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63화 (163/300)

#163. 뒤늦은 신고식 (3)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12. ‘7번 방의 신고식’]

[용사는 화룡도의 현 방장인 죄수 디멜 무바크와 의견 충돌을 빚었습니다. 그는 용사에게 푸르가토늄 반출권을 내어줄 생각이 없지요. 디멜을 살해해서 층장을 공석으로 만들거나 설득하여 반출권을 정식으로 얻어내십시오.]

[기한: 18시간]

[보상: 민첩 +80]

[실패 시: 푸르가토늄 획득 불가]

장기전으로 가면 내가 진다.

그것이 디멜과 대치하자마자 느낀 일종의 직감이었다. 녀석이 빙결 마법의 술식을 전개할 때마다 층장실 벽면에 그려진 정체불명의 문자들이 냉기를 방 안에 공급했다.

통역마법이 발휘되는 이 감옥 안에서 내 눈에 해석되지 않는 문자라는 것은 일종의 마법진이라는 뜻.

다른 방장들을 상대로 한 조치라기엔 과하다.

‘디멜은 아주 오랫동안 나와의 이 싸움을 준비해 온 거야.’

출입문에 걸려 있는 결계는 일종의 속임수였다.

디멜은 본래 세계에서 마도병이자 이단심판관이었다. 그런 녀석의 철두철미한 성격상 결계를 한 곳에만 걸어둔다는 것을 더 수상하게 여겨야 했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장소에서 최대한의 능력치를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날 끌어들인 거다.’

이 층장실 안에서 싸우는 한 나는 무수한 탄약을 재워놓은 참호병과 전투를 벌이는 게릴라의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날 사냥감 취급하고 있구나, 디멜.”

“그래. 넌 모르겠지만 내 고향은 생명체에게 적대적인 극지방이라 태어나면서부터 사냥꾼으로 자라나지. 그리고 난 일족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사냥 성인식을 통과했다.”

“그렇다면 있는 힘껏 발버둥 쳐서 네 사냥을 망쳐주마.”

써걱!

발목을 휘감은 얼음 줄기를 잘라낸 뒤 디멜에게 뛰어들었다. 마법진을 유지하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의 복부에 현무패웅검을 찔러넣었다.

까장창!

디멜의 형상을 하고 있던 얼음 동상이 내 검격을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비산했다.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잔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너희 검사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뒤를 돌아보니 두 명의 디멜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은 본체. 한쪽은 환영이다.

게다가 둘 모두 정확하게 동일한 마법진을 띄우고 있다. 본체 역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잭 프로스트 마도병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예였다.

“그래도 한 끗 부족해.”

나는 똑같이 생긴 두 디멜 중 오른쪽 녀석을 향해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가뿐하게 목을 베어냈다.

습격받지 않은 본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알아챘지?”

“입김. 너와 달리 이 가짜는 호흡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디멜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방금 전에 녀석의 본체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일부러 가짜를 박살 냈을 뿐이다.

일종의 경고.

계속 싸우면 지는 쪽은 네가 될 것이라는.

“허세를 부리는 거야, 슈바인?”

“너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다.”

현무패웅검을 녀석에게 겨눈 채, 제 자리에서 선언했다.

“네 말대로 내가 어설픈 각오를 갖고 있었어. 그래서 방심했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진심으로 싸움에 돌입하면 손속에 정을 둘 수 없어. 진짜로 너를 죽일 수도 있다고.”

“마치 나는 너를 죽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군.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항복해. 너의 목숨과 고작 이 광석 한 덩이, 저울에 올릴 필요도 없이 계산이 간단한 일이야. 고집부릴 이유가 없…….”

디멜의 마법진이 순간적으로 늘어났다.

‘치잇.’

내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도 없는 것이다.

[제국마도병 귀속냉마법]

[제6식 ‘크리스탈 플라워(Crystal Flower)’]

디멜이 밟고 있는 바닥에서 순간 수십 송이의 빙화(氷花)가 피어올랐다. 그 꽃잎에서 날아오른 얼음 포자들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내게 몰려들었다.

그 속도야 느리기 짝이 없었으나 한정된 실내에서 피하기가 마뜩잖았다.

쾌검의 연참으로 걷어낼 생각이었으나 포자에 닿는 순간 검을 쥔 손등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건드리면 바로 칼날이 되어버리는 포자로구나.

디멜이 스산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까 전에 넌 본체를 공격했어야 했어. 너의 무른 마음이 결국 패배를 부를 거다.”

“강자가 베푸는 아량이라고는 생각 못 하냐.”

“이기고 나서 그런 말을 입에 담아.”

결국 전투는 내가 우려했던 장기전으로 치러졌다.

그건 검사와 마법사의 전형과도 같은 꼬리잡기.

육체의 내구력에서 우리 둘은 비교조차 무색할 만큼 차이가 났다. 내 쪽에선 디멜에게 정타를 한 번만 꽂아도 승부의 추가 확 기울 것이다.

하지만 상대인 디멜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원거리 마법을 총동원해서 내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검사에게 따라잡히느냐.

그 전에 검사가 피투성이가 돼서 나가떨어지느냐의 싸움.

‘분명 여기는 녀석의 홈그라운드야. 얼마나 오랫동안 시뮬레이션을 한 것인지 꺼내드는 마법의 연계가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검 끝은 서서히 디멜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요인은 세 가지.

첫 번째.

먼저 등반하면서 얼음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강자를 여럿 만나봤던 경험이 톡톡히 도움이 됐다.

백묘탑의 빙결 마법사 록시탄. 그리고 등에서 얼음 기둥을 뽑아내던 삼월초원의 야수왕 누겔타.

그 둘이 구사하던 경지에 비하면 디멜의 빙결 마법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두 번째.

근력 수치가 낮아지는 바람에 꺼내들 수밖에 없었던 부주력 무기인 현무패웅검의 존재였다.

나조차 깜빡 잊고 있었지만 이 검은 귀혼산장의 한켠에서 패악질을 부리던 현무를 때려잡고 얻어낸 녀석의 등껍질로 만든 검이었다.

현무가 사용하던 특수기 역시 냉기. 그런 환수의 등껍질이 빙결 마법에 강한 건 당연하다.

내 현무패웅검의 검신은 디멜이 사용하는 온갖 형태의 원거리 포격을 상쇄시키며 녀석을 당황시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디멜이 나를 염두에 두고 오랫동안 시뮬레이션을 준비했다는 점이 점점 녀석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예상컨대 디멜은 내 정확한 힘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냉기를 상쇄시키는 소재로 만든 검을 들고 올 거라는 것도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

거기에서 생기는 예상과 현실의 불일치가 마법사의 술식 계산에 과부하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잡았다, 디멜.”

그래서 나는 꽤 출혈을 감수해야 했지만 결국 접근에 성공해 디멜의 수갑을 꽈악 붙잡을 수 있었다.

잭 프로스트에게 채워진 수갑은 내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불에 데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디멜에게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일 수만 있다면 이깟 고통쯤이야 무시해버릴 수 있다.

“그 손 놓는 게 좋을 텐데.”

“아니. 너에게 우정의 펀치를 한 방 날려주기 전엔 안 놓을 거다.”

“우정이라. 너에게 그런 단어를 읊을 자격이 있나?”

“너는 날 절교한 모양이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한 적이 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까탈스럽게 구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는 여전히 내 친구다.”

디멜의 수갑을 내 쪽으로 잡아당기자 녀석은 끌려오지 않기 위해 반항했다. 하지만 한 손이 봉쇄되는 바람에 마법진을 만들어내지 못해 속절없는 몸부림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친구의 정의에는 정신 못 차리는 친구를 두들겨 패서 원래대로 되돌려주는 것도 포함돼 있어.”

“……너는 우리 7번 방을 한 번 외면했어.”

“뭐?”

“그래. 우리는 탈옥할 용기도 없어 너의 등반에는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층장인 제르비어스마저 데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 버렸지. 자연히 방장들은 고삐 풀린 야수들이 되었어. 마그마 볼에서 우리 7번 방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겠다고 으르렁거리는 괴물들. 그놈들이 갖고 있는 원한을 너는 모른 체하며 올라가 버린 거야.”

“나는, 나는 그럴 생각까진 없었어. 다만 그대로 화룡도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

“그 순간에 너는 절교라는 걸 감당했어야 해. 그런 네가 감히 우정을 들먹여? 친구의 어깨에 올라간 짐을 외면하는 게 네가 생각하는 진정한 친구냐?”

현무패웅검을 허리춤에 꽂고 비어버린 손으로 디멜의 멱살을 잡았다. 내 무시무시한 악력에 녀석의 얼음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그래서? 지금 네놈의 모습을 7번 방 친구들이 좋아라 해주냐. 모든 죄수들을 힘으로 짓누르고 공포로 질식시키는 게 네가 선택한, 친구들을 지키는 방법이냐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슈바인.”

“시발, 그러니까!”

내 뒤꿈치에 달라붙어 있던 얼음들이 강력한 질풍에 날아가며 아우성을 쳤다.

그것은 지금껏 아껴두고 있었던 한 친구의 스킬을 빌려오기 위한 전조 증상이었다.

“내가 모르는 게 뭔지 털어놓으라는 말이잖아, 이 새끼야!”

내가 빌려온 것은 수인병단 올쿠레 켄타의 스킬이었다.

[친구 올쿠레 켄타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과 공명하여 레벨이 오릅니다.]

[천년명마의 질주 Lv. 4]

마그마 볼에서 고원을 가로지르게 만들어 주었던 노전사의 주력기.

그것이 내 발끝에서 발동되면서 디멜의 몸을 층장실 벽면에 처박았다.

“커허억!”

디멜의 몸 주변으로 벽면에 거미줄 모양의 실금이 퍼지며 주술의 힘이 담긴 문양들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마그마 볼 당시 내 근력 수치는 고작 21.

지금은 무려 30배로 뻥튀기한 610.

콰르르르릉!

그 압도적인 파괴력이 벽면을 무참하게 무너뜨렸고 우리는 빙궁 뒤편인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일단 디멜이 펼쳐둔 덫에서 떨어져나왔다.’

이제부터는 내가 반격할 시간이다.

“항복해라, 디멜.”

“웃기지 마라. 날 죽인다 해도…… 끄억!”

디멜의 아구창이 한 번 시원하게 날아가는 소리였다.

“이대로 절벽 해안가까지 떨어지는 동안 너는 절대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어. 항복할 때까지 때릴 거다.”

“……이익.”

디멜은 분한 듯이 입을 헤 벌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수위가 낮아졌다 하더라도 마그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안가에 도착하는 순간 디멜은 절대로 이전만큼의 빙결 마법을 전개시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양손을 내가 이렇게 단단히 붙잡고 있는 한 빠져나갈 수단이 될 마법진도 그려낼 수 없을…….

어라라?

“샤아아아아아.”

디멜이 지나치게 오래 입을 벌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을 때쯤, 녀석이 뿜어낸 입김들이 사르륵 모이더니 손바닥만 한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입김으로 마법진을 만들었다고?

[제국마도병 귀속냉마법]

[제8식 ‘프로즌 스펙트럼(Frozen Spectrum)’]

강렬한 빛의 폭발이 내 눈동자 바로 앞에서 터지며 막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결국 나는 디멜을 놓은 채 해안가에 절반도 가지 못한 지점의 능선을 데굴데굴 구르게 되었다.

“치잇! 갖은 수를 다 쓴다는 거지?”

벌떡 일어나는 데엔 성공했으나 북극의 백야에 오랫동안 노출된 것처럼 눈앞이 새하얬다.

“덤벼, 디멜 무바크! 끝장을 보자.”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눈두덩을 거칠게 비벼대니 가까스로 흐릿하게나마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파스스슷.

땅바닥에서 작은 봉우리가 솟아오르더니 나를 향해 다가온 것이다. 디멜의 원거리 마법인 줄 알고 흠칫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흙 봉우리에서 뛰쳐나온 것은 털을 빳빳하게 세운 뚠 아티르였다.

앙증맞은 두더지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제 그만해,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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