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다시 화룡도에서 (3)
올쿠레는 부러 냉담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변해버린 디멜과 지금의 내가 만나면 대화가 원만하게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어르신.”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7번 방은 마그마 볼에서 똘똘 뭉쳐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비르카는 스스로 죄수들의 미끼가 되어 온몸의 뼈가 해체되는 자폭을 감행했고, 올쿠레는 내게 업힌 채 강력한 죄수들을 물리쳤다. 성검을 꺼내 제르비어스를 붙잡고 있는 동안 마그마 볼을 대신 옮겨준 뚠 아티르의 용기는 숭고했다.
디멜 무바크도 마찬가지. 녀석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나를 올려주지 않았더라면 난 그 순간 마그마에 집어 삼켜졌을 것이다.
“제가 5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제 모험이 7번 방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상대가 앞을 가로막아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으면 이겨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최약체 집단 7번 방에게서 배웠다.
하이파이브를 외친 뒤 모두가 정상을 향해 달렸던 그 날의 기억과 환희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런데 한 놈이 그걸 잊어버린 모양이네요.”
층장은 평범한 죄수와 다른 취급을 받는다.
무려 다섯 개의 층을 구경한 내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밑바닥에서 빌빌대던 잭 프로스트가 한 층의 정점에 올랐으니 완전히 변해버리는 것도 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건 왠지 우리가 함께 일군 순간을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제게 허락된 면회시간 동안 디멜 무바크를 꼭 만나고 갈 겁니다. 여러분 셋이 막아서도 소용없어요.”
올쿠레가 끄응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뭔가를 결심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쇠심줄 고집을 가졌다는 걸 기억해낸 모양이다.
“다만 그 전에 면회의 목적인 물건을 회수하는 게 먼저겠죠. 비르카, 그 곡괭이 좀 빌려주겠어?”
“어? 으, 응. 그래.”
비르카는 주춤대면서도 채굴용 곡괭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내 인벤토리에 원래 갖고 있던 곡괭이는 삼월초원의 대장장이인 만검패웅에게 선물로 주고 왔기 때문이다.
“모두 잠깐 물러서 있어. 다칠지 모르니까.”
비르카의 곡괭이를 쥔 오른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리고 흑색 광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덩어리를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앙!
용사의 전력이 담긴 한 방이 광물 덩어리에 쩌저적 실금을 만들어내더니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아니, 슈바인. 불과 몇 달 만에 이 정도로…….”
“원래는 지금보다 딱 2배 강합니다. 면회 상태라서 절반으로 힘이 깎였거든요. 하지만 이 정도로도 어르신과 팔씨름을 하면 제가 이길걸요.”
올쿠레의 근력수치는 395. 하지만 반으로 깎인 와중에도 내 근력수치는 무려 610이나 된다.
비르카가 사탕 더미처럼 발밑에 나뒹구는 광석을 집어 들었다.
“예전엔 폭약 가루를 써도 이만큼을 부수진 못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거든. 잠깐 그거 넘겨줄래?”
비르카에게서 광물을 넘겨받자 아이템을 설명하는 창이 눈앞에 떴다.
띠링!
[이름: 푸르가토늄 덩어리]
[등급: B급]
[푸르가토리움 1층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단단한 광물의 일종입니다.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의 권능이 담겨 있으며 마그마에도 녹지 않는 저항성과 경도가 특징입니다. 교도관이 제련할 경우 죄수들의 수갑과 족쇄를 만드는 소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제련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최고급 광물이지요.]
5층에서 거인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무지막지한 괴물 크로톤. 녀석에 대항하기 위해서 내가 고른 물질이 바로 이것이었다.
‘푸르가토늄이란 어엿한 이름이 있었군.’
다행히 한 덩어리면 충분하다.
이것을 증식하는 비늘과 결합해 사용하면 빙설협곡에 거대한 파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이템 수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푸르가노튬을 인벤토리에 넣으려 했을 때 날 찾아온 것은 거부반응이었다.
뭐? 안 들어간다고?
[등반죄수는 현재 ‘면회’ 상태에 있습니다. 방문 중인 층에서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해선 두 존재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그 층의 교도관과 층장이 그 주인공이지요.]
광물 덩어리를 주먹으로 꽉 쥔 채 하늘을 쳐다보자 기다리던 메시지가 전해져왔다.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등반죄수가 푸르가토늄을 빌려 가는 것을 정식으로 허가한다고 전합니다.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고합니다.]
교도관은 노터치.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화룡도의 새 층장에게서 푸르가토늄 소유권에 대한 허가만 받으면 된다.
결국 이렇게 흘러가게 되는군.
과연 1층의 교도관은 그저 물러나서 방관만 하고 있는 건가. 올쿠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 생각은 살짝 달라졌다.
교도관이란 족속은 역시 믿을 수 없는 놈들.
‘어쩌면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준비를 마쳤기에 관람객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1층 교도관이 화신체를 만들어내면서까지 디멜의 귓가에 속삭였던 한 마디. 그게 지금의 폭군 독재자 디멜 무바크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한 마디가 뭐였는지 난 꼭 들어야겠다.
푸르가토늄을 인벤토리가 아닌 품에 집어넣은 뒤 모두에게 물었다.
“그래서 디멜은, 지금 어디에 있죠?”
*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저를 서큐버스로 만들어놓으시고는 이따위 추남들의 소굴에 내버려 두셨나요? 엉엉.”
아슬아슬한 형태로 찢어놓은 죄수복. 그 죄수복의 뒤에 달린 앙증맞은 박쥐날개.
몽마들이 모인 5번 방의 방장 코제트.
“제발 한 번만! 꽃미남 죄수를 화룡도에 던져주세요! 성격이 개차반이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길들이면 되니까. 심지어 싸이코패스여도 상관 안 해요. 헤헷. 왜냐면 나도 싸이코패스거든?”
누군가 등 뒤로 접근하는 줄도 모른 채 코제트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양손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얼굴만 파먹고 살 수 있는 잘생긴 놈을 보내주시옵소…… 꺄악! 누구얏!”
“오랜만이야, 코제트. 나야.”
“7번 방장 슈바인? 어머나. 진짜 오빠야?”
코제트는 나를 와락 껴안으려 했으나 그녀의 품에 들어찬 건 빈 허공뿐이었다. 나는 그냥 잽싸게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왜 피하지?”
“왜긴. 서큐버스와 접촉하고 싶지 않으니깐.”
“내 소환술이 먹힌 거 아니었어? 미남 죄수를 달라고 했더니 그 순간에 오빠가 딱! 나타난 거잖아.”
“서큐버스는 보통 소환되는 편 아니야? 너 매료 마법 말고 소환 마법도 쓸 줄 알아?”
“……쳇. 아픈 데를 찌르는군.”
“그리고 자꾸 오빠오빠 하지 마. 네 나이가 나보다 몇 배는 더 먹었을 텐데.”
“그 얄미운 말뽄새를 보아하니 진짜 슈바인 스트링거가 돌아왔나 보네.”
“왜 거주구역에 있지 않고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코제트?”
서큐버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간단한 동작에마저도 대단한 교태가 숨겨져 있었으나 지금의 내게는 아무런 동요가 일어나질 않았다.
“층장이 교도관한테 잘 얘기해줬거든. 각 방의 방장들은 이제 거주구역에 묶여 있지 않아도 돼. 채굴 할당량만 마치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어.”
그래서 마치 동네 마실 나온 고양이처럼 배회하고 있었던 거군.
나는 코제트의 등 뒤에 있는 건축물을 가리켰다.
“그럼 저 건물에 층장이 있는 게 사실이겠군.”
“맞아. ……잠깐만. 지금 오빠 혼자 저길 들어가겠다고?”
“왜? 안 될 거 있어?”
코제트는 제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축 처진 눈썹으로 나를 말렸다.
“오빠가 다시 내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는 방장이 몇 있거든?”
“후보가 꽤 많군. 화룡도에 있을 때 악연이 한둘이었어야지.”
“그 오빠들이 전부 층장의 빙궁에 호위무사로 있단 말야. 눈에 걸리는 순간 두들겨 맞을걸?”
빙궁?
그런 이름까지 갖다 붙였단 말이지.
코제트의 어깨 뒤로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은 내가 화룡도에 있었을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축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3층 꼭대기에 녹지도 않고 있는 얼음 울타리가 빙 둘러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잭 프로스트가 머무르는 곳으로 손색이 없다.
“가지 마, 오빠. 그 강한 다이몬도 이제 층장 패거리한테 꼼짝도 못 한단 말야. 미남이 얻어맞는 모습을 보면 코제트는 너무 슬퍼요.”
“슬프긴. 너 싸이코패스라고 고백하는 거 다 들었어.”
“……하여간 멋이 없어요.”
“하지만 싸이코패스여도 괜히 지진에 휩쓸리고 싶진 않겠지? 그러니 시간 줄 때 멀리 도망가 있어.”
곧 여기는 풍비박산이 날 테니까, 라고 말하며 지나치는 나를 코제트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를 지나쳐 도착한 곳은 빙궁의 거대한 대문이었다.
지키고 선 문지기나 경비병은 없어 보였다.
“내가 돌아왔다, 디멜.”
간단히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꽈아아아앙!
그냥 냅다 대문을 걷어차버린 것이다.
철문이 구겨진 채 마당 안으로 나뒹굴었다. 징소리나 다름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으니 곧 튀어나오는 녀석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슈바인 스트링거, 진짜 네놈이구나.”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하고 싶은데…… 차마 그 돼지 같은 얼굴엔 그런 인사가 안 나오네?”
13번 방장 차카 도기노브.
화룡도에 있을 시절 줄곧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식인 홉고블린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뒤이어 불길한 검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오르콰이움과 코볼트 콩파스, 채석장의 관리자 야불타까지 몰려나왔다.
“더러운 냄새나는 슈바인 스트링거. 층장 님의 말씀이 사실이었구나.”
오르콰이움의 흉흉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디멜이 내가 화룡도에 온 걸 알고 있다고?”
“진작부터 말씀하셨다. 머지않아 네 녀석이 패잔병 신세로 쫄래쫄래 내려올 거라고. 쿠후후후.”
어쩐지 차카 놈도 그렇고 내 귀환에 전혀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아니다 싶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
내가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를 사용할 거라고 예측하는 재주를 부리려면 평범한 죄수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분명 교도관이 언질을 해준 거겠지.
나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어쨌든 내가 왔는데도 디멜이 저 안에 처박혀서 안 나오고 있단 말이지?”
내게 망신을 당한 장본인 중에서 서열을 따지자면 1위를 다툴 수 있는 콩파스가 으르렁거렸다.
“당연하지. 층장께서는 네놈 따위 만나주실 생각이 없으시다. 그러니 잠자코 여기서 뒈져라.”
숫자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일까. 콩파스 녀석은 기세가 등등한 모양이었다.
그건 차카와 오르콰이움, 야불타도 마찬가지였고.
“어디 보자. 근력이 700 밑으로 떨어졌으니까 디아볼릭은 쓸 수 없고…… 오랜만에 다시 이걸 휘둘러보겠군.”
스르릉.
인벤토리에서 현무패웅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러자 빈손에서 무기를 꺼낸 재주에 놀랐는지 방장들이 순간 주춤거렸다.
오르콰이움이 빈정거렸다.
“온갖 꼼수를 쓰지 않으면 물러터진 자식이 뭘 믿고 까부는가 싶더니 등반을 하면서 검쪼가리를 하나 주웠나 보군.”
“아…… 너희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 검을 믿고 알량하게 허풍을 떤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네깟놈이 맨손으로 우리에게 덤비면…….”
마음이 바뀌었다.
최단시간으로 디멜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놈들을 작신작신 밟아주지 않으면 기분이 안 풀리겠어.
“아이템 수납.”
나는 현무패웅검을 있던 자리로 돌려보낸 뒤,
땅을 박찼다.
타아아아앗!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던 차카 도기노브를 향해 돌진했다.
“뭣?”
만전불패의 체술 Lv. 6.
무의식중에 주먹을 뻗어오는 차카의 공격 궤적을 피해 다리를 내질렀다. 내 무자비한 발차기가 비만 홉고블린의 고간을 걷어찼고,
뻐어어억!
차카 도기노브는 오르콰이움의 옆을 스쳐 날아가 빙궁의 벽면을 부수며 처박혔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