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다시 화룡도에서 (2)
“응? 비르카, 말해 봐.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궁금해.”
“슈, 슈, 슈…….”
스켈레톤의 얼굴에는 근육이 없다. 하지만 표정을 만들 수 없다고 해서 녀석이 얼만큼 놀랐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아래턱이 딸그락 떨리는 걸 보면 되니까.
“꽤액!”
비르카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앙증맞은 체구의 두더지 토인 뚠 아티르가 녀석의 종아리를 박살 내며 내게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슈바이이이인!”
못 보던 사이에 제법 힘이 세진 건가. 뚠이 내 아랫배를 향해 덥썩 안겨들며 고개를 부볐다.
“으헝헝헝. 진짜 너야? 우리 방장이 돌아온 거 맞아? 내가 꿈을 꾸는 거 아니고?”
“그래. 나 맞아. 꿈꾸는 거 아니야. 어디 수염 한 번 잡아당겨 줄까?”
“하지 마! 엉어어엉.”
나는 복슬복슬한 뚠의 뒤통수를 헤집으며 잠시 가만히 있었다.
뚠이 주둥이를 부비고 있는 허벅지가 뜨겁게 축축해지고 있었다. 하여간 쪼그만 녀석이 몸속에 무슨 수분이 이렇게 많은지.
“여기 네 왼팔이야, 비르카. 간수 좀 잘해.”
“어어, 정말 우리 방장 맞냐? 요사스러운 사술이나 환영 마법 같은 걸 수도 있잖아.”
“숙녀가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쓰겠냐.”
“내가 여자란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맞구나! 켈켈켈.”
곧 뼈만 남은 친구가 나를 껴안아 왔다. 그때 언덕 위에서 누군가가 우당탕탕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반려수를 잃은 수인병단 올쿠레 켄타.
“누가 돌아왔다고오?”
“어르신, 접니다!”
근엄한 체통도 잊고 두 팔만으로 달려온 올쿠레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가 건네오는 손을 마주 잡자 여전한 노전사의 팽팽한 근육의 결이 전달돼 왔다.
“잠깐만. 등반죄수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내 들어보지 못했건만. 어찌 된 건가?”
올쿠레의 질문에는 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등반에 실패해서 내려온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아닙니다. 지금의 저는 무려 5층까지 등반에 성공했어요. 세계수의 파편이라는 걸 얻어서 딱 하루 동안 아래층을 ‘면회’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가? 듣던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에에엑! 그럼 하루가 지나면 다시 올라가는 거야, 슈바인? 그냥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돼?”
젖은 털뭉치가 말했다. 아니, 뚠이 말했다.
“미안해. 알잖아. 내 목표는 탈옥이라는 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2층 삼월초원에서 두 명의 스승을 만나 무공과 마법을 깨우쳤다. 3층에선 기억상실증에 걸려 폭주하는 구미호 꼬마를 만났고, 4층에선 영혼 없이 재현된 도시를 사는 오토마타들과 섞였다.
내 모험담을 다 풀어내자면 삼일 밤낮이 모자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아쉽다.
나는 다시금 진지한 얼굴을 하고 모두에게 물었다.
“여기로 오는 길에 독방에 갇힌 2번 방장 다이몬 키리스를 만났어. 내가 등반한 뒤 화룡도에 새 층장이 부임했다고 하던데. 어떤 자식인지 몰라도 한 번 제대로 손봐줄까 생각 중…….”
말을 잇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7번 방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죄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한 명이 모자란 거지?
“뚠. 디멜은 어디에 있어?”
화룡도의 열기에 조금씩 얼굴이 녹아내리던 꽃미남 잭 프로스트.
차가운 말투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디멜 무바크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어, 그게 말이지…….”
두더지 토인은 내 품으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더니 슬픈 얼굴을 했다. 그건 나를 오랜만에 만나서 울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덧씌워진 것이다.
비르카와 올쿠레 역시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걸 회피했다.
이 분위기는 설마.
“새로 부임했다던 그 망할 층장이…… 디멜을 어떻게 한 거야?”
녀석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무엇이었던가.
‘우리 방은 마그마 볼의 우승자다. 시비 거는 녀석들이 있다면 이제부터 완전히 달라진 저항을 맛보게 될 거야.’
내가 방장으로 있었을 때도 7번 방은 화룡도 전원에게 무시 당하는 최약체 집단이었다. 내가 다음 층으로 올라갔을 시점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마그마 볼에서 7번 방에게 굴욕을 당했던 다른 방장들이 비열한 보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디멜은 결코 가만 있지 않았을 거고.
“디멜은 무사하네.”
그런데 올쿠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가 바로…… 지금 화룡도의 층장이야.”
*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오전에는 코가 녹아내리고 오후에는 귀가 흘러내리는 잭 프로스트가, 얼음 마법 한 번 쓰면 빈사상태로 헤롱대는 녀석이…… 무려 1층의 층장이 되었다고?
“자네가 마왕 제르비어스와 포탈 너머로 사라진 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네.”
올쿠레가 담담히 회상에 잠겼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슈바인, 자네 12번 방장 이자나르를 기억하나?”
“머리카락과 눈썹이 불길로 돼 있는 오크 말입니까.”
불의 정령과 오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모든 죄수가 끔찍한 열기에 허덕일 때에 나홀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 치던 화룡도의 3인자. 내가 감옥에 갖고 들어온 폭탄에 홀라당 넘어가 채석장 구역을 바꿔주기도 했던 기회주의자.
그게 혼혈 오크 이자나르였다.
“화룡도의 죄수들 중 차기 층장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야욕을 드러낸 것이 그 녀석이었다네. 화룡도의 3인자라는 것에 늘 열등감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지만 제르비어스 폰타인이 층장으로 있었을 때 이자나르는 감히 그에게 도전할 마음을 먹지 못했다.
폭렬마왕 제르비어스의 특성은 화염면역. 동급의 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최악의 상성을 가진 자가 층장으로 군림하고 있었기에 이자나르는 숨을 죽인 채 지내야 했던 것이다.
녀석의 입장에선 제르비어스를 등반 동료로 삼아 데리고 올라간 내가 갑자기 던져진 복권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공석이 된 1층장의 자리.
이자나르는 과감하게 마그마 볼에 도전하겠다고 교도관에게 선언했다.
층장이 공석이 되었기에 내가 제르비어스에게 덤벼들었던 마그마 볼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펼쳐졌다.
“아비규환이었네. 오르콰이움과 콩파스도 참전했고 차카 도기노브도 가만 있지 않았지. 이자나르 한 명을 막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최강자를 가리기 위한 전쟁이었으니까.”
배틀로얄.
주나라가 망하고 도래했던 춘추전국시대가 떠올랐다. 호랑이가 떠난 자리에 승냥이들이 밀림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이빨을 들이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요?”
“우리 7번 방의 네 명은 그런 방장들의 다툼에 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네. 그저 마음속으로 온건파에 속하는 다이몬 키리스가 층장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전혀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불타는 꼬리를 가진 헬 판테라가 관중석에 있는 7번 방의 죄수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마왕의 반려묘 밍밍이가 아닌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의 화신체로서.
“그 헬 판테라가 디멜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어. 그때 교도관이 무슨 말을 건넨 것인지는 우리도 지금까지 알지 못한다네.”
어쨌든 교도관의 은밀한 전언을 들은 디멜은 얼음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한참을 고민했다고 한다.
디멜의 고민을 줄여주기 위해서일까. 교도관은 마그마 볼이 한창 진행 중일 때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마그마의 수위를 현격하게 낮춰준 것이다.
“갑자기 화룡도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해안선이 뒤로 물러났어. 마그마 볼을 빼앗으려던 죄수들이 싸움을 멈추고 어리둥절해 할 만큼.”
디멜이 관중석에서 사라지고 전장 한복판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확연하게 열기가 줄어든 그 순간의 디멜 무바크는 모두에게 무시당해온 7번 방의 허접스레기가 아니었다.
덤벼드는 죄수들을 모두 얼음폭풍으로 날려버릴 만큼의 강력한 마도병이었다.
“마지막까지 서 있던 이자나르의 심장이 디멜의 손에 의해 꿰뚫리면서 힘의 추는 완전히 기울었네. 도전자로 나선 이자나르가 죽자 디멜은 마그마 볼을 분화구까지 갖고 올라가 집어던졌지.”
그렇게 누구도 우승 후보로 간주하지 않았던 7번 방의 죄수 디멜 무바크는 화룡도의 새 주인이 된 것이다.
그제야 디멜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뭔가에 질려버린 것처럼 움츠러들었던 뚠과 비르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해버린 친구의 존재에 겁을 먹어버린 것이다.
“디멜이 층장이 된 후로 뭐가 바뀌었나요?”
“반역의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디멜은 방장을 하나둘 찾아가 무릎 꿇렸네. 처음엔 레이스 오르콰이움, 그다음엔 차카 도기노브 식으로. 권력 싸움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실성 드워프 하스록 크라움을 기억하나? 오로지 수갑을 해체하고 싶어서 형량을 늘여가던 9번 방장 말야. 디멜은 그마저도 찾아가서 초주검을 만든 다음 복종의 맹세를 강요했다네.”
전에 없던 공포정치의 시대가 화룡도에 찾아온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좀처럼 현실감이 들질 않았다.
내가 아는 디멜은 싸움 자체를 싫어했다. 내가 강력한 방장들을 도발할 때마다 ‘책임지지 못할 만용을 부리는 건 민폐’라면서 제동을 걸었던 녀석이다.
대체 뭐가 그 녀석을 그토록 변하게 만든 거지.
내 표정이 어느덧 살벌해진 모양인지 뚠이 쪼르르 다가와서 앞발로 내 수갑을 붙잡았다.
“디멜을 찾아갈 생각하지 마, 슈바인.”
“어째서?”
“층장이 된 후로 우리도 잘 만나주지 않으려고 하거든. 절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야.”
올쿠레마저 뚠의 말을 거들었다.
“다행히 디멜 밑에 있는 방장들은 우리 7번 방은 건드리지 않고 있네. 층장의 옛 친구들이라는 명목 때문이겠지.”
“하지만 오르콰이움 같은 놈들이 갑자기 개과천선을 할 리는 없죠. 분명 7번 방을 놔두는 대신에 다른 방의 약자들을 괴롭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피투성이가 된 채 독방에 처박힌 다이몬 키리스를 설명할 수가 없다.
“혼자서 화룡도에 질서를 세우려 하는 다이몬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그래서 본보기로 삼기 위해 다이몬의 기를 죽이려 한 거 아닌가요?”
아무도 내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다이몬의 두 다리에 남겨져 있던 치명적인 자상을 떠올렸다. 보통의 상처와 달리 환부가 부어올라 있어 의아했는데 이제는 무슨 영문인지 알겠다.
디멜의 얼음 마법에 동상(凍傷)을 입은 거다.
“디멜 무바크. 이 새끼…….”
내가 주먹을 불끈 쥐자 올쿠레가 고개를 저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의 백발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디멜을 내버려 두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그 친구가 그렇게 싸늘하게 변해버린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요. 그 이유가 뭔지 들어봐야겠어요.”
“하지만 자네가 화룡도에 내려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에 불과하다지 않았나. 자네는 이제 등반죄수야. 더 이상 7번 방의 방장이 아니라고. 이 층의 문제에 신경 쓸 만큼 시간이 넉넉한가?”
이래서 나이는 헛먹는 게 아니라고 했나. 화룡도로 돌아온 자세한 내막은 아직 이야기하지도 않았건만 올쿠레의 말은 정곡을 짚어내고 있었다.
“맞아요. 저도 필요한 게 있어서 내려온 겁니다.”
“그게 필요한 이유는?”
“제 동료들이…… 큰 위기에 처했거든요.”
“그렇다면 긴말 할 필요가 없겠군. 목적을 빠르게 이루고 난 뒤 5층으로 돌아가게나. 자네와 디멜이 충돌하는 걸 우리는 보고 싶지 않아. 그건 너무나 고통스러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