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천만 마력 (2)
다시 빙설협곡으로 불려오자마자 거인의 발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도 사태가 이런 지경까지 올지도 모른다는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대응이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주변 지형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어. 점멸은 위험하다.’
시커먼 초거대 신발의 밑창이 내 정수리에 닿기 직전, 나는 무극파천공의 묘리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내공을 온몸에 둘러 최상급의 반탄지기로 버텨냈다.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압사당하는 꼴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으나 압도적인 무게는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육중한 해머에 얻어맞은 실못처럼 허리 아래가 땅에 푹 파이고 말았다.
“크윽!”
일시적으로 금강불괴에 가까운 내구도를 갖게 되었으나 까마득한 무게로 짓누르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 더 파묻히기 전에 거인의 발은 다시 동굴 천장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거인의 발바닥을 향해 살신참을 쏘아줄 준비를 했다. 중간에 칼자루를 멈춰 세운 것은 레나스의 속삭임이었다.
“반격하지 마십시오, 관객님!”
“……왜?”
“거인들은 그저 마구잡이로 지면을 훼손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우리의 위치를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워낙 위협적인 땅고르기라서 당연히 상대를 절멸시키기 위한 습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저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를 페어리들’을 찾기 위해서 수상한 지형들을 다 파헤치고 다닌다는 소리였다.
면회가 끝나고 순간 이동한 지점이 하필 거인이 발을 내딛는 지점이었고, 그 시점 또한 공교롭게도 습격의 순간이었다?
우연이라 보기에는 껄끄럽다고 생각하던 찰나.
[5층의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이 입맛을 다십니다.]
아마 면회가 끝난 죄수를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는 좌표를 지정하는 건 교도관의 재량인 모양이다.
“참으로 옹졸한 짓을 하는군, 교도관.”
[5층의 교도관이 한 발짝 물러나며 의뭉을 떱니다.]
망할 자식.
크로톤의 눈앞에 바로 던져넣지 않은 것에 고마워해야 하나. 하지만 그 정도의 반칙은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인지 교도관은 더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았다.
“말려줘서 고마워, 레나스.”
괜한 반격으로 제 위치를 거인들에게 알려줄 뻔했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휘이잉.
구멍 난 동굴 천장에서 격풍과 함께 눈보라의 잔재가 불어닥쳤다. 저 눈송이에 닿으면 또다시 그 무기력한 상태로 포박될 것이기에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는데,
따스한 기운이 등 뒤에서부터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함께 있는 한 크로톤의 주박은 너를 해치지 못해.”
“토니아.”
페어리 퀸 토니아가 내 오른쪽 어깨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요정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목표했던 물건은 얻은 건가, 슈바인 스트링거?”
“그래.”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출혈이 컸던 모양이네. 피부는 괴사하고 있고 자상이 너무 많아. 홀몸으로 군단과 맞붙기라도 한 거야?”
“치료해줄 수 있겠어?”
“이미 하고 있어.”
토니아와의 접촉 부위를 중심으로 따스한 기운이 전신에 퍼져나갔다. 마치 추운 겨울 노천탕에 몸을 담갔을 때의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우르르르르릉.
멀지 않은 곳에서 지반이 통째로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지진에 가까운 진동이 동굴을 덮쳤다. 수색에 나선 거인들이 마구잡이로 이 근처를 폐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1층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크로톤이 교도관에게 전해 들은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 내내 잠잠하다가 이 타이밍에 부하들을 보낸 것이 설명이 되지 않거든.”
“너희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나 보지?”
“거인들의 입장에서 페어리는 너무 작고 미천해. 그들의 감각으로는 우릴 찾아내기 어려울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다행이네. 레나스는 기계이니까 작정하고 숨으면 포착하기 까다로울 거고.”
“하지만 이제 네가 빙설협곡에 돌아왔으니 거인들이 목표물의 범위를 좁히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곳에 계속 있는 건 위험해.”
레나스의 옆구리 밑에 찰싹 달라붙은 채 벌벌 떨고 있는 페어리들이 보였다. 코끼리가 뒷걸음질 치다 밟혀 죽은 개미가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와 달리 무방비 상태로 내게 달라붙어 있는 토니아의 배짱을 생각하면 역시 여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겠군. 입구는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 같은데. 비상용 탈출구 같은 곳이 있어?”
“방향은 내가 안내할게.”
토니아가 가리키는 대로 입구와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레나스는 자신의 복부 안으로 널찍한 칸을 만들어 페어리들을 탑승시킨 후 내 뒤를 따라왔다.
요정들의 둥지는 대수림에서 분신인 아이들과 함께 피라미드 밑에 여우굴을 파고 지냈던 캉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 여우굴도 각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비좁기 그지없었으나 페어리들의 둥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길을 따라간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길을 뚫고 나가는 형국이었다.
캉이의 여우굴이 떠올라서일까. 대수림에서 아이들에게 놀이를 알려주며 지냈던 평화로운 한때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 해사한 웃음을 가진 꼬마 녀석이 크로톤의 성에 잡혀 있을 걸 생각하니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슈바인, 네 평정심에 동요가 일어나고 있어. 동료들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이 내게도 전달될 정도야.”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는 거야? 독심술 비슷한 건가?”
“아니, 그렇게 정확하진 못해. 우리는 페로몬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니까, 네 감정의 색깔을 볼 수 있는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겠지.”
“어쨌든 나아가는 데 집중하라는 조언이지? 그렇게 할게.”
잡생각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던 그때,
쿠르르릉!
또 한 번 눈앞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이번엔 거인의 손바닥이 출몰했다.
“이 근처에서 소인의 냄새가 느껴져. 다들 이리 와봐!”
숨을 죽인 채 빳빳이 상체를 세웠다. 폐건물을 박살 내는 포크레인의 버켓처럼 거인의 손이 통로 이곳저곳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토니아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거인들이 점점 더 이곳으로 몰려오는 게 느껴져.”
“이대로 계속 전진하는 건 자살행위야. 다른 탈출구는 없어?”
“저게 마지막 남은 연결통로였어. 이젠 안전한 루트가 남아있질 않아. 어쩌지?”
“흐아아아…….”
레나스의 몸통으로부터 겁에 질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토마타가 공포에 떠는 일이 있을 리 없으니 그 소리의 진원지는 아마도 레나스가 품고 있는 페어리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레나스의 옆구리 즈음을 몇 번 두들겨 준 다음 일부러 희망차게 말했다.
“거인들의 발이 닿지 않는 더 깊숙한 굴을 파고 탈출하자. 그 수밖에 없어.”
토니아가 내 말에 우려를 드러냈다.
“레나스의 힘을 이용하려는 거야?”
“물론 레나스의 연금술은 대단하지만 이 애는 굴착용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땅을 파는 과정에서 진동이 격해지면 페어리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러면?”
“내가 한다.”
나는 손날을 펴서 지면에 손톱을 박아넣은 뒤 눈을 감았다.
[친구 캉이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땅굴파기 Lv. 3]
그런데 그때 토니아의 더듬이가 파르르 떨리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파천황의 권능이 작동되는구나, 슈바인. 하지만 이 정도로는 혹한의 동토를 뚫고 나가기 어려울 거야. 내가 도와줄게.”
다음 순간 나는 페어리 퀸의 또다른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 토니아의 요정술의 영향으로 스킬의 개방성이 확장됩니다.]
[스킬 땅굴파기가 유사 스킬과의 연동 가능성을 획득합니다.]
[친구 뚠 아티르의 스킬 ‘두더지의 굴착’과 융합합니다. 동일한 층에 존재하지 않으나 1층 교도관과의 계약으로 인해 스킬 대여가 인정됩니다.]
뭐라고?
화룡도에 있는 뚠 아티르의 스킬도 빌려올 수 있단 말이야?
불현듯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7번 방의 죄수들과 ‘인과의 끈’으로 묶이게 된다고 했지. 그게 이런 뜻이었던 것이다.
내 손바닥 끝에 단단히 버티고 섰던 토질이 치즈케이크처럼 스르륵 갈라졌다.
[친구 토니아의 요정술로 스킬의 잠재력이 최대치로 발현됩니다.]
[스킬 땅굴파기가 Lv. 8로 오릅니다.]
이 정도가 되면 단순한 땅굴파기용 스킬이 아니라 대지의 여신이 휘두르는 축복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서둘러!”
토니아의 속삭임과 함께 나는 인간 굴착기가 되어 땅을 파고 들어갔다.
지금 내 왼손에는 여우의 앞발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두더지의 앞발이 빙의된 거나 마찬가지다.
마치 인어가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듯,
나는 얼어붙은 땅 속을 파헤치며 나아갔다.
*
푸하아악!
우리가 빠져나온 곳은 제법 시야가 탁 트인 언덕의 꼭대기였다.
“대단해, 슈바인 스트링거.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어. 어떻게 이족보행에 특화된 신체구조로 그런 동작들이 가능한 거지?”
“좋은 친구를 둔 덕분이랄까.”
저 멀리 설원을 무자비하게 헤집고 있는 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숫자는 총 일곱이나 되었다.
주변을 성큼성큼 돌아다니다가 자기들끼디 부딪히면 벌컥 화를 내곤 했다.
“젠장! 아무리 찾아도 없잖아, 니굴라스.”
“내 코는 정확하다. 땅 속으로 도망친 거다.”
“그런 재주가 있는 소인은 없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냐!”
“그럼 네 대가리를 땅 속에 처박아줄테니 한 번 찾아봐라!”
녀석들과의 거리가 최소 800미터는 넘을 텐데도 그 특유의 괴물 같은 목청 때문에 그 점이 무색했다. 지하철 같은 칸의 맞은편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무뢰한의 외침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거꾸로 본인은 소리를 크게 내질러도 거인들이 듣지 못할 테지만 토니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슈바인, 녀석들이 저들끼리 투닥거릴 때 몸을 빼내야 해. 오래전에 둥지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장소를 알아뒀어. 그곳으로 달아나자.”
“아니. 이제 너희 페어리들은 둥지로 숨지 않아도 돼.”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광석을 꺼내면서 말했다.
“여기서 저 일곱 놈, 모두 때려잡고 간다.”
[이름: 푸르가토늄 덩어리]
[등급: B급]
[푸르가토리움 1층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단단한 광물의 일종입니다.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의 권능이 담겨 있으며 마그마에도 녹지 않는 저항성과 경도가 특징입니다. 교도관이 제련할 경우 죄수들의 수갑과 족쇄를 만드는 소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제련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최고급 광물이지요.]
토니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 선택을 자꾸 흔들리게 만들지 마. 저 녀석들은 크로톤의 부하들 중에서도 용력이 강한 놈들만 가려 뽑은 거야. 그 작은 돌멩이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이걸 얻으려고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하지만 토니아와 페어리들은 화룡도에서 내가 동분서주하면서 깽판을 쳤다는 걸 알 리가 없으므로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또 다른 아이템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들었다.
[이름: 탐식하는 신화종의 비늘]
[등급: S급]
[사용횟수: 2/3]
[차원감옥의 한 층을 관리하는 신격 존재로부터 떨어져나온 파편입니다. 이 비늘을 사용하면 B등급 이하의 아이템을 무한히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중지를 외치기 전까지 복제가 멈추지 않으니 주의하십시오. 증식한 아이템의 유지 시간은 24시간입니다.]
푸르가토늄 덩어리에 신화종의 비늘을 접촉시키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나는 태양을 떨구려는 고대의 용사처럼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푸르가토늄 덩어리를 집어던졌다.
쿠오오오오오!
곧 천년 동안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보라가 새카맣게 ‘증식’하는 푸르가토늄의 검은빛에 의해 찢겨 나갔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푸르가토늄이 촤르르륵 떨어지고 있었다.
“큰 놈이 무조건 이기는 층을 만들었겠다?”
나는 놈들이 여지껏 보지 못했던 크기의 ‘거인’을 소환할 것이다.
그래서 저 오만한 거인들에게 진정한 ‘폭력’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줄 것이다.
“이제부터는 반격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