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빙설협곡 (7)
“오랜만이야, 단탈리온. 내내 인벤토리에 짱박혀 있느라 답답했지?”
- 저는 유기체가 아니고, 불타거나 찢기지 않는 한 수명도 무한에 가깝습니다. 시간을 지각하는 단백질이나 호르몬 작용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 아공간 속에서도 따분함을 느끼진 못합니다. 그러니 걱정해주신 용사님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하핫!
필기체의 활자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페이지 위를 내달렸다.
이 자식.
풀려나자마자 장광설을 늘어놓는 걸 보면…… 따분했던 것 맞는 것 같은데. 그 사이에 투머치토커가 더욱 투머치해졌어.
단탈리온은 계속 글씨를 써내려갔다.
- 흐음, 용사님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군요. 친구분들께서 모두 납치당하신 데다 맞서 싸워야 할 적은 역대 최고로 강력하며 빈틈도 보이질 않는다니.
“이 감옥에서 온갖 괴물들을 지켜봤지만 크로톤이란 녀석은 정말 답도 나오지 않았어. 유조탱크처럼 커다란 놈이 스포츠카처럼 잽싸게 움직이는 건 반칙 아니냐? 게다가 마법 결계도 펼치고 환상의 존재인 아수라도 찢어발겼어.”
- 그뿐이 아닙니다, 용사님. 이 층의 눈보라에 담긴 그의 숨결은 명백히 마법보다도 오래된 고대의 정령술입니다. 크로톤은 체술과 마법에 더해 정령술도 사용할 줄 아는 셈이지요.
이 층에 떨어지자마자 탈출 의지를 봉쇄시킨 무시무시한 술법. 단탈리온은 그것을 정령술이라 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불가능이 없는 괴물인 건가.
“녀석이 그렇게 온갖 능력을 한 몸에 갖춘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거야? 내 친구들이 제물로 끌려간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 그걸 설명하기 위해선 일단 이 층에 교도관이 만들어놓은 대전제의 특수성을 아셔야 합니다.
“큰 놈이 강하다. 작은 놈은 약하다. 그 단순무식한 법칙?”
- 그렇습니다. 크로톤이 중력을 무시하고 용사님만큼 쾌속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이 자신의 입맛대로 자연법칙을 재조정했기 때문이지요.
이 푸르가토리움에선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군림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빙설협곡은 그런 구도를 극단적으로 만들어놓은 층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봐 온 교도관들 중 가장 변태적인 놈이다.
- 부피가 큰 개체일수록 강력해진다. 때문에 감옥에 끌려온 죄수들 중 본래의 세계에서 거인으로 불린 자들이 패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 거인들이 대대로 층장을 이어받으며 기암거성을 축조하고 왕국을 만들었지요. 용사님처럼 아래층에서 올라온 등반죄수들이 간혹 등장하더라도 그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용사님이 계시던 세계의 속담을 인용하자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정도가 되겠군요.
거인들의 치세가 공고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평범한 신체를 가진 자들의 수갑이 설원 위에 쌓여나갔다. 묘비도 없이 눈보라에 덮인 무수한 죄수들은 아무도 기억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완전히 규격 외의 존재가 5층 빙설협곡에 등장했다.
- 크로톤. 처음엔 그 어떤 거인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만큼 약해빠진 죄수였습니다. 하지만 야망만큼은 결코 거대한 존재들에게 뒤지지 않는 자였지요. 거인들의 발길질을 가까스로 피해 숨어 살던 그가, 어느 날 눈밭에 파묻혀 있던 한 금속 조각을 줍게 되었습니다.
“……기원검 네메시스의 파편.”
- 정확합니다, 용사님. 연금술사 그룬덴 사니릭투스로 하여금 푸르가토리움의 무기고를 해방시켜 준 것처럼 기원검은 크로톤의 갈망을 들어주었습니다. 크로톤의 소원은 ‘다른 죄수들과 합쳐지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단탈리온이 만들어내는 ‘합’이라는 글씨는 유독 다른 글씨들에 비해 굵고 짙었다. 평소와 달리 방점을 찍은 것이다.
- 금단의 합혼술(合魂)입니다. 용사님이 친구의 스킬을 빌려오는 것과 비슷해 보이겠지만 원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단순히 능력을 훔친다거나 육체를 덧붙이는 수준이 아니에요. 개별 존재의 영혼까지 한 개체로 합쳐지는 신적인 권능입니다.
“제물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하나가 된다고?”
- 그렇습니다. 삼월초원의 마법사들 중에는 흑마법사들이 꽤 많았지요. 백묘탑의 탑주인 일레인 쿠디슈부터 마녀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이런 경지에 다다랐던 자는 없습니다. 갈망하는 자에게 능력을 빌려주는 기원검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거죠.
“아스티나들이 크로톤의 제물이 된다는 건 녀석과 ‘합혼’ 당한다는 뜻이잖아. 만약 한 개체가 되어버리면…….”
- 하나로 뭉쳐진 영혼이 다시 분리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물의 의식이 치러진다면 용사님은 친구분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빼앗기게 되지요. 되찾을 방법은 없습니다.
빌어먹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스티나, 제르비어스, 캉이는 크로톤의 거성에 잡혀 들어가 곤욕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제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이미 제물로 흡수당해버리면 크로톤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나는 실패하는 셈이네.”
- 용사님 입장에서는 끔찍한 상상이지만 크로톤이 무극파천공과 폭렬 마법, 구미호의 여우트림을 사용해서 용사님의 앞을 가로막겠죠.
지체할 시간이 없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계속 다잡으려 애썼다.
다행히 단탈리온과 대화하면서 비어 있는 퍼즐이 꽤 많이 맞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기원검을 얻기 전의 크로톤은 어떤 죄수였던 거야? 그냥 평범한 인간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푸르가토리움에 잡혀 온 거지?”
- 거기에 대한 대답은 제가 해드리기 어렵겠습니다.
단탈리온의 문답은 공짜가 아니다. 질문의 가치에 상응하는 MP를 내게서 강탈해간다.
하지만 페어리 퀸 토니아가 회복해준 마력은 여전히 절반 이상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비싼 질문이야?”
- 그게 아니라 굳이 제 능력을 이용하시지 않아도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우리의 문답을 지켜보고 있는 요정족의 여왕을 쳐다보았다.
“토니아?”
내내 엄격한 눈빛을 하고 있던 토니아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마음을 놓고 있다가 정곡을 찔린 기색이다.
이럴 경우 재촉하면 곤란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 그녀가 한숨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숨겨 봤자 의미 없겠지. 크로톤은…… 원래 페어리였어.”
*
“크로톤과 나는 함께 이 감옥에 붙잡혀 왔었거든.”
턱이 스르르 벌려질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눈밭에서 광전사처럼 검을 휘두르던 초대형 거인이 원래는 이토록 작고 가냘픈 페어리였다니. 역변을 해도 정도가 있지.
“페어리는 본질적으로 실체를 부여받은 정령에 가까워. 순수 정령은 폭풍이나 지진 같은 거대한 자연현상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하지만 페어리는 씨앗에 물을 주는 정도의 힘만 갖고 있어.”
그러면서 토니아는 상처로부터 완전히 멀끔해진 내 볼을 가리켰다.
“너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정령술이지. 내버려 두면 회복할 수 있는 상처를 더 빨리 아물게 하는 것. 거꾸로 말해서 반드시 죽음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라면 내 정령술로도 어쩔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토니아가 무의식적으로 화제를 회피한다는 걸 깨닫고 지적했다.
“토니아, 너와 나는 친구가 됐지? 나는 친구를 허락해준 죄수의 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재주가 있어. 네가 갖고 있는 능력의 절반 이상은 누군가의 투지를 강하게 만들어준다거나, 마법의 효과를 증폭시켜주는 것들이더라.”
마음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
요정은 아니지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큐피트의 화살을 연상케 하는 것이 토니아의 스킬 목록이었다.
“맞아. 뭔가 간파당한 기분이네? 기분이 묘해.”
“미리 설명하지 못해서 미안. 그렇다면 크로톤의 정령술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네가 가진 힘과는 정반대잖아.”
“내 정령술이 불씨에 바람을 불어 키우는 거라면 크로톤은 불씨에 물을 끼얹어 없애버리는 식으로 작용하니까. 탈출할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정령술로 주박을 거는 거지.”
“크로톤에 대해서 더 듣고 싶은데. 네가 녀석을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단순히 일족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것 같거든.”
토니아는 잘려나간 왼팔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 다른 아이들 앞에서 꺼내기는 어려운 이야기라서.”
그런가. 내밀한 트라우마가 얽혀 있는 이야기일까.
나는 페어리 퀸을 더 재촉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충분히 시간을 지체했으니 이제 ‘반격의 수단’을 구해와야 할 차례다.
“어쩔 생각이야, 슈바인 스트링거?”
“일단 크로톤에 맞서 싸우려면 녀석과 대등한 정도의 사이즈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어. 하지만 초대형 눈사람을 만들어서 덤빌 게 아니라면 녀석의 단단한 피부에 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물질’이 있어야 해. 그걸 구하러 나는 다른 층으로 갈 생각이야.”
“층을 오르는 게 아니라…… 내려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이게 있다면 가능해.”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큼지막한 나뭇잎이었다.
[이름: 위그드라실의 이파리]
[등급: S급]
[푸르가토리움 7층에서 자라는 세계수의 파편입니다. 역사적으로 등반죄수들에게 인기가 좋은 성유물로서 자신이 한 번이라도 밟았던 층에 ‘면회’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현신하는 동안 본래 가진 능력치가 절반으로 제한되며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됩니다.]
“우와악. 뭐야 그게?!”
토니아 옆에 충신처럼 부복해 있던 젠타가 껑충 뛰며 놀랐다. 위그드라실의 이파리에서 피어나는 일곱 빛깔의 색채가 녀석의 눈동자에 반사되었다.
놀라는 것은 토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해. 우리 세계에선 오래전에 사멸한 세계수의 빛깔…… 대체 어떻게 얻은 거야?”
“8층의 어떤 죄수와 거래를 했거든.”
이 이파리는 뇌신 지드가 내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내게 각인돼 있는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의 영령과 심상 세계에서 겨룰 수 있게 해준 대가로.
언젠가는 이 이파리를 유용하게 쓸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고,
그건 다름 아닌 지금이다.
“레나스.”
“네, 관객님.”
나는 여전히 동굴 형태에 맞게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오토마타에게 부탁을 남겼다.
“내가 다녀올 때까지 페어리들을 지켜줘. 크로톤 본인은 합혼술의 의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겠지만 혹시나 부하들을 시켜서 나를 잡으려 들 수도 있을 테니까.”
거인들을 퇴치하는 건 무리겠지만 레나스의 재주라면 페어리들이 모두 달아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돌아갈 층에선 그녀의 전투력이 필요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누군가와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
“그럼 다녀올게.”
그렇게 나는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를 사용했다.
레나스를 5층에 두고 온 이 순간의 결정.
내가 그것을 후회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S급 아이템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를 사용했습니다.]
[죄수는 총 5개의 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아이템은 일회용이고 제한시간은 24시간이니 신중히 골라주십시오.]
[0. 대기실, 1. 화룡도, 2. 삼월초원, 3. 대수림, 4. 만철도시]
[…….]
[요청 처리 완료했습니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면회 신청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면회 장소는 1층 화룡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