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다시 화룡도에서 (1)
건조한 삭풍이 눈꺼풀을 때렸다.
내가 밟고 있는 토양은 화산재가 능선을 따라 흘러내리며 만들어낸 부식토였다. 유황과 흙내음이 묘하게 섞인 냄새를 맡으니 마음속에 그리움이 차올랐다.
“진짜 돌아왔구나, 화룡도에.”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마그마가 내뿜는 열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마음껏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로 쾌적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가 그만큼 이곳을 애틋하게 생각했던 것 아닐까.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등반죄수를 주시합니다. 그가 죄수에게 환영한다는 인사를 보냅니다.]
예상했던 안내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식으로 간접 소통을 전달하는 걸 보면 교도관 삵 녀석은 헬 판테라 밍밍이를 화신체로 삼아 현신했던 상태를 해제한 모양이었다.
“잠깐 볼일이 있어 내려온 거야, 불타는 삵.”
[1층의 교도관이 죄수가 입에 담은 별명을 마음에 들어합니다. 그가 고하기를 죄수가 푸르가토리움의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자신은 개입하지 않겠다고 물러섭니다.]
“그거야 나한텐 고마운 말이네. 걱정하지 마. 깽판 같은 거 안 치고 얌전히 있다가 다시 올라갈 테니까.”
위층에서 온갖 양아치 같은 교도관들을 여럿 만나고 와 보니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 정도면 무척 젠틀맨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뭐, 성별은 모르니까 젠틀맨이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 아무튼.
그때 이번에는 다른 메시지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죄수는 현재 ‘면회’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감옥의 조정 시스템에 의해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능력치가 절반으로 제한됩니다.]
띠링!
[이름: 슈바인 스트링거]
[칭호: 마그마 볼의 우승자, 무한쟁패의 종결자, 대수림의 남쪽 야수왕, 통곡의 검 살해자]
[HP: 4,999], [MP: 7,099], [근력: 610], [민첩: 435]
감옥을 등반하며 꾸준히 키워왔던 스탯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니 물속에 잠긴 것처럼 둔중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어쩔 수 없겠지.’
삼월초원의 천마 설공은 이런 상태에서도 2층의 초마인들을 홀로 거꾸러트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찔했다.
“괜찮아. 절반으로 깎였어도 신참 죄수였을 때의 비실비실했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 할 수 있지.”
그때는 HP가 100에 불과했고 근력과 민첩도 각각 10으로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현재의 깎인 능력치로도 마그마 볼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다. 그것도 온갖 꼼수를 쓰지 않고 정면승부로만.
“목소리가 들리는데. 거기 누구인가.”
등 뒤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5층 높이의 하얀 건축물이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 형태가 무척이나 익숙했다. 내가 말 그대로 ‘먹어치워서’ 없앴던 절망의 탑이었다.
“독방이잖아? 내가 올라가고 나서 누군가 다시 지은 건가?”
이전보다 둘레가 3배 정도 커져서 처음엔 몰라볼 뻔했으나 그건 분명 분란을 일으킨 죄수를 가두는 독방인 절망의 탑이 맞았다.
“여긴 죄수가 얼쩡대면 좋지 않은 곳이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목소리는 탑 꼭대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는 일이 없는 침착하고도 나직한 음성.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다이몬 키리스?”
코뿔소의 머리를 한 수인이자 화룡도의 보안관이라 불렸던 2번 방장 다이몬.
마그마 볼에서 유일하게 나를 막아서지 않고 그냥 보내주었던 원칙주의자가 독방에 갇혀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설마 슈바인 스트링거, 너인가?”
“기다려 봐. 지금 올라갈게.”
나는 무의식중에 천마어기행공을 시전하려 했다. 하지만 에러메시지와 같은 창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드등.
[친구 아스티나 류와 같은 층에 있지 않으므로 스킬 천마어기행공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아스티나가 없으니 경공술도, 역중력 비행마법도 펼칠 수 없구나.
나는 아쉬워하지 않고 다리에 힘을 모았다.
파아악!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있는 힘껏 뛰어오르기만 해도 절망의 탑 꼭대기까지는 한 방에 도약할 수 있는 근력이 있으니까.
독방 난간에 올라서자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근육질의 죄수가 보였다.
“오랜만이야, 다이몬. ……너 꼴이 왜 그래?”
“이쪽도 반갑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군. 면목이 없다.”
강인한 트리케리안의 죄수복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무엇보다 족쇄 위의 두 다리에는 거대한 짐승에게 할퀴어지기라도 한 듯 자상이 남겨져 있었다.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다른 방장 녀석인가. 하지만 나와 제르비어스가 화룡도를 떠난 상황에서 최강자를 꼽으라면 눈앞의 다이몬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럿이서 비겁하게 합심해서 다이몬에게 린치를 가한 것인가.
결국 합리적인 답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마그마 엘리게이터와 싸운 거야?”
그러나 다이몬은 멀쩡한 왼쪽 눈을 부릅뜨며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그 용암 악어들은 이제 더 이상 화룡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슈바인. 사실상 멸종했다고 봐도 되겠지.”
내가 뚠 아티르를 구하기 위해 화룡도의 해식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우리를 덮쳤던 초대형 악어. 범인은 그 녀석들도 아니었다.
멸종을 했다고? 어째서지?
나는 잡생각을 멈추고 다이몬의 말에 집중했다.
“죄수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태를 막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죄수가 생각보다 강했어?”
“아니. 그 녀석들을 제압하는 건 간단했지. 그런데 새로운 층장이 나를 막아섰다. 벌써 보름이나 지난 일이지. 분란을 일으킨 죄로 나는 2달 동안 독방형에 처해졌다.”
“새로운 층장이 누군데? 가두려면 폭력을 쓴 놈들을 가둬야지, 왜 널 가둬. 뭐 하는 녀석이야.”
머릿속으로 층장이 될 만한 후보들이 휘리릭 스쳐지나갔다.
어둠의 레이스 오르콰이움, 채석장을 관리하는 야불타, 비겁한 성정의 콩파스 등 험악한 방장들이 떠올랐다.
설마 식인 홉고블린 차카 도기노브 그 새끼인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니. 놈들은 층장이 아니야. 그놈들은 새 층장이 부임하자마자 태세를 전환해 그의 밑에서 졸개 노릇을 하고 있다.”
그 무시무시한 놈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다니. 새로운 층장이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못지않게 대단한 무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누군데?”
“글쎄. 너에게 알려줘도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군.”
“뭐?”
다이몬이 천천히 팔을 올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내 어깨를 짚었다.
“돌아가라, 슈바인. 화룡도는 더 이상 네가 알고 있던 층이 아니야. 이곳에 계속 머무르면 너는 상처만 입게 될 거다.”
*
그 뒤로도 다이몬은 내가 던지는 질문에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도 만나지 말고 원래 오르던 층으로 되돌아가라는 말뿐이었다.
결국 녀석에게선 답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나는 절망의 탑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원래 절망의 탑의 독방엔 방음마법이 걸려 있다. 때문에 그 안에 갇힌 죄수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바깥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나는 다이몬이 거는 말을 들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거라면 추정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독방에 갇힌 죄수의 비명소리를 전시하고 싶었던 건가.’
누군지 몰라도 악독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능선을 달려 내려가 채석장으로 향했다. 떠올라 있는 해의 위치로 봤을 때 지금 시간에 대부분의 죄수들은 광석을 캐는 노역의 의무를 행하고 있을 터.
우리 7번 방의 죄수들이라면 이 사태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절반쯤 달려 내려갔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마그마가…… 저렇게 낮은 곳에 있었나?”
화룡도는 마그마의 바다에 홀로 떠있는 거대한 섬이다. 아니, 섬이었다.
화룡도 어느 곳에서도 부글부글 끓는 마그마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위가 현재는 형편없이 낮아져 있었다. 화룡도가 섬이 아니라 커다란 산맥의 꼭대기처럼 느껴질 만큼.
“어쩐지 지나치게 안 덥다 싶더라니.”
화룡도의 열기가 그리워서 덜 덥게 느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층 전체의 평균 기온이 훨씬 낮아져 있던 것이다.
‘마그마의 수위가 몰라보게 낮아진 거야. 그러니 그 안에 사는 악어들도 구경할 수 없게 된 거고.’
마그마의 수위가 낮아진 것은 명백한 자연현상이다. 일개 죄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도관 정도 되는 신격 존재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러자,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조용히 웃습니다.]
알듯 말듯 아리송한 반응을 보이는 교도관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은 등반죄수를 지켜보기만 할 것이라 고합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는 거지.
알겠어.
나는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몇 분도 되지 않아 거주 구역과 조금 떨어진 채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깡. 까앙.
곡괭이가 광석을 때릴 때 나는 소리가 아스라이 울려 퍼지고 있다.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때인지 대부분의 채석장엔 죄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채석장 입구에 가득 찬 수레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야불타가 보였다.
저 녀석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 작업을 마치지 못한 방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떤 방이 채굴에서 꼴찌를 하고 있는지야 명백하다.
깡. 깡. 까앙.
나는 곡괭이 소리가 있는 구역을 향해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졌을 때.
또르륵.
웬 뼈다귀 하나가 눈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것은 팔꿈치 밑으로 분리된 스켈레톤의 뼈였다. 손가락은 버둥대다가 바닥을 가까스로 짚고는 땅을 더듬기 시작했다.
본래의 주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주워들었다.
‘여전하구나, 이 자식들.’
둔덕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왼팔이 어디 갔지? 그쪽으로 굴러갔는지 좀 찾아봐줘, 뚠.”
“아악! 또야? 비르카, 나 바쁜 거 안 보여? 수레를 절반밖에 못 채웠잖아. 너 스스로 좀 찾아.”
“네가 왼쪽에 있으니 그쪽으로 굴러간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지. 으휴. 하여간 투덜대기는. 우리의 방장 슈바인이 있었을 때가 편했는데 말이지.”
“이익! 슈바인 얘기 하지 말라 그랬잖아. 치사하게.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켈켈켈. 또 눈시울이 붉어지는 거냐, 낭만두더지야. 아주 전쟁터에 남편을 보낸 마누라가 따로 없구나.”
“누가 마누라야! 난 수컷이라고.”
“슈바인 이름만 나오면 질질 짜잖냐. 아주 망부석을 세워줘야겠어, 켈켈.”
“어쭈.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하지 마, 비르카 리케우톤. 네가 죄수들 안 볼 때 모랫바닥에 슈바인 얼굴 그리는 거 모를 줄 알아?”
“……그건 그냥 취미다.”
“취미는 무슨. 내가 실수로 그 밑에 파고들어서 낮잠 잤을 때 벌컥 화냈으면서.”
어라?
이상하다. 누군가 표창 같은 걸 집어던지기라도 한 건가. 왜 마음 한구석에 뾰족한 게 박힌 것처럼 아프지.
화산재 때문인가.
눈가도 자꾸 아릿하고 따끔거리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다.
‘우리의 방장이라.’
이 녀석들, 여전히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뚠 아티르와 비르카 리케우톤이 여전히 수다를 떨고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슈바인 말이야, 지금쯤 몇 층까지 올라갔을까?”
“켈켈켈. 어쩌면 중간 지점에서 등반을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구? 이상형의 여인을 만나 살림을 차렸을 수도 있지 않냐.”
“하핫. 그럴까? 코제트가 그렇게 달라붙어도 냉랭하게 떨쳐낸 걸 보면 우리 방장, 여자한텐 그닥 관심이 없는 것 같았는데.”
“쯧쯧쯔. 아직 꼬맹이구나, 뚠 아티르. 본래 그런 녀석일수록 진짜 임자를 만나면 꽉 잡혀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법이지, 켈켈.”
“남녀상열지사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비르카.”
“너 모르는구나. 들어 봐라. 왕년에 이 몸이 스켈레톤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말이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데?”
뚠과 비르카 사이에 끼어든 내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