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빙설협곡 (6)
거인의 손에 목뼈가 부러진 아수라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리다가 소멸했다.
나는 방금 일어난 현상의 진의를 깨닫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스킬 아수라대멸겁으로 불러내는 아수라는 실체가 없는 무형의 존재. 내 의지에 반응하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걸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고?’
거인 크로톤이 단순히 근력만 강한 게 아니란 뜻이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무공과 그에 기반한 초식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라.”
그의 왼쪽 가슴에 그려진 황금색 문신이 광채를 발휘했다. 그러자 초대형 마법구가 그와 나를 둘러쌌다.
‘이건?’
삼월초원에서 천마 설공을 상대하기 위해 백묘탑의 모든 마법사들이 힘을 총동원해서 만들었던 그 결계와 흡사했다.
그걸 혼자서 만들어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야만전사처럼 생긴 외모에 압도적인 덩치를 갖고 있으면서…… 마법까지 구사한다고?
밸런스가 한계치를 넘어 붕괴한 조합이잖아.
“너는 정체가 뭐냐? 어떻게 거인이 마법도 쓰는 거야?”
그러자 크로톤은 코웃음을 치며 이번엔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벅지에 새겨진 문신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문신은 사라지고 그의 양손에는 반투명한 검과 방패가 들려 있었다.
실체가 없는 아수라의 목을 자른 녀석이다.
반대로 저 무기는 허상처럼 보이지만 느껴지는 존재감은 천하의 명검 못지않은 기운이었다. 닿으면 그대로 바스라질 것이 뻔할 만큼.
“나는 만인지상의 존재 크로톤이다. 내게 불가능한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에 답하는 데 적어도 100년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투우우웅.
크로톤은 자비의 시간은 끝났다는 듯 직선경로로 질주해왔다.
순식간에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가 지워졌다.
축구 경기장의 절반 크기인 아르젠티노사우르스가 랩터처럼 빨리 달릴 순 없다. 그건 지구가 가진 중력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법칙.
그런데 이 감옥 안에서 그딴 법칙은 개나 주라는 듯 크로톤의 동작은 민첩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 받아보아라!”
신전의 기둥을 뽑아 휘두르는 기세로 크로톤이 검을 휘둘렀다. 파괴력을 줄이기 위해 뒤로 물러나면서 디아볼릭을 들었으나 아찔한 충격에 튕겨날 뿐이었다.
“끄읏!”
내가 한참을 날아가지 못했던 건 크로톤이 만들어낸 결계에 등을 부딪혀 다시 땅바닥에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더 발악해 봐라, 등반죄수. 감옥을 올라왔다는 자부심에 눈이 먼 너희들을 농락하는 게 내 큰 즐거움이거든!”
크로톤이 휘두르는 검의 궤적은 매서웠다.
녀석은 나처럼 작은 소인들을 몰아붙이는 데 소름 끼치도록 익숙해 보였다. 반면에 나는 이 정도로 사이즈에 격차가 있는 적수와 싸워본 경험이 전무했다.
그것은 지구에서 플레이했던 무수한 게임들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미친 개발자도 마법과 술식은 물론 무기를 소환해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보스몹을 설계하진 않는다.
그건 게임의 밸런스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행위.
눈앞의 괴물은 그 정도의 끔찍한 재앙이었다.
꽈아아아앙!
“이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가 보구나. 응?”
고작 세 번 정도 크로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을 뿐인데 온갖 내장이 꼬여버리는 기분이었다.
“퉷!”
울컥 올라온 핏물을 새하얀 눈밭 위에 토해냈다.
그러자 오히려 정신은 맑아졌다.
1층 화룡도에서 맨몸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같이 붙잡혀 온 식인 홉고블린 차카 도기노브에게 이처럼 흠씬 두들겨 맞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작신작신 얻어맞을수록 용사의 정신은 또렷해지는 모양이다.
“그래, 완전히 패배다. 도저히 감당을 못하겠군.”
“크하하하! 설마 이길 생각이었던 거냐.”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계획을 수립하는 데 있어 기본이 되는 적의 능력치 파악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전신에 그려진 문신 중 4분의 1도 채 발동하지 않은 상태로 나를 가지고 놀았다.
녀석의 패를 다 구경해보기도 전에 내 쪽에서 파산이 나 버린 것이다.
“슈바인 스트링거. 너도 층장을 쓰러트리거나 본인이 층장이 되었기에 등반을 계속해 온 거겠지. 그러면 알고 있을 것이다. 층장과 교도관은 종종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는 것을.”
“맞아. 그래서?”
“5층의 교도관인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은 너에 대해서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듣기로 8층에서 내려온 죄수와 싸운 적이 있다지?”
크로톤은 삼월초원을 습격했던 설공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층의 모든 인원이 총력을 기울여 가까스로 막아냈던 무지막지한 죄수의 이야기를.
“궁금하지 않나, 등반죄수. 어째서 그자는 8층에서 가만히 너희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층을 건너뛰어 내려갔는지 말이다.”
“그 이유가…… 너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 나는 5층의 층장이 된 이래 단 한 녀석도 위로 올려보낸 적이 없지. 스스로 등반을 할 생각도 없고.”
크로톤은 큼지막한 엄지를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 몸이 곧 등반죄수들의 장벽이다. 강줄기가 바다로 뻗어 나갈 수 없도록 틀어막는 댐이지! 숱한 등반죄수들의 눈물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다.”
녀석의 말이 허풍이라고 비웃어줄 형편이 아니라서 화가 났다.
하지만 분노를 터트리는 대신 나는 디아볼릭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잘난 척은 그만하면 충분히 들었어.”
“오호라. 이제 저항을 완전히 포기한 건가.”
크로톤을 이 자리에서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인정했기에 지금부터 내가 하는 행동은 탈출의 시간을 벌기 위한 발악이라 할 수 있겠다.
용사의 최종무장 아론다이트가 소환되며 빛을 뿜어냈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사식 비천성검(飛天聖劍)]
쐐애애애액!
튀어나온 아론다이트가 날아간 곳은 크로톤의 목젖이었다.
녀석은 당황하지 않고 반투명의 방패를 성검의 궤적에 가져다 대었으나 아론다이트는 그것에 구멍을 내며 날아갔다.
푸우우욱!
“뭣이?”
방패를 뚫고 방향이 조금 틀어진 아론다이트가 크로톤의 쇄골 근처에 박혔다.
하지만 그 깊이는 한없이 얕았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세 명의 친구들을 살폈다.
“얘들아, 내 말 들리지?”
결계 바깥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아스티나, 제르비어스, 캉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너희를 여기에서 빼내 줄 수 없을 것 같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셋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버티고 있어. 기필코 너희를 제물로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
남은 힘을 짜내어 천마어기행공으로 날아올랐다.
내려선 곳은 크로톤의 가슴에 꽂힌 아론다이트의 칼자루 위.
성검이 녀석의 피부를 뚫고 들어간 간격은 고작 손바닥 두 뼘 정도였다. 모세혈관에조차 닿지 못했기에 상처에선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있다.
“크로톤, 확실히 너는 대단한 녀석이다. 아마 자신의 피 색깔이 무슨 빛을 띠고 있는지도 잊어먹었겠지.”
“그렇다. 방금 네가 만들어낸 생채기조차 처음 있는 일이지.”
마음속으로 아이템 수납을 외쳐 아론다이트를 역소환했다. 얕은 상처가 금세 서로 달라붙으며 본래의 검은 피부로 되돌아왔다.
재생능력까지 있다는 거군. 완전 사기캐네 진짜.
“하지만 다음에 내가 널 찾아왔을 때는 다를 거다. 워낙 몸집이 비대하니 그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의 양도 대단하겠지? 네놈의 피를 범람하게 해서 이 눈밭 전체를 빨갛게 물들여 주겠어.”
크로톤이 내뿜은 콧김이 허공에 떠 있는 나를 조금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허세를 부리는 건가. 말했을 텐데. 너를 빠져나가게 둘 생각은 없다고.”
“네가 등반을 막고 있는 댐이라고? 지금은 빈손이지만 그 댐을 붕괴시켜버릴 굴착기를 갖고 돌아오겠다. 네놈은 내 친구들 중 하나도 건드릴 수 없을 거야. 그 전에 죽여버릴 거니까.”
크로톤의 성난 주먹이 내 몸을 움켜쥐었다.
콰드드득.
드래곤하트 플레이트의 단단한 재질에 유격이 생기는 느낌이 전달돼 왔다.
“자아, 어떻게 빠져나갈 거지? 응?”
“탈출 수단이 있지. 저 커다란 성에 처박혀서 내 귀환을 기다려라, 이 시커먼 자식아.”
그렇게 말하곤 나는 파천황의 권능을 발휘했다.
이 층에서 새로 사귄 친구의 이름을 외친 것이다.
“친구 토니아의 곁으로 순간이동!”
*
페어리 퀸 토니아는 끝끝내 크로톤을 찾아가겠다고 고집부린 내게 탈출 수단이 없는 한 죽게 될 거라고 경고했었다.
그래서 나는 여왕에게 부탁했다.
‘나와 친구가 되어줘.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탈출할 수 있거든.’
‘여왕과 친구가 된다는 건 곧 우리 일족의 운명을 너에게 건다는 뜻이야. 감당할 수 있겠니?’
‘물론이지. 크로톤과 싸워서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어.’
철푸덕.
순간이동을 끝내자마자 쓰러진 건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약하고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깜짝이야!”
“진짜로 인간이 우리 둥지에 왔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보니 내가 어떤 동굴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압도적이었던 추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카페트처럼 깔려 있었고, 꽃잎 속에서 겁먹은 페어리들이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 뽀르르 날아들었다.
“곤죽이 되긴 했으나 다행히 죽진 않았구나, 슈바인 스트링거.”
페어리 퀸 토니아였다.
“어. 네 말대로 크로톤은 정말 무식하게 세더라.”
“일단은 말을 아끼고 갑옷을 벗어. 치료해 줄 테니까.”
그녀의 말대로 드래곤하트 플레이트를 해제한 뒤 드러눕자 토니아가 내 눈두덩 위에 손을 올렸다.
따스한 느낌이 전신에 충만해지며 부러진 뼈와 찢어진 상처들이 순식간에 수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텅 비어버린 마력도 스멀스멀 차오르기까지 했다.
마치 엘릭서를 찔끔찔끔 복용하면 이런 느낌일까.
“회복마법이야?”
“마법은 아니야. 너의 자연치유력을 앞당겼을 뿐이지. 회복 속도가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걸 보니…… 역시 너는 수왕 르팔타커스의 선택을 받을 만한 육체로구나.”
누워있던 자세에서 상반신만을 일으키자 내 몸 근처까지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던 페어리들이 다시 비명을 내지르며 황급히 물러섰다.
하여간 새가슴들이로구나.
“관객님, 거기 계십니까?”
그때,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동굴 안으로 뱀 같은 형체가 스르륵 바닥을 기어왔다.
눈을 한 번 꿈뻑거리고 다시 보니 그것은 몸을 길쭉하게 늘인 레나스였다.
“잘 찾아왔구나, 레나스. 그런데 그 꼴은 왜 그래?”
“이 동굴의 입구가 무척 비좁았습니다. 그래서 출입을 하기 위해 형태를 변환시켜야 했습니다.”
“그럼 잠깐만 그러고 있어. 네가 본래 형태로 돌아오면 요정 친구들이 갑갑해할 수 있으니까.”
“요정 말고 페어리라니까. 쫌.”
레나스의 단발머리 위에서 젠타의 뿔난 얼굴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페어리 퀸 토니아가 눈짓하자 다시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이제 대화를 나눠볼까, 슈바인? 크로톤과 정면승부를 한다는 건 불가능이라는 걸 받아들였겠지. 네 친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야 이해하겠다만 받아들여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어.”
“700년 동안 네 옆에서 살을 찌우라는 그 계획을 말하는 거야?”
“그래. 네가 현실을 인정하고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막아서지 않은 거니까.”
토니아의 말은 합리적이었으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곤란해. 나는 주어진 36시간 안에 다시 친구들을 구출해낼 거야. 물론 그 과정에서 거인들과 크로톤 역시 박살 내버릴 거고.”
순간 멍해진 페어리들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내가 홰까닥 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오직 페어리 퀸만이 당황하지 않고 설명을 요구했다.
“이 층에는 거인들을 제외하면 가까스로 살아남은 우리 페어리 족뿐이다. 기껏해야 오십도 되지 않지. 너를 주박에서 지켜줄 순 있으나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고.”
지원군은 없다.
빙설협곡에 있는 것은 황량한 눈밭뿐. 이용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나 수단도 전무하다.
“이 층에는 확실히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내겐 단 하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잠깐 그리운 장소에 다녀와야겠어.”
이 층에서 아무런 반격의 수단을 구할 수 없다면,
다른 층에서 구해오면 된다.