내 주인이 될 이 행성의 원주민을 찾고 있었다.’
그 조건은 다름 아닌 불굴의 용기.
그리고 다정한 마음.
‘시간이 없다. 내 주인이 되겠는가.’
‘그래요!’
훈이는 빼액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원통형 물체에서 거대 로봇의 오른팔이 튀어나오더니 추락하던 버스를 막아 세웠다.
‘이제부터 소년은 나의 주인. 천만 마력의 괴력을 가진 이 제트카이저의 파일럿이다.’
그게 어릴 적 나를 변신로봇의 세계에 완전히 매료시켰던 용자물 <철왕전기 제트카이저>의 1화 엔딩이었다.
*
푸르가토리움의 5층 빙설협곡.
신화 속에서 꿈틀대던 거인들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지금 막,
바로 그 천만마력의 주먹이 원통형 물체에서 튀어나왔다.
“뭔가가 안에 있…… 끄어어억!”
용감하게 가까이 다가와 있던 거인이 튀어나온 주먹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하여간 거인들의 수치다, 씨룸. 뭐 그리 겁이 많냐. 그냥 쇳덩어리일 뿐인데.”
하지만 다른 거인들은 녀석을 놀리기만 할 뿐 별다른 경계심 없이 우리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거인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가랏, 제트카이저! 녀석들을 혼쭐내 줘.”
그때, 한 팔만 바깥으로 나온 거대 로봇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관객님, 뭐 하십니까. 탑승하셔야지요.]
이게 무슨 소린가.
탑승을 하라니.
“레나스? 너 스스로 움직일 수 있잖아. 너는 연금무장술을 익힌 전투 오토마타인데.”
“저는 캉이 관객님이 제게 보여준 자료를 그대로 구현한 것뿐입니다. 이 이족보행 형태의 거신병은 기체 내에 콕피트가 존재하며 그 안에 탑승한 파일럿의 조종에 의해 전투를 수행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농담이지? 내가…… 로봇을 조종해야 한다고?”
“거인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결정하십시오.”
“젠장! 알았어, 파일럿이 되겠다.”
이번에 원통에서 튀어나온 것은 황금색 금속갈기를 가진 거대한 사자의 입이었다.
제트카이저의 가슴에 달린 부위로서 가공할 초전자포를 발사하기도 하고, 무기를 소환하기도 하는 변신 로봇의 상징물이었다.
그 황금사자의 입이 쩌억 벌어지더니 나에게 빔을 내쏘았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인 훈이가 그러했듯, 나 역시도 그 빔이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널찍한 콕피트의 중앙 좌석에 앉아 있었다.
마치 모터바이크에 앉아 있는 듯한 자세를 강제하는 등받이, 정면에는 패널에서 올라와 있는 두 개의 스틱. 발에는 정밀한 강도에 반응하는 페달이 감싸고 있었다.
“진짜…… 제트카이저의 파일럿이 된 거야?”
정면을 가득 메운 것은 반구형으로 펼쳐진 입체 스크린이었다. 총 8개의 스크린 중 중앙의 6개는 정면을 비추고 있었고, 양옆의 2개는 아무래도 후방을 비추고 있는 듯했다.
아니, 맞을 것이다.
내가 있는 장소가 정말로 로봇 제트카이저의 콕피트라면 그런 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관객님, 적대반응이 다가옵니다. 회피하십시오.]
“뭐? 회피가 뭔데?”
레나스의 대답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직전에 정면 스크린의 절반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력을 다해 휘둘러지는 거인의 주먹이었다.
꾸우우우우우웅!
격하게 흔들리는 콕피트 안에서 나는 일종의 유체이탈과 비슷한 초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헬멧의 마법인지 몰라도 제트카이저의 거체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제6의 감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감각에 의하면,
제트카이저는 방금 거인의 주먹에 턱이 돌아가 강제로 원통에서 빠져나와 쓰러져 있었다.
“악, 내 주먹. 이거 꽤나 단단한데?”
“들고 갈 수 있겠어? 크로톤 님께서 좋아할 것 같은데.”
“쪼개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우리가 가진 곤봉 같은 걸론 무리야.”
“크로톤 님을 데려오라고? 만약 우리 말을 안 믿어주시고 벌컥 화를 내면 끝장이야. 방법을 생각해.”
녀석들의 어지러운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레나스에게 간단한 조작방법을 물었다.
“본능대로 조작하면 된다고?”
“네,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거신병의 구동체계는 단순합니다. 파일럿인 관객님께서 마음 먹는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관절의 한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요.”
“그렇게 하지.”
일단 페달을 거세게 밟아서 제트카이저의 동체를 일으켰다. 눈밭에 절반쯤 파묻혀 있던 로봇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자 거인 니굴라스가 입을 쩍 벌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오른쪽 스틱을 앞으로 밀며 외쳤다.
“이거나 먹어라, 천만 마력의 주먹이다!”
제트카이저의 라이트 훅이 니굴라스의 아래턱을 박살내 버렸다.
나는 이 층에 내려온 이래 처음으로 거인의 피가 이 정도 규모로 흩뿌려질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끄아아아악!”
저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뒹구는 거인들의 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와 레나스가 온갖 스킬을 퍼부어도 조금 따끔해 하고 말았던 거인들의 압도적인 힘은 이제 옛말이 된 것이다.
“녀석이 움직였다!”
“니굴라스가 일어나질 않아. 우리도 반격한다!”
남은 여섯 거인들이 살기를 뿜어대며 다가왔다.
한 거인이 휘두른 곤봉이 제트카이저의 왼쪽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왼쪽 스틱을 내 몸 쪽으로 당겼다. 로봇의 왼팔을 머리 옆에 붙여 공격을 막아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제트카이저의 왼팔은 엉뚱하게도 바닥을 짚었고 무방비가 된 안면이 곤봉에 후려 맞게 되었다.
“크윽! 대체 왜 한 대 맞을 때마다 콕피트가 요동치는 거야?”
[파일럿에게 통각 신호를 전달해주면서 그의 용기를 시험하기 위한…….]
“아악! 그만해. 그거야 용자물 애니메이션에서 대충 쓰는 클리셰잖아.”
대체 왜 그런 것까지 재현해놓았다는 말인가.
로봇이 얻어맞을 때 파일럿도 함께 아파해야 진정한 열혈 애니메이션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는 한 제작자의 고집이 이 머나먼 우주 저편에서 나를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대전격투 액션게임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그 세계에선 여전히 통용되는 중요한 격언이 있다.
‘모르면 맞아야지.’
나는 아직 조작법을 완벽히 숙지하지 못했으니 맞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덤벼라, 모조리 쳐부숴줄 테니까.”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는 이제 여기에 없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도 여기에 없다.
다만, 뛰어난 피지컬로 모든 컨트롤러를 정복했던 알파 테스터 박상식이 있을 뿐이다.
내가 페달의 끈을 찢어버릴 듯 앞으로 밀자,
로봇은 그에 반응해 주었다.
“일어나라, 제트카이저!”
60톤의 거대한 쇳덩어리가 믿을 수 없는 도약력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무자비한 니킥으로 거인의 옆구리를 우그러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