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뒤늦은 신고식 (2)
[돌발 퀘스트 #11. ‘금의환향’을 완료했습니다.]
[용사는 모든 방장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이 Lv. 7으로 오릅니다.]
빙궁의 계단을 올라가는 시간은 짧았다.
아무도 날 막아서는 이는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마그마 엘리게이터들의 뼛조각들뿐이었다. 천장과 벽면에서 수십 마리의 악어들이 험악하게 날 노려보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모두 떼로 덤벼들었더라면 상대하기 무척 까다로웠을 텐데, 오르콰이움의 사령술은 그 정도로 대단치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3층 복도에 들어서자 서리가 낀 철문이 앞을 막아섰다. 화룡도의 층장이 머무르고 있는 층장실.
차가운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접촉을 거부하는 메시지가 떴다.
[술자의 마법력에 의해 출입이 거부되었습니다.]
결계를 쳐두었다.
굳게 닫힌 문보다 이 결계의 존재가 더욱 내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의 결계를 유지하려면 마법사가 꾸준히 힘을 주입해야 한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적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디멜이 나를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점.
친구인 나를 ‘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이 날 극도로 불쾌하게 만들었다.
“널 들여보낼 생각 없으니 돌아가, 슈바인 스트링거.”
문 너머에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평소에도 날이 서 있는 시니컬한 색채가 지금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오랜만이야, 디멜.”
“그래. 여기까지 오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은 걸 보니 꽤 강해졌구나.”
“어. 그동안 제법 많은 일들을 겪었거든. 너와 할 얘기가 있는데. 이 문 좀 열어주지 않겠어?”
“너는 이제 등반죄수야. 더 이상 화룡도에 속한 죄수가 아니지. 자연히 층장인 날 독대할 자격도 없고. 만나줄 생각 없으니 돌아가라.”
그야말로 냉담하기 짝이 없는 문전박대다.
나는 스멀스멀 차오르는 화를 내리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오면서 독방에 갇힌 다이몬 키리스를 만났어. 너에게 호된 꼴을 당했다던데.”
“다른 방장들과 융합되지 못했으니까. 규율을 어긴 책임을 지고 있는 중이지.”
“오르콰이움이나 차카 도기노브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어떻게 디멜 네가 콩파스 같은 비열한 놈들까지 네 밑으로 거둘 수가 있는 거야? 넌 그 녀석에게 친구를 잃었잖아.”
“……그걸 너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어.”
“7번 방 녀석들은 여전히 곡괭이 하나만 들고 채석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 그런데 넌 냉방 잘 되는 층장실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는 거냐?”
“우스꽝스러운 소릴 하는군. 뚠은 두더지 토인이라 땀 대신 침을 흘려. 비르카는 애초에 스켈레톤이라 땀구멍이 없고. 올쿠레 어르신은 노동을 하지 않으니 말할 것도 없지.”
“말꼬리 잡지 마.”
일부러 7번 방 친구들의 이야기를 꺼내서 디멜의 반응을 확인했다.
같은 방 출신 동료들의 이름을 꺼냈을 때 녀석의 어조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게다가 여전히 올쿠레 켄타를 두고 어르신이라 부르고 있고.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것 같아서. 그 문을 사이에 두고 난 하루 종일 이렇게 떠들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사정이 다를 텐데? 화룡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나 남았지?”
내게 면회의 시간 제한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아무래도 1층 교도관과 무척이나 끈끈해진 듯한데.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문에서 한 발짝 물러서며 최후 통첩을 날렸다.
“정말 안 열어주겠다는 거지?”
“그래. 포기하고 돌아가라.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나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어디 그렇게 되나 두고 보자고.”
단탈리온을 꺼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결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 용사님이 보고 계신 결계는 단순한 얼음이 아닙니다. 결계는 그 목적이 단순할수록 깨트리기 어려운 성질을 갖고 있지요. 예를 들어 진입을 시도하는 모든 생명체의 접촉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걸게 되면 술식이 까다로워지지만 단 한 명의 출입만 거부한다는 조건이라면 결계의 내구도가 훨씬 단단해지는 식입니다.
“디멜이 이 결계에 건 조건이 설마?”
- 네.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출입 불가입니다. 이 결계는 오직 용사님 한 분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무패웅검의 칼자루에 손바닥을 올리고 다시 물었다.
“내 스승이신 참월의 마녀님은 귀혼산장의 결계를 힘으로 박살 내셨지. 그것처럼 내가 결계를 계속 두들긴다면 어떨까.”
- 파쇄가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신다 하더라도 최소 3일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시전자인 죄수 디멜 무바크가 그동안 아무런 보수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죠.
그 순간 나는 미련 없이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무식하게 결계를 때려 부순다는 계획을 폐기했다.
정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 말고도 방법은 많다.
단탈리온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고 허공에 외쳤다.
“친구 디멜 무바크의 곁으로 순간이동!”
파천황의 권능인 순간이동은 모든 결계와 방비를 완전 무시하고 작동한다. 아마 내가 지금껏 이 권능을 사용한 사례를 모두 통틀어 최단 거리의 순간이동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 먹혀?”
[죄수 디멜 무바크가 친구 목록에 올라 있지 않습니다. 그가 ‘절교’를 선언했으므로 귓속말과 순간이동은 물론 스킬 대여마저 차단된 상태입니다.]
절교? 친구 차단을 당했다고?
인간 세상에 있었을 때 누군가에게 ‘언팔’ 당했을 때의 상심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가 곧 나를 덮쳤다.
“진심으로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거지?”
디멜은 지금 나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전심전력으로 나와의 독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절교’를 선언했다는 것은 이 상황이 깜짝 해프닝이나 몰래카메라 따위가 아니라는 걸 반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어째서 이리 몰라보게 돌변했다는 말인가.
“정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어.”
나는 층장실의 문에서 등을 돌리며 씩씩거렸다.
*
콰르르르릉.
무너진 천장의 잔해가 층장실 내부를 가득 덮쳤다. 나는 그 돌무더기 사이에서 일어나며 입가를 닦아냈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구나, 디멜.”
벽면에 서 있던 잭 프로스트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라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다만…… 저 두터운 천장을 뚫고 들어올 줄이야.”
몇 십 분 전에 나는 빙궁의 옥상으로 올라가 손으로 바닥을 후려친 다음 인간 굴삭기가 되어 공사를 시작했다.
가루가 된 흙더미를 양옆으로 치우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먹어치워 버렸다.
익숙한 화룡도의 흙맛이 여전히 혀끝을 비릿하게 만들고 있다.
“퉷! 뚠의 스킬을 나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구나. 날 막으려면 건물을 쇳덩어리로 지었어야지.”
내 입가에서 차가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층장실의 기온이 영하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냉동고에 집어 던져진 기분. 잭 프로스트에게 있어서는 천국과도 같은 공간일 것이다.
아마 가장 최근에 몸담고 있던 곳이 5층 빙설협곡이 아니었다면 적응하기 힘들 정도의 냉기였다.
“정말 고집불통이로군.”
디멜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물끄러미 나를 노려봤다.
툭하면 얼굴이 녹아내리던 예전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조각처럼 빚어진 냉미남의 이목구비가 완벽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용건이 뭐지?”
용건이라고 표현하는구나.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품속에서 푸르가토늄 한 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이걸 위층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줘. 층장인 네가 동의해야 가능…….”
“거절한다. 이 화룡도에서 네가 가져갈 수 있는 건 공기뿐이야.”
광석을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행히 워낙에 단단한 물질이라 아무리 힘을 줘도 바스러지는 일은 없었다.
“어째서야? 화룡도의 광물 전체를 털어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이 한 움큼만 가져가겠다는데.”
“양은 문제가 되지 않아. 너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생기는 층장의 권위 손실이 훨씬 크니까. 죄수들을 통제하는 데 있어 조금의 위험도 감수할 수 없어.”
“너 지금 그 완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애초에 층장이 된 이유가 뭐야? 어? 더위에 질식하다 못해서 미쳐버린 거냐앗!”
“너는 말해도 이해 못 할 거야. 물론 시시콜콜 말해줄 생각 따위 없고.”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나는 돌무더기에서 한 걸음 걸어 나오며 물었다.
“힘으로 가져가겠다면?”
나로선 편하게 돌격할 수 있는 거리를 잡은 것인데, 디멜은 내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위험한 간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마법사가 전사를 상대할 때의 기본 태세.
“시도한다면 말리진 않겠어. 하지만 한 가지만 알아둬.”
디멜의 가슴 앞에 원형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이전에야 내게 마법적 지식이나 경험이 전무했기에 몰라봤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소 5서클에서 6서클.’
삼월초원의 간부급은 되지 못하더라도 모든 스킬이 사실상 봉인 당한 지금의 내게는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예전의 날 생각한다면 큰코다칠 거야.”
디멜이 마력을 해방하자 층장실 전체에 서리가 끼면서 녀석의 주변에 얼음 가지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
마법사에게 선공을 허락하는 건 미친 짓이다.
나는 땅을 박차고 현무패웅검을 발도했다.
태애애앵!
그런데 묵직한 다이아몬드형 얼음 방패가 디멜 앞에 형성되면서 내 돌진을 막아 세웠다.
“이 정도로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어, 슈바인.”
마력 고갈로 빌빌대던 옛 모습은 잊어버리라는 듯이 연계 술식을 전개하는 디멜이었다.
바닥에서 콰르륵 자라난 얼음가지들이 신속하게 뻗어와 내 오른쪽 무릎을 휘감았다.
휘이이익!
천장으로 내던져진 탓에 강렬한 충격이 뒤통수와 허리를 덮쳤다.
“크윽.”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허공에서 형성된 얼음 창들이 유도탄처럼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를 악물고 물러서며 그것들을 받아쳤다.
팅! 팅! 퍼억!
왼쪽 옆구리에 박힌 얼음창이 환부에 급격한 동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맨손으로 뽑아냈다.
피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지만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방심한 거야. 두 번은 안 당해.”
내가 짐짓 센 척을 하자 디멜은 냉담하게 받아쳤다.
“맞아. 너는 이 화룡도에 돌아온 이래 내내 방심을 했어. 그럴 수밖에. 예전에는 절대 정면승부로 이겨낼 수 없었던 강력한 방장들이 지금은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수준으로 전락한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르콰이움의 가면과 차카의 볼기짝을 후려치면서 그 어떤 죄수들을 상대했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쾌락과 우월감이 주먹에 깃든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디멜의 마법진이 다시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는 그토록 혐오했던 방장들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거야, 슈바인.”
내가 질 리가 없다.
왜냐하면 화룡도의 ‘약한’ 방장들은 내가 거쳐온 수라장을 절대 꿈도 못 꿔볼 테니까.
그렇게 방만함에 젖어 있었던 건 내 쪽인가.
“마그마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엘리게이터들이 출몰하는 횟수가 무척 빈번해졌다. 서식지가 줄어든 짐승들은 당연히 흉포해지곤 하니까.”
빙궁 내부를 장식했던 그 수많은 악어 뼈들. 단순히 자연 변화로 멸종당한 게 아니란 말이야?
“한 가지 묻겠어, 슈바인 스트링거.”
디멜의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맺혔다.
“그 많던 악어새끼들…… 누가 다 때려잡았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