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뒤늦은 신고식 (4)
“왜 같은 방 친구들끼리 이렇게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건데? 응?”
뚠 아티르의 말이 표창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디멜의 빙결 마법에 시달리느라 내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얼어붙은 상처에 달라붙은 고드름은 그로테스크하게도 새빨간 색이었다.
“비켜서 있어, 뚠. 자칫하면 너도 다칠 거야.”
“못 비켜. 계속 싸울 거라면 나를 쓰러트리고 가, 슈바인.”
뚠은 굳건하게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저 멀리 둔덕에 처박힌 디멜이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된 착지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걸 보면 녀석의 마력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뚠.”
내 허리춤 정도의 키밖에 되지 않는 두더지 토인이 애타는 심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을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키는 건 내게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죄 없는 녀석을 이 사투에 휘말리게 둘 순 없다.
“너도 알고 싶지 않아? 디멜이 왜 저렇게 변해 버린 건지.”
나는 뚠의 정수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저 녀석은 층장이 되고 나서 강력한 힘을 갖게 됐어. 자신의 말이라면 절대 거역하지 못하는 똘마니들도 생겼고.”
그러하나 디멜은 결코 7번 방의 죄수들에게는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저 내버려 둔 채 지켜봤을 뿐이다.
“난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 너희는 할 수 없어. 너도 비르카도, 올쿠레 어르신도 다들 착해 빠져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잖아.”
그러니 내가 끄집어내 줘야 한다.
저 고집불통 녀석이 꽁꽁 품에 안고 있는 어떤 ‘비밀’이 무엇인지.
두들겨 패서라도 그 입을 통해 들어야겠다.
“괜찮아. 죽이진 않을 테니까. 뚠,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는 뚠의 옆을 지나치면서 바닥에 떨어진 현무패웅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거칠게 눈을 비볐다.
‘시야는 어떻지? 다행이야. 절반 이상은 돌아왔어.’
정면에서 다시 마법진을 회전시키고 있는 디멜의 형체가 보였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엎어질 것처럼 비틀대고 있다.
아마도 단 한 방.
다음 일격을 먹는 게 누가 되었든 승부는 곧 가려질 것이다.
“간다, 디멜. 이번엔 도중에 멈추는 일 따윈 없을 거야.”
땅을 박차고 도약해 정직하게 디멜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 거리가 불과 30여 미터로 좁혀졌을 때에야 녀석의 마법진은 술식을 완성했다.
[제국마도병 귀속냉마법 발동]
[제3식 ‘빙마의 울부짖음’]
마그마 볼에서 나를 절벽에 떨어트렸던 리저드맨이 있었다. 디멜은 그때 내게 녀석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전방위 마법을 발동시켰었는데,
바로 그 얼음 폭풍이 지금 나를 덮쳐오고 있었다.
쿠드드득.
국지적인 눈보라가 내 전신에 휩싸였다. 뜀박질의 리듬이 현저하게 느려지더니, 결국 디멜을 바로 코앞에 둔 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얼음 기둥이 되어 있었다.
‘꿈쩍도 않는군. 지켜볼 땐 몰랐는데 당해보니 이게 녀석에게 있어 비장의 무기였구나.’
디멜이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오른쪽 손에는 얼음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징글징글한 녀석. 등반죄수가 되더니 광전사처럼 강해졌구나. 하지만 내가 이겼어. 그만 포기해라.”
머리카락이 턱밑에 달라붙어 헐떡대던 잭 프로스트가 얼음칼날을 투창처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이제 저것을 내게 처박는 순간 그때의 리저드맨 꼴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패배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미친 속도로 두뇌를 회전시켜 이 순간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불현듯 실마리가 잡혔다.
르팔타커스가 뇌신 지드와 싸웠을 때……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더라?
그때, 심상 세계에서 르팔타커스에게 패배한 지드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가 무슨 수로 내 통제를 가뿐히 물리쳤는 줄 아나? 체내의 오러 코어(Aura Core)를 가동 범위 이상으로 돌려서 폭발시켰어. 몸속에 숨어든 벼룩을 죽이기 위해 폭탄을 터트린 거나 다름없지.’
나는 그 방법을 따라해 보기로 했다. 단전에 남은 내공을 거칠게 끌어올렸다.
지금 나는 아스티나에게 아무런 스킬도 빌려올 수 없다. 때문에 전신의 맥을 타고 일정한 흐름으로 기를 운용하는 호흡법 따위 쓸 수가 없는 상황.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내공의 폭류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아무렇게나 내달리는 내공의 역류가 내 체온을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쩌저저적.
얼음 기둥에 금이 가자 디멜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녀석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혈맥이 꿈틀거리는 손목이 얼음 잔재를 흩뿌리며 뛰쳐나왔다.
터업.
“이제 보여줄 건 다 보여준 거냐? 그렇다면 잠자코 내 철권을 받아라.”
나는 디멜의 멱살을 잡은 주먹을 내 이마를 향해 끌어당겼다. 있는 힘껏 불어넣은 힘에 녀석의 머리와 내 이마가 정면으로 격돌했다.
뻐어어억!
마치 철구에 직격당한 것처럼 디멜의 정수리가 움푹 파였고, 그대로 녀석은 벌러덩 쓰러졌다.
술자가 무력화된 것에 영향을 받는지 얼음 기둥은 스르륵 녹아내렸다.
철벅철벅.
나는 녀석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기맥을 억지로 터트린 후유증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렇게 바뀐 거야? 너 그런 놈 아니었잖아. 그 누구보다 친구를 끔찍하게 챙기는 녀석이었다고.”
“이상할 것도 없어. 권력을 갖게 되면 누구나 거기에 취하게 되지.”
“이런 지경까지 와서도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쓰려고 하는 거야? 그 말이 나한테 통할 것 같냐.”
눈을 감고 있던 디멜이 천천히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네가 쓴 탈출법은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이었어. 그렇게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화룡도의 광석을 가져가야 하는 이유가 뭐지?”
처음으로 디멜이 내게 무언가를 물었다.
나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녀석의 굳건히 닫힌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것이라고.
“등반을 하면서 나에겐 친구들이 생겼어. 위기의 순간에 나를 구해주기도 했던 소중한 녀석들이야. 그런 녀석들이 크로톤이라는 거인에게 잡혀갔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 광석이 필요하다는 거군.”
“맞아. 그러니 그만 고집부리고 허락해 줘.”
“…….”
한참을 망설이던 디멜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녹아내리고 있는 피부 덕에 그 손길이 축축하기 짝이 없었다.
“잘 들어, 슈바인 스트링거. 내가 층장으로서 그 광석을 내주는 순간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은 너에게 과한 짐을 요구할 거야.”
“기껏해야 내 형량을 올리는 정도겠지. 상관없어. 내 형량은 이미 까마득…….”
“그게 아니야, 멍청아! 교도관들이 얼마나 악독한지 너는 몰라서 그래. 네 친구들이 5층장 크로톤에게 제물로 붙들려 간 것과 교도관들이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아?”
“뭐?”
“네게 강력한 힘이 필요해졌을 때, 하필 그 손에 다른 층을 면회할 수 있는 아이템이 손에 쥐어졌고. 공교롭게도 그 층에는 새로운 층장이 마련되어 있는 이 모든 일련의 흐름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냔 말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던 건가.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둘이었다.
5층의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
그리고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
나는 지금껏 각기 다른 교도관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으르렁거리기만 한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층을 배정받기 전에 모든 교도관들이 소집되어 투닥거렸을 때부터 줄곧.
“교도관들이 내게 덫을 놓기 위해…… 힘을 합쳤다?”
“명심해. 이 광석을 탐내지 마. 너는 똑똑하잖아. 5층으로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강구…….”
그때였다.
디멜의 말문을 막듯이 등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화신체를 만들어냅니다.]
타악.
어디선가 뛰어내린 헬 판테라가 디멜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제르비어스의 반려수가 아닌, 신적 존재의 화신체로서 온 것이다.
“불타는 삵.”
“1층장 디멜 무바크. 그 말을 꺼내는 것은 저와의 약조를 어기는 것일 텐데요. 한 마디만 더 하면 정당한 권한으로 그대를 소멸시키겠습니다.”
온화한 어조와 달리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멜은 나를 향해 뭔가를 더 말하려 했고, 나는 재빨리 잭 프로스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
“닥치고 있어, 멍청아. 교도관은 허풍 같은 거 떨지 않아. 거짓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이 내뱉은 말은 지킨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불타는 삵이 디멜을 소멸시킨다는 건 결코 말뿐인 위협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교도관의 화신체를 노려보았다.
“네가 디멜을 부추켜서 이 해괴한 짓거리의 판을 짰다는 걸 알고 있어. 설명해라. 뭘 노리고 있는 건지.”
“당신들의 승부가 난 이상 더 이상 감출 필요는 없겠지요. 그 광석을 가져가게 되면 당신은 나 ‘꼬리를 담그는 삵’의 정식 후임자로 예정되게 됩니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계약에 얽매어지게 되는 거죠.”
“교도관의 후임자? 그게 뭔데.”
“읍읍읍!”
디멜은 계속 뭔가를 말하려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나는 힘을 빼주지 않았다. 따로 호흡이 필요한 녀석도 아니니 질식할 염려가 없어 다행이다.
불타는 삵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말 그대롭니다. 화룡도 소속의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가 제 다음 교도관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발동되는 조건은 두 가지 경우. 첫 번째는 형량이 끝나는 순간. 두 번째는 후임자가 등반죄수를 천명해 감옥을 오를 경우인데…….”
화신체의 꼬리가 찰싹하고 바닥을 한 번 때렸다.
“후임자가 탈옥에 실패하는 것이 확정된 순간. 그 죄수는 곧바로 1층 화룡도에 불려와 교도관이 되는 것이고, 나는 그제야 이 푸르가토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요.”
나는 4층 만철도시의 교도관인 그룬덴 사니릭투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연금술사로서 끔찍한 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온 죄수였으나 공석이었던 4층의 교도관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죽여버린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처럼 나 역시 이 차원감옥에 강제로 붙들려온 죄인이지요. 그 죄가 신격에 달해 죄수가 아닌 교도관이 되었지만.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죄수 중 한 명과 계약을 맺어 후임자로 만드는 것.”
“왜 그걸 이제야 알려주는 거지?”
“이 계약은 교도관에게 편리한 게 아닙니다. 특히나 등반죄수를 후임자로 둔다는 건 리스크가 몹시 높지요. 후임자 계약을 맺은 죄수가 등반 도중에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그 교도관은 그 죄수가 보유하고 있던 형량과 동일한 기간 동안 다른 죄수를 후임자로 지정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나의 형량은 무려 1,600년.
“도박이겠군.”
“1층을 갓 벗어났을 때 당신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2층의 천마와 마녀. 3층의 그 구미호 소년. 그들의 무력에 비한다면 일천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제 역대 등반죄수들을 통틀어서도 결코 뒤지지 않은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이해했다. 너는 내가 탈옥에는 실패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최소한 죽을 확률은 적겠다고 판단해서 베팅한 거군.”
중요한 것을 물을 차례였다.
후임자니 뭐니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한 바가 없다. 설명도 들은 적이 없고.
그걸 교도관 멋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 리 없다.
“나에게 선택권은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 것 아니겠어요? 자아, 어떻습니까, 슈바인 스트링거? 내 후임자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화룡도의 물건 하나를 내어주는 혜택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이 화룡도 전체와 인과의 끈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것도 가능하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미 당신과 함께 층을 오르는 등반죄수들이 있지 않나요? 그들뿐 아니라 이 화룡도에서 당신이 친구의 연을 맺은 4명의 죄수 말입니다.”
뚠 아티르.
디멜 무바크.
올쿠레 켄타.
비르카 리케우톤.
“네. 당신이 어느 층에 있든 계속 그들과 인과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설마 내가 탈옥에 성공하면?”
“그래요. 당신과 함께 등반하고 있는 자들과 동일한 자격을 얻어, 7번 방의 죄수들 또한 자유의 몸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